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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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6년05월25일(토) 13시51분54초 KDT
제 목(Title): 믿음과 수행



수행의 선결이 믿음이라는 것은 분명한 것이나
믿음도 무엇을 믿을 것이냐 하는 것에 있어서 역시 차이가 납니다.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은 믿는 대상과 믿는 것 만큼 현실로 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자신이 중생이기 때문에 수행을 해서 한단계씩 올라가서
성불로 향한다고 하면 출발의 믿음이 중생이었기 때문에
끝내는 중생살이에 머물게 됩니다.

그렇다고 중생살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중생살이와 현재의 범부의식에서 비롯되는 부자유성과
괴로움은 수행의 원인을 제공합니다만
수행에 있어서의 믿음은 열심히 하면 부처가 된다라는 것이 아니라
본래 부처님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거부하고 있어서 중생살이를 하고 있는 것이지
중생이란 실체는 없기 때문입니다.
금강경에 보면
"저가 중생이 아니요 또한 중생 아님도 아니니.."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중생이 아닌 것이 분명하나 자꾸 중생이라고 하는 근본적인
의식이 자리하고 있어서 중생노릇을 하고 있으니
또한 중생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실체가 아닌 중생이 노력해서 이루는 모든 것은 다 실체가
아닐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옛부터 마음공부하는데 강조되는 요긴한 세가지가 있는데
첫째가, 지금 이대로의 현재 나의 근본이
        절대무한, 불생불멸의 부처님이라는 철저한 믿음
둘째가, 삶에 대한 끝없는 문제의식
세째가, 부처가 중생노릇을 하고 있음에 대한 끌어오르는 분노
입니다.

그러므로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은 위의 세가지의 마음을
재산으로 삼을 것이며,
불법을 함께 닦아갈 도반이 될 자도 벗과의 희론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믿음,의심,분노감을 벗에게 제공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참으로 도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행에 있어서 근본은 경전인 바..
경전을 거울로 삼되 경전의 글자를 보아서는 아니되며
경전의 여백을 보아야 하며, 만일 공부하는 벗들 사이에
여백을 읽는 사람이 없으면 비슷한 무리끼리 담론을 하여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즉시 여백을 읽는 스승을 찾아서
스승의 말에 절대적으로 의지하여야 하며
스승을 섬길 때는 자신의 견해와 다른 말을 스승이 한다고
스승을 의심하지 말것이니 이 공부는 견해로 하는 공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행은 간단없이 하되 급한 마음과 게으름은 모두가
거꾸로 수행을 하게 되고 스승에 대한 의심만 크게 하여
만사를 그릇치게 되므로
생명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속에서 적절한 의심과 분노의
불길을 태우면,

일체 불.조사 선지식들의 은혜가 심연으로 부터 솟구치는
법열에 휘말리며 부처님과 선지식의 마음이 일순간에
휘몰아치고, 천지간의 은혜에 대한
보은,감사,찬탄,예경의 마음이 우러나오며
희미하나마 마음 구석에 남아있던
자신의 생명에 대한 희미한 의문이 사라지고
믿음에서 시작하여 다시 또한 믿음을 내리라고 봅니다.

그 때, 새삼스럽게 또 믿습니다.
중생의 노력과 중생의 수행이 아니었다는 것을...
중생의 노력과 중생의 수행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중생의 노력과 중생의 수행이 방해물이었음을...
중생이 깨달을 수가 없다는 것을
다시 새삼 믿습니다.

참고로 한 예를 말씀드리면
현재 국내에서 최고봉으로 소문이 나신 인천 선원의
한 고승아래에서 십년간 불법을 공부한 수행자가 말하기를
십년간 공부를 했는데 갈 수록 공부가 어렵고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조차도 이젠 햇갈린다면서
십년간의 공부과정을
자신이 무엇을 했고.. 언제부터는 무엇을 했고...
이렇게 십년동안 자신이 한 수행을 털어놓는데
따지고 보면 십년간 허송세월을 한 것이니
불법은 자신을 잊는 공부가 근본인데
자신이 무엇을 했다는 이야기 밖에 없으니
십년간 헛공부한 것을 말할 뿐입니다.

십년을 한 것도 헛공부인데
하루를 철야정진하고서
내가 삼천배를 해서 마음이 뿌듯해서 희희낙락하고
하루를 철야참선을 했다고 마음이 뿌듯해 지는 사람은
삼천배를 한 바도 없는 사람이고 참선을 한 적도 없는 사람으로
오히려 수행을 거꾸로 한 결과밖에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어두움으로 어두움을 극복하겠다는 불필요한
시도를 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어둡고 캄캄하게 되는 이치이니
중생이란 어두움으로 중생을 극복하겠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결과가 따지고 보면 모두 첫출발에서 첫단추를 잘못
끼워서 발생하는 것이니...
첫째인, 자기 자신 이대로의 근본이 본래가 절대적인
부처님이라는 밝음의 믿음이
아니라 이 중생이 노력해서 무엇이 되겠다고 하는 어두움인
중생으로 공부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밝음을 믿으면 둘째,세째의 문제의식과 분노감이 없어도
천상의 생활을 하게 되고, 덧붙어서 간절하고 치열한 삶의 정신이
살아있으면 필경 보은의 법열속에서 진동하는
부처님의 무한가피를 확인하리라고 봅니다.
이 공부는 근기와도 관계없고
하는 일과도 관계없으니 무엇때문에 그런가 하면
아무리 캄캄한 칠흙같은 어두움도 밝음 앞에서는
희미한 어두움과 차별되지 않기 때문이요
진리와 생명은 완전평등 완전보편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한 중생이 부처가 되는 길이 전혀없는 것은 아니니
돌계집이 아이를 낳는 도리를 간절하고 충실하게
탐구한 후에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한 오해하는 분들이
수행이란 것이 무의미한 것이라 말하는 것으로 알아듣게 되는데
수행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수행의 원천인 의지처에 대한 잘못된 믿음 하나가
만사를 그르친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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