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Param (파람) 날 짜 (Date): 2003년 2월 23일 일요일 오후 04시 06분 17초 제 목(Title): 김정은/ 중국처녀 선묘의 사무치는 사랑 출처: 오마이뉴스 중국처녀 선묘의 사무치는 사랑 부석사, 소수서원 당일 기차여행 김정은 기자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히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 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이하 중략) 무량수전 앞 안양문에 올라 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싶다.(최순우-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중) 너무나 유명한, 아니 유명해진 이 글을 읽고 있으면 불현듯 그 사무치는 고마움의 정체를 느끼고 싶어졌다. 도대체 얼마나 아름답길래 스산스러우면서도 희한하고 그것도 모자라 사무치는 고마움을 느낄까? 단풍 든 가을의 부석사가 좋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지만 부석사는 내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마땅히 가기가 쉽지 않았는데 우연찮게 기차여행을 가게 되었다. 재수 좋으면 눈 덮인 부석사를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말이다. 오전 9시 청량리역에서 친구들과 서울발 안동행 새마을열차에 올라타고 서울을 출발했다. 도착지인 풍기역까지는 약 4시간, 오랜만에 좌석을 돌려앉아 마주보고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다보니 4시간도 금방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여자 3명이 마주 앉아 있는 좌석에 끼어 앉게 된 아저씨는 낯선 여자 속에 끼어들어 마주보고 그 먼거리를 가게 되었으니 곤혹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그 아저씨의 당황한 얼굴을 보며 좀 미안한 감이 들었지만 어쩌랴, 정말 오랜만에 가진 친구들과의 대낮 기차여행을 맹숭맹숭하게 보내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두눈 질끈 감고 모른 척하고 말았다. 결국 처음에는 대면대면하던 그 아저씨도 점점 풀어지기 시작하더니 중간쯤 와서는 우리와 슬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우리보다 두 정거장 먼저인 단양역에서 내린다고 한다. 일 때문에 서울 친척집에 들렀다 돌아가는 중이라는 이 아저씨는 단양역에 내려서 하루에 두 번만 다니는 버스를 타고 두 시간 정도 들어가는 오지에서 인삼과 오가피, 고추재배를 하고 계시다는데 우리가 부석사를 간다고 하니까 얼른 주머니 속에서 부석사 신도증을 끄집어내시면서 시간 날 때마다 봉황산을 올라 반대편쪽의 부석사에 가서 예불을 드린단다. 그뿐인가? 아저씨 사는 곳에서 영월 쪽으로 조금만 가면 김삿갓 묘도 있다고 하니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가 경계를 이루는 특이한 고장에서 살고 계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말투 또한 경상도와 강원도 억양이 절묘하게 결합한 듯하다. 특히 그 아저씨는 서울 사람과의 농산물 직거래 방식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았다. 직거래에 관심이 많은 서울 사람들을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직접 농사 짓는 모습도 보여주고 근처 관광지도 구경시키고 하루정도 숙식을 제공하면서 서로 신뢰를 쌓아 지속적인 주문이 이루어지면 택배로 부쳐주는 그런 형태말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재 값싼 중국 수입산 농산물이 판을 쳐서 원가가 비싼 한국 농산물은 살아남기 어렵게 되자 이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농민 스스로 자구책을 강구해야만 할 만큼 현재 우리네 농촌이 급속도로 피폐해지고 있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금 현재 서울 경동시장에서 매매되고 있는 오가피의 대부분이 중국산이라는 이야기 속에서 아저씨의 한숨 섞인 걱정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대화중 우리에게도 오가피에 대한 약간의 선전성 멘트를 하셨는데 그 아저씨 왈 오가피에 대추 몇 알을 넣어 푹 끓여 매일 아침 저녁 한 잔씩 장복하면 건강에 아주 좋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오가피 성분이 저렴한 가격에 비해 산삼에서 약효 하나만 빠졌을 만큼 약효가 우수한 만병통치약이기 때문이란다. "부석사 구경 잘하라"며 단양역에서 내리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보며 오늘의 농촌을 다시 생각해본다. 이미 젊은이들은 도시로 나가 결혼해서 살고 있고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만 남아 있는 농촌, 어느 정도 안정되고 여유로운 노후생활을 영위해야 할 연세에 값싼 중국산 수입 농산물의 침공(?)