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6년02월27일(화) 13시56분18초 KST 제 목(Title): 반야심경 14 14.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무노사 역무노사진 - 2 십이연기법의 부정을 보다 상세히 설명하겠습니다. 1) 연기법이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이 사라지고 저것이 사라지면 이것이 사라진다. 이렇게 말해지는 연기법을 우리는 흔히 다음과 같은 측면만을 봅니다. 이것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 저것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생긴다. 이것이 먼저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으니 이것이 사라지면 순서에 의하여 저것도 사라진다. 저것이 먼저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먼저 사라지면 이것도 사라진다. 즉 시간적인 순서속에서만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연기법은 순서적인 연기만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 다음과 같이 알기도 쉽습니다. 이것과 저것은 존재이고 이 존재사이에 연관관계가 있다. 이렇게 알기도 쉽지만 연기법은 이런 것은 더욱 아닙니다. 그럼 무엇을 말하는 가하면 이것과 저것은 서로 둘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즉 이것과 저것은 동일 생명이고 한생명이란 말이 곧 연기법입니다. 이 연기법을 우리의 목숨으로 말하게 되면 우리가 개별적으로 알고 있는 자신의 목숨이 사실은 별도로 존재하는 특별한 것이거나 무한한 우주의 생명과 대립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우주가 먼저 있은 다음에 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있기에 우주를 보는 것도 아닌 무한한 대 생명과 동일한 생명으로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됩니다. 이를 통털어서 부처님생명이라고 말합니다. 2) 십이연기 위와같은 근본적인 연기에 대한 이해속에서 십이연기를 이해하여야 합니다. 십이연기란 우리가 삶을 사는데 느끼는 존재인식속에서의 괴로움이란 것이 어떻게 생성 되는지에 대한 것을 부처님께서 설하신 내용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두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무명 : 실체성이 없는 것을 실체성이 있다고 착각함 행 : 착각속에 실체화를 구체적으로 행동화함 식 : 실체가 아닌것을 실체화 시키면서 생기는 분별 인식 명색 : 실체화의 분별 인식속에서 육체와 정신단위로 고정된 개체 생명 인정 육처 : 눈.귀.코.혀.몸.의지를 자신으로 인정하는 고정된 자아관 촉 : 육처와 분별 인식속에서 대상과의 만남 수 : 대상에 대하여 괴로움,즐거움,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상태를 느낌 애 : 즐거움만을 취하려는 갈구적인 욕망 취 : 즐거움을 주는 대상을 소유하려는 소유의식 유 : 소유하는 자와 소유 대상에 대한 상대적 세계의 인정 생 : 개체 생명의 태어남을 인정 노사우비고뇌 : 태어났다고 생각하기에 나타나는 늙음과 죽음등에 대한 괴로움 이런 십이연기의 각각의 항목들은 어떤 순서적인 것 외에 동시발생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생노병사의 괴로움은 무명에서 시작되어 시간적인 개념속에서 만들어진다고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무명으로 인하여 동시발생적으로 생노병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의 세계 그 자체는 실체성이 없습니다. 현상적으로 나타난 세계는 생명의 펼침일 뿐이지 그 자체로 어떤 특별한 의미와 내용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유하건데, 현상이란 우리가 잠을 잘때에 입는 잠옷이나 외출할 때 입는 외출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잠옷은 잠잘 때 필요한 것이지 잠자는 것을 빼고서 그 잠옷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외출복도 외출할 때 의미가 있지 잠잘때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옷 자체가 어떤 상황 어떤 환경에서도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이 어리석은 것 처럼 무명이란 곧 그와 유사한 착각현상입니다. 무명을 더욱 강하게 하는 것은 역으로 생노병사에 대한 괴로움일 수 있습니다. 현상적 생에 대한 집착은 착각현상을 더욱 강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분별 인식은 무명을 더욱 강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동시적이면서 또한 시간적으로도 계속 굳게 만들어 지는 특성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단지 각각의 항목에 따른 순서적인 개념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열두가지는 시간적일 뿐만 아니라 동시적으로 발생하여 한 순간의 괴로움을 만드는 유기적인 생명현상입니다. 