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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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4년07월19일(화) 09시23분41초 KDT
제 목(Title): 질문에 대한 변,(나)


윤석주님 감사합니다.

>원래 나라고 하는 나가 있어야 윤회가  되는 것 아닙니까?

 윤회는 삶입니다. 봄이 되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열매를
맺는 현상을 윤회라고 말합니다.
 나가 있어야 윤회를 한다는 말씀은 맞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때의 나는 우리가 알고 있는 나가 아닙니다. 우리가  나라고할 
때 그 나는 한정된 나입니다. 윤회하는 나는 상대되는 대상이
없는 나입니다. 상대되지 않는 다는 것은 하늘에 있는 별들이
나이고 뜰 앞에 있는 꽃이 나고 함께 하는 동료가 또한
나인 그런 나입니다. 그런 내가 윤회를 합니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나(육체+정신+영혼)는 윤회라는 현상을
통하여 그 때, 그 때 모습을 보이는 것에 불과하다고 불교에서는
말합니다.

>>그렇지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요. 
>>밥 한술을 먹는데 내힘이 더 많이 들었는지 아니면
>>남의 힘이 더 많이 들었는 지를...

>이것은 내가 없다는 것에 대한 설명으로는 부족한 느낌입니다.
>남의 힘이 많이 들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 내가 기여한 정도가 작다고 해서 내가 없다고는
>말할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앞에 윤회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나라고 알고 있는 나는
공간과 시간과 환경이 제공될 때만 그 순간에 인정되는
나입니다. 그리므로 그 나는 환경과 시간에 종속되어 있는
나입니다. 환경과 시간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나입니다.
 불교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참다운 내 생명은 남과 구분이 되는 그런 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계론적인 사고와 수학의 집합론적인
사고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드라망의 비유속에서
말하는 하나의 구슬은 전체의 구슬 집합의 한 원소가
아닙니다. 억지로 인드라망이라는 것을 말하지만 구슬은
다른 전체의 구슬을 흡수할 수 있는 고유한 메카니즘을 갖고
있는 독립체가 아닙니다. 그 구슬한개가 그대로 전체구슬입니다.
 그러므로 한 개, 한 개 구슬이 있느냐 하면 있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내가 없다"라고 하는 것은 보여진 독립체 구슬로써의
내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독립체가 아닌
전체구슬로 표한된 나는 존재하고 그 내가 나의 원래 생명이라고
불교에서는 말합니다. 이 때 여기서 key board를 두들기는 나를
어떻게 보아야 하냐하면 key board를 두들기고 있는 나는
전체구슬로서의 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독립체인
집합의 원소로서의 내가 key board를 두들긴다고 여깁니다.

 전체 구슬로 표현되는 나를 불교에서는 부처라고 하는 것이고
독립된 구슬을 나라고 여길 때 중생적으로 살고 있다.라고
말하지만 중생적으로 살고 있건, 아니건에 관계없이 모두가
부처인 것입니다. 본래 부처가 착각을 일으켜서 나를 작게
만들기 때문에 인생이 괴로운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1:불교의 시작에서 말한 것 처럼 불교라는 종교는 괴로움이라는
실존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괴로움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우리는 부처님이지만 우리가 부처님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언제나 삶이 제약되고 축소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제약되고 축소적으로 살아도 전체적으로는 아무 문제도 없지만,
또한 우리는 문제를 지금 느끼는 것입니다.
 본래 나는 부처님이었구나!, 내가 절대능력의 조물주였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착각을 하여
조그만하게 만들어 버린 나입니다. 조그만 나만 아니면
뜰 앞에 있는 꽃잎이 나라는 것을 알고, 옆의 동료가
나임을 알고, 이 우주의 아주 작은 모든 것에서 아주
큰 모든 것까지 다 나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때
우리는 무한한 진짜나의 입장에서 삶을 살게 되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는 삶, 거침이 없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참회한다는 것은 내가 진짜나의 무한 능력으로 살고 있지 않고 
가짜나로 살고 있었음을 인정하는 겁니다.

 제 스승 한탑스님의 말을 빌으면,
 이 우주에는 딱 하나의 법칙만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인정하는
것만 내 앞에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나를 못난이로
인정하면 내 앞에는 못난이들만 나타나고 병이 있다고
인정하면 병고에 시달리게 되고 내가 나를 집합의 한 원소로
생각하면 나는 한 원소의 힘 밖에는 쓸 수 없습니다.

 여기서 무언가를 인정한 주체는 부처님입니다. 그러나 인정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은 중생입니다. 그러므로 참회를 한다는 것은
중생으로 살았구나를 인정하는 겁니다. 중생으로 살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곧 이제 중생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중생과 부처가 다르지는 않으나 벌어지는 현상은 이렇게
달라집니다.

>인드라망의 한 요소로서의 나는 그러므로 소중하다.
 이제 소중한 것은 인드라망의 한 요소로 보여진 그 안에 있는
절대적인 참나가 소중한 것이고 인드라망의 한 구슬로 표현된
외모가 소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불교에서 말하고 있음을
이해하셨는지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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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운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말로 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고 말을 듣는 것도 참으로 어려운 내용입니다. 그렇다고
말을 하지 않고는 어떻게 해 볼 도리도 없는 것이고요.
 윤석주님의 질문으로 인하여 소중한 사색의 시간을 가졌기
때문에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군요.

 저도 윤석주님도
아마도 기계론적인 사고에 익숙하고 또 그 사고를
보다 더 정교하게 전개해야 하는 입장인지도 모르지만,

 다음의 책이 우리가 나를 작게 만드는 습관을 해체하는데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권해드리고 싶네요.
그 책은 우리들의 삶의 차원을 직접 높이도록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선 어느정도 관점을 바꿔줄 수는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주심과 정신물리학", 정신세계사 
  이차크 벤토프 저, 류시화 옮김


  윤석주님의 하시는 모든 일이 좋은 결실 맺게 되길 바랍니다.

  날마다 날마다 좋은 날 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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