에서 살아남기 위해 여러 가지 자구책을 강구하느라 분주한 모습에서 웬지 슬프고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래도 이런 아저씨 같은 분이 있기에 그나마 우리네 농촌이 아직 건강하게 뿌리박고 도시인들의 마음의 고향으로 거듭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아저씨가 구상하고 있는 직접 주문방식이 성공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떠나는 아저씨의 등뒤에서 나는 마음 속으로 외쳤다. "부디 아저씨 구상이 잘 되셔서 부자 되시길..." 부석사, 선묘의 못다핀 사랑의 정화가 머무는 곳 최순우씨는 무량수전 앞 안양문에 올라앉아 그림같이 겹쳐 있는 아름다운 능선을 보면서 부처님의 믿음을 더욱 숭엄한 아름다움으로 이끌어 줄 수 있었던 안목의 소유자로서 의상대사가 생각났다지만 나는 그보다는 선묘라는 전설 속의 여인이 먼저 생각났다. 사실 부석사하면 선묘라는 이름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당시 장래가 촉망되는 엘리트 학승이었던 원효와 의상은 두 사람의 성정상 너무나 판이한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원효가 당나라 유학도 가지 않고 되돌아와 요석공주와 동침하여 설총을 낳고 스스로 파계자라 하면서 대중 속으로 들어가 널리 불교를 전파한 데 비해, 의상은 성실하게 엘리트 코스를 착착 밟고 그를 짝사랑하는 중국처녀 선묘의 애타는 사랑을 뿌리친 채 신라로 와서 대대적인 왕가의 지원을 받아 불교의 정수라는 화엄사상을 뿌리내리는 데 주력함으로써 한국불교의 이론적 깊이를 향상시키는 데 공헌했다. 그러고 보면 올라가는 방식이 각기 다를 뿐 산 정상에 오르면 도는 하나라는 사실이 맞는 것 같긴 한데 과연 어떤 생활이 더 어려웠을까 생각해본다. 겉보기엔 매사 금욕하고 노력하는 의상대사의 삶이 힘들어보이겠지만 나는 얼핏 방탕해지기 쉬운 생활을 하면서 방탕해지지 않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원효대사의 자질이 더 특출하지 않나 싶다. 이처럼 매사 좀 고지식한 듯한 의상이 당나라에서 공부할 때 머물던 하숙집 딸 선묘 낭자는 의상에 대한 사랑이 절절했지만 매사 성실하고 빈틈없는 의상대사의 태도에 가슴 아픈 짝사랑만 키우다가 마침내 공부를 마치고 신라로 돌아가는 의상대사를 보지못한 채 배가 떠나자 그만 낙망한 나머지 바다로 몸을 던져 용이 되었다는데 그 용은 의상대사가 탄 배를 주위에 머물면서 태풍에도 끄덕없게 만들어 무사히 의상의 신라귀환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정말 적극적이다 못해 지독한 짝사랑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의상의 수호용이 된 선묘의 끝이 없는 사랑은 부석사 창건 설화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의상이 사찰을 세우라는 왕명을 받아 전국 각지에 길지를 알아보다가 이곳 영주땅에 당도해서 지금의 부석사 터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곳은 이미 도둑의 소굴이 되어 버려 절을 짓기가 쉽지 않아 고민하던 중 의상의 수호용이었던 선묘낭자가 도둑들 보는 앞에서 큰 돌을 세 번이나 공중으로 들어올려 이 법력에 놀란 도둑들을 물리쳐 부석사를 창건했다는 것이다. 이미 절 명인 부석(浮石)이 뜬돌이라는 의미에서도, 구석에 비록 공중에 떠 있지는 않지만 부석이라 씌어진 돌멩이 속에서 전설 속의 흔적을 떠올리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기에 나는 부석사에 오르면서 선묘의 체취를 떠올린다. 지금은 비록 앙상하게 여위어 있지만 부석사 초입에 줄줄이 늘어선 은행나무에서 가을바람에 은행잎이 어지럽게 내려 쌓이는 것을 상상해보라. 의상에 대한 선묘의 사랑만큼 무겁게 은행잎이 쌓인 길을 밟고 오르면 선묘낭자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비원 덕택에 없던 사랑도 저절로 이루어질 것같은 느낌이 들 만큼 예쁘고 사랑스러운 길이었다. 굳이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읊조리지 않아도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은행잎을 사푼히 즈려밟고 가라는 그 애틋한 정성이 바로 선묘낭자의 넋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상상을 해본다. 그뿐인가? 108 계단을 올라 안양문으로 오르는 특이한 구조의 비좁은 입구를 보면서 극락에서의 새로운 탄생을 떠올리며 새생명이 탄생하는 모태를 연상했다면 억지일지 모르겠지만 이처럼 부석사는 곳곳에 섬세함이 배어 있는 여성적인 절이다. 나 또한 무량수전 앞 안양문에 올라 앉아 저 밑에 펼쳐진 능선의 바다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 겨울답지 않게 따스한 햇살은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은 둥굴둥굴한 능선을 더욱 포근하게 감싸주고 있었다. 어디 한군데 모난 곳없는 편안한 시골 분위기라고나 할까?