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6년05월25일(토) 13시53분11초 KDT 제 목(Title): 방편에 대하여 방편에 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신행할 때에 수도 없이 많이 듣는 말이 "방편"이란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서 이해하여서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라고 알고서 다른 수행인에게 말했더니, 하는 말이.. "이 사람아 그것은 방편이야.. 달을 가르치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을 보면 안되네.." 이와같은 말을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처님께서는 무한한 방편을 말씀하셨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불가에서 많이 쓰는 이 방편이란 말에 대하여 잘못 오해하게 되면 정말로 "손가락을 보고서 달을 보았다고" 말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방편"이란 말은 도구란 말입니다. 법화경 비유품에 나오는 불난집의 비유가 방편을 말하는 것입니다. "집에 불이 났는데 집에서 아이들이 놀이에 팔려서 불을 피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을 때에 밖에 있는 아버지가 아무리 불이 났으니까 집 밖으로 나오라고 이야기를 해도 아이들이 나올 생각을 하지를 않습니다. 그 때, 아버지가 말하기를 여기 좋은 장남감이 있으니 나와서 가져가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여 아이들을 구한다는 내용이 불난집의 비유입니다. 불난집에서 나오면 되는 것이지 장난감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방편에 대하여 오해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 오해가 드러나는 말이 다음의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성불할 수 있는 방편을 무수히 많이 말씀하셨다." 이 말은 부처님께서 성불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라는 그런 의미로 "방편"이란 말을 잘 못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불난집에서 바로 나오도록 하셨지 불난집에서 나오는데 "우선 방에서 방밖으로 나오게 하고 그리고 방 밖에서 마루문 까지 오게 하고 마루문을 열고 신발을 신게 하고 그리고 신발을 신게 한 다음에 대문까지 오게 하고 그리고 대문을 열고 나오게 하여야 한다." 이와같은 방법적인 방편을 쓰시지를 않습니다. 그런 방식은 불난집에서 나오기도 전에 불에 타서 죽게 되는 경우가 더욱 많기 때문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항상한 것이고 불변하는 것이고 오늘의 진리가 어제의 진리보다 더욱 낳은 진리라는 말이 있을 수가 없는 성품을 가집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진리를 평생을 전하셨습니다. 그것을 전법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진리를 전달하기 위하여는 부득이 말을 하셨고 행동을 보이셨습니다. 진리가 언어와 행동으로 제약될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또한 언어와 행동을 통하지 않고서 전달될 수 없는 것이 현상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현상적인 언어와 행동으로 보이셨지만 그렇다고 부처님께서 말과 행동을 제시한 것은 아닙니다. "법" 즉 참된 생명의 진리를 전하신 것입니다. 어떤 자비로운 부자가 있는데 가난한 사람이 쪽박을 들고와서 "부자시여 이 쪽박에 밥을 주십시요"라고 할 때에 부자는 쪽박에다가 밥을 퍼 담아줍니다. 또 어떤 가난한 사람이 수레를 끌고와서 "부자시여 이 수레에다가 금은보화를 담아 주십시요"라고 하면 자비심이 넘치는 부자는 그 수레에다가 금은보화를 담아 줍니다. 또 어떤 사람이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채로 와서 구걸을 할 때에 자비심이 넘치는 부자는 밥이나 음식을 담을 그릇이나 운반도구까지 마련하여 음식을 담아줍니다. 이러한 자비로운 부자는 가난한 이에게 쪽박을 준 것도 아니고 수레를 준 것도 아닙니다. 밥을 준 것이고, 금은보화를 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 전법을 하실 때에 우리들에게 법을 전한 것이지 법을 싫고 다니는 수레를 주거나 법을 담을 그릇 따위를 준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에 법을 운반하는 도구를 가지고 이것이 진짜다 아니다를 따지게 되는 경우에 하는 말이 "달을 가르치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을 보면 어쩌나.." 즉 방편이란 전달도구란 말입니다. 이 방편이 최고다 아니다를 따질 필요 없이 도구에 올려져 있는 "법" 혹은 "진리" 혹은 "생명자리"를 가져가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팔만법문은 모두 팔만가지 방편을 가지고 있지만 부처님께서 팔만가지 방편을 전하신 적이 없습니다. 즉 팔만가지 도구를 이용하였지만 전한것은 오직 하나 "법"입니다. 불법을 믿고 배우는 것은 팔만가지 도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팔만가지 도구로 표현되고 있는 "진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전을 볼 때에는 법문에 올려져 있는 "법"을 읽도록 해야 합니다. 경전속에서 법을 본다는 것을 "행간"을 본다라고 말하는 것이고 "행간"을 본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동일한 한가지의 의미를 본다는 말입니다. 모두 동일한 하나의 보편적이고 두루한 진리를 말하는 것이 경전인데 이 경전에 우열과 순서를 나누는 것 자체가 참으로 무의미한 일입니다. 어떤 경전을 보더라도 그 경전에는 오롯한 진리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래적으로 대승불교권에서 특별한 경전들을 소홀히 취급한 것은 아무런 이유가 없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현상적인 설명이 너무나도 상세하고 꾸밈이 없어서 누구나 납득할 수 있게 보여지고 있기 때문에 도구에 불과한 현상에 대한 설명을 불법으로 착각하게 되는 우려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위험성은 종교집단 논리에 입각한 보호본능에 의하여 오늘날 무시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