[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4년08월30일(화) 13시24분22초 KDT 제 목(Title): [조사선] 안녕들 하세요. 하이텔 불동에 다녀오느라 오랫동안 뵙지를 못했습니다. 조사선에 대한 글이 있어서 잠시 소개합니다. 석가 세존이 오랜 수행의 끝에서 보니까, 진리는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그긋은 모두가 부처님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부처가 되어서 생사를 넘으려고 했는데 알고보니 이미 모두 부처로 생사가 없었으니 너무나 기가막혀서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모두 부처다" 이렇게 말하니까 아무도 믿지를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이는 부처될려고 수십년을 공부하고 수행했는데 아무런 공부도 하지 않는 저자거리의 무지렁이도 부처라니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후퇴를 했습니다. "안 되겠네 믿지를 않으니 우선 믿게 만들어야지" 거기에서 부터 부처님의 팔만 법문이 시작됩니다. 부처님이 가신후에 그만 사람들은 팔만경전이 믿지 않는 사람에 따라서 믿게끔한 역활을 모르고 각자 자기의 성품에 맞는 경전만 보고 그것이야말로 정말 진리다.라는 싸움을 시작합니다. 그 새대를 불교사에서는 상좌부불교라고 말합니다. 엄청나게 교학이 발전하고 학문적인 성과를 거두지만 대중들은 불교에서 멀어져 갑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용수라는 분이 나오고 그 분이 시작한 것이 원래 부처님이 말씀하시려던 누구나 할 수 있는 불교로 돌아가자라는 신앙운동이 일어납니다. 그것을 대승불교라고 합니다. 조사선은 그와같은 대승불교의 기운이 중국으로 건너와서 생기게 됩니다. 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교확중심의 중국불교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불교를 하자라는 것이 조사선의 기본 입니다. 교학을 많이 공부한 사람이 선사에게 묻기를 "부처님이 누구십니까"하고 물으면 스승은 그 묻는 자가 이미 머리속에다 나름대로 어지러운 답을 갖고 어려운 불교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임마 불교는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야, 봐라 뜰앞에 잣나무가 있지 안냐" 어지러운 머리를 한 번에 싹 정리해주고 바로 마음에 들어가게 합니다. 그래도 그 때는 묻는 제자가 성심껏 물었기에 말한마디로 깨침을 얻었는데 시간이 갈 수롤 믿은이 없는 수행자가 늘어납니다. 그 때, 조사선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즉 옛날에 있던 명쾌한 진많�답을 가지고 진리문답을 가지고 어째서 그와같이 답을 했을까? 그것을 계속 의심하는 수행방법을 만들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 임마" 이것이 그 유명한 무자 화두가 됩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생물체,무생물체 관계없이 다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그래서 제자는 나름대로 머리로 정리하고 있는데 존경하는 스승이 없다고 하니 그런 궁금함이 없습니다. 오로지 이 일화에서 왜 "없다"고 했을까만 생각하게 합니다. 단, 머리로 문제를 풀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머리는 진리와 관계없는 각자의 견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훗날에는 그 쉽던 선마져 학문적인 체계를 갖게 되고 그래서 선이 어려운 느낌을 줍니다. 선의 기본 정신과 특징은 아주 쉽게 불교하자는 겁니다. 눈앞에 있는 잣나무에서 두들기는 키보드에서 다 부처가 있음을 확인시키는 겁니다. 조사선의 분위기는 대충 말씀을 드렸고, 내용을 읽으시면 화두라는 것이 머리로 푸는 것이 아니고 내용을 알아도 남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분위기는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다음에 육조혜능 스님에 대한 역사상의 날조설이 있는데 그 진위를 떠나서 육조혜능은 선을 더욱 쉽게 만든 분입니다. 그 분은 나뭇군 출신의 글자도 전혀모르는 까막눈입니다. 그런 그 분이 금강경 읽는 소리를 지나다 듣고 홀연히 모든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셨습니다. 이 건, 기가막힌 이야기입니다. 그야말로 아주 쉬운 불교가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그렇지만 그동안 5조 홍인스님아래에서 수십년 수행한 분들 입낟에서는 까무러치는 사건입니다. 오랜 시간을 투자했는데 저 까막눈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견성성불했다는 사실이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위협을 받고 남쪽으로 피신합니다. 그럼 날조설이 날조냐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증명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날조설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육조혜능을 따르는 사람들의 성격이 판이하게 구분됩니다. 날조설을 주장하는 분들은 대부분 공부를 많이 하시고 수행의 단계를 주장하시는 분들이 많고, 육조혜능을 따르는 분들은 도무지 그러한 체계와 수행의 정도를 무시하고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또 투자한 시간과 관계없이 누구나 쉽게 견성하여 부처된다는 입장에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것도 사람의 성향때문입니다. 머리좋은 분들은 머리좋은 것으로 어떻게 좀 해볼려는 습성이 있고 그렇지 않은 분들은 그냥 쉬운 불교하고 쉽은 경향이 있습니다. 얼마전에 열반하신 성철스님은 육조혜능의 선을 하시는 분입니다. 성철스님은 50년을 수행해도 그 쉬운 불교의 간단한 깨달음이 없으면 수행자 취급을 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면 깨달음은 없지만 오랜시간 여러면에서 공부하고 활동한 스님들의 입장에서는 그 또한 달가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육조혜능의 날조설은 역사적인 사실보다는 그와같은 분위기로 파악하는 것이 현명할 겁니다. 육조스님이 말씀하신 애용이 "육조단경"이란 이름으로 경전대접을 받는데 그것도 날조설이 있지만 그 내용을 보면 너무나도 쉬운 내용입니다. 본래 다 부처님이라 닦겠다고 소란피우면 부처보기 더 어렵다는 내용입니다. 그것은 내가 여기 있는데 다른 곳에서 자꾸 부처찾으면 나도 못보고 부처도 못보는 이치입니다. 완전 평등이 육조에게서 그렇게 무르 익는 겁니다. 불교사에 관심있는 분들은 육조날조설도 관심이 있지만 진리 그 자체를 보고자 하는 분들은 육조단경을 평생 지침으로 삼아도 아무런 하자 없을 겁니다. 해인사 장경각에서는 동 돈황본단경이라고 출판했습니다. ㅇㅇㄴ KIDS의 에디터를 이용하여서 오타가 많은 점 이해 부탁합니다. 그럼 글들 많이 올려 주십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