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서 그 따스한 햇살 속에 절로 꾸벅꾸벅 졸 것 같은 친숙함, 이러한 미의식이야말로 바로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자연미가 아닐까? 예전 봉정사 극락전 아래를 굽어보며 아득한 고결함을 느꼈다면 이곳에서는 평안하고 푸근한 마음의 안식을 느낀다. 굳이 한국인의 미의식이라는 말로 결론내리지 않더라도 바로 선묘의 희생적인 사랑의 정화가 산 능선 구비구비에 깃들어 마치 어머니처럼 푸근함을 풍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좀 낭만적인 이유에서 나는 멋없는 의상보다는 애절하지만 희생적인 여인, 선묘의 넋이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저러나 무량수전 안에 모셔진 흙으로 만든 거대한 아미타여래(소조여래좌상)는 어찌 이 좋은 경치를 마다하고 홀로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지. 깐에는 신라 서라벌(경주)를 향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보다는 선묘의 사랑을 차마 받기 부담스러워 외면하고 있는 의상대사의 속마음이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객적은 생각을 잠시잠깐 해본다. 노년의 김삿갓이 백년에 한번 볼까 한 이 곳의 경치를 보고 무정한 세월과 이미 늙어 있는 자신을 한탄하는 시를 남겼다는데 나는 그보다는 젊은(?) 탓인지 안양루 안에 편액된 '歲月無情老丈夫'라는 화려한 김삿갓의 시보다는 부석사 해우소에 쓰여졌다는 간단한 글귀 하나가 더 감동을 준다. "버리고 또 버리니 기쁨일세." 소수서원- 피폐해진 학문을 다시 이어 닦는곳(旣廢之學 紹而修地) 학교 역사 책에서 누누이 한줄을 자랑하던 곳, "풍기군수 주세붕이 한국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선생을 기리기 위해 만든 최초의 서원, 백운동서원의 후신으로 최초의 사액서원이며 대원군의 서원 철페령에도 살아남은 유서깊은 서원의 메카"라 알려진 소수서원에 들렀다. 이곳 또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도산서원의 창시자인 퇴계 이황과 관계가 깊다. 바로 이황이 풍기 군수로 재직시 명종에게 상소하여 소수서원이라는 명종의 친필 현판을 하사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곳이 안동의 도산서원과 함께 영남 유학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유학의 시조라는 명칭에 걸맞지 않게 도산서원에서와 같은 엄청난 규모도 아닌 매우 단순하고 소박한 구조인데 또 한번 놀라게 된다. 오히려 도산서원에서 느낀 서원이라는 곳에서 볼 수 있는 폐쇄된 장소에서 타인으로서 느꼈던 위압감과 낯설음보다는 오히려 소박하지만 친근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연산군 이후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로 희생당한 선비들의 원혼을 풀어주기 위해 바위에 붉게 써 있는 "敬"자 글씨의 무속적인 이미지 하며, 성리학을 수양하는 곳에 어울리지 않게 서 있는 숙수사라는 절의 당간지주하며,어딘가 정돈되지 못한 건축구조이지만 나름대로의 뜻이 있는 건물들(직방재, 일신재, 학구재 등등)이 기묘하게 어울려져 있는 것을 보면서 유불선이 조화된 포용과 어울림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이곳에서는 도산서원처럼 우리끼리라는 끼리의식을 찾아볼 수 없어서 다행이었다. 사족이지만 같이 간 친구 중에 국어교사를 하는 친구가 스승이 생활하는 직방재와 일신재의 계단이 유생들이 공부하는 학구재의 계단보다 한 계단이 더 쌓여진 이유가 바로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말라는 이유에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 쾌재를 불렀다. 이번 학기에 학생들에게 예전 성현들은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을 만큼 스승을 존경했었노라는 이야기를 소수서원 얘기를 하면서 꼭 해주어야겠다고 말이다. 글쎄, 그 이야기에 학생들이 얼마나 수긍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학문이나 모든 세상만사가 다 초기의 순수함을 지니고 있으면 좋으련만 다 세월이 흐르고 구조화되기 시작하면 편이 갈라지고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형성되는 것같다. 모든 일이 다 초심으로만 돌아간다면 불가능한 일도 없을 것이고 서로 찡그리며 큰 소리 나는 일도 없을 터인데... 화려하지만 공고한 자신들만의 벽을 쌓고 스스로의 왕궁을 만들어 사는 도산서원과 달리 소박하고 정돈되지는 않았지만 열린 사고의 소수서원을 보면서 불현듯 초심이란 단어가 생각났다. 비록 눈 덮인 부석사를 보지는 못했지만 가을이 되고 노란 은행잎이 떨어질 무렵 은행잎이 떨어진 부석사 일주문을 거닐며 선묘의 가녀린 넋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아야겠다는 느낌을 간직하면서 아쉬운 대로 여행의 마침표를 찍었다. 2003/02/21 오후 11:20 ⓒ 2003 OhmyNew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