3) 십이연기법의 부정 불법을 수행하는 것은 이 무명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무명이 없으면 바로 생노병사로 부터의 괴로움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명이라는 착각현상이 곧 실체성이 아닌 단순한 착각현상이라면 이 무명을 무명이라고 인정하고서는 무명을 없앤다는 것은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 됩니다. 무명도 실체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이 무명을 나쁜 것이라고 말하시지 않습니다. 무명으로 부터 생노병사의 괴로움이 싹튼다고 해도 무명이 나쁘다고 말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명이라는 착각에서 생기는 생명의 현상이 없으면 인류의 문명도 존재하지가 못하고 삶의 역동성도 존재하지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괴로움이라는 실존적인 현상이 무명으로 부터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도 듣는 사람들은 이 무명을 고정화시키고서 무명을 없애야 하는 것으로 듣습니다. 왜냐하면 괴로움을 싫어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괴로움을 실체성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괴로움을 싫어하게 되고 괴로움을 실체성으로 인정하고 있는 현재의 삶으로 인하여 무명도 고정화시키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와같이 무명을 고정화시키고 무명을 없애겠다는 것은 끝내 끝까지 무명을 인정하는 결과 밖에는 만들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상대가 없는 절대적인 생명인 본래의 우리의 생명, 그러니까 잠을 잘 때 잠옷을 입고 외출할 때에 외출복을 입는 주인공인 무한하고 절대적인 부처님의 생명을 비추어보니 무명이라는 것도 우리들의 본래 생명이 입고 있는 옷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잠옷은 좋은 것이고 외출복은 나쁜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절대생명속에는 상대적인 생명을 규정하는 무명조차도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인 개체생명의 무명이라고 말하는 것도 실제로 부처님의 절대무한 생명이라는 진실생명속에서는 실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명을 없애는 것은 무명을 인정하고서 무명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무명의 생명현상 마저도 부처님의 절대생명속에서 비추어 보면 무명은 현상일 뿐 실제하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절대적인 광명속에서는 무명도 없고 무명이 없기 때문에 무명을 없앤다든지 아니면 무명이 다하여 소멸된다든지 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명조차도 모두 부처님의 절대생명이 모습을 드러내는 생명의 외형적인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무명이 본래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늙고 죽음이라는 괴로움도 실체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무한 생명이 한 순간 모습을 보이는 현상에 불과한 것이지 우리의 본래 생명의 진실세계 입장에서는 십이연기라는 고정된 것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늙고 죽음이 다함도 없게 됩니다. 무명이 개체적인 자아를 생성시키고 괴로움의 근원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자아를 인식하기전에 무엇이 자아를 인식시키는 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자아 즉 "나"와 "너"라고 인식을 할때에 그 인식의 밑바탕을 따지고 들어가면 어는 곳에서도 독자적인 존재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끝까지 추적해 보면 "자기"라고 생각하고 있는 특별하고 고유한 "자기"가 있음을 찾지 못합니다. "자기"라고 생각하고 있는 주인공은 "자기"라는 고유한 것이 아니라 엄청난 절대무한생명임을 알게 됩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에 있는 것은 고정된 "자기"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4) 나무아미타불 그러므로 불법을 공부하여 본래 주인공의 자리에서 산다는 것은 무명을 인정하고 그 무명을 어떻게 해보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절대무한의 생명의 입장에서 부처님의 절대무한의 힘을 끌어내어서 사는 것입니다. 본래 생명의 입장에서 사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절대무한 생명의 입장에서 그 무한한 힘을 끌어내는 것은 잠을 잘 때에는 잠옷을 입고 외출할 때는 외출복을 입는 자연스러움을 사는 것입니다. 잠옷을 입고나서 외출복을 입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혹은 외출할 때 외출복을 입고서도 내가 잠옷을 입었어야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불필요한 갈등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삶은 참다운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옷이 주인노릇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당당하게 외출복을 입고 당당하게 잠옷을 입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