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6년02월05일(월) 12시40분28초 KST 제 목(Title): RE] 소 귀에 경읽기 한번 잘 따져 봅시다. 제가 불교지상주의에 빠져서 불교만이 옳다라고 말하는 것과 크로체님이 노자나 마하리쉬나 불교나 다 같다고 말하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만일 제가 불교지상주의로 비난을 받아야 한다면 같은 이유로 크로체님은 모두 같은 것이다라는 말로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논점만을 흐리게 하는 말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남의 글이 아닌 크로체님의 심중에서 나오는 말은 말을 할때마다 계속해서 실언이 나오고 있습니다. 깨달음이란 것을 다시 둘로 나누었습니다. 연기를 깨닫는 것과 견성오도는 불가에서 다른 말로 쓰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히 크로체님은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 아니라 다른 깨달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노자나 마하리쉬가 크로체님의 깨달음과 같은 깨달음을 d루었다면 그들도 불교의 깨달음은 아닙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이라고 할 때 그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표현하는 말이 대기대용입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도에 대하여 그럴듯하게 설명을 하고 한치에 오차없이 진리문답을 할 수 dㅆ더라도 병의 근원지와 병자의 인과를 보는 즉시 알지 못하면 그런 사람을 불교에서는 깨달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말을 잘해도 대기대용의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은 언제든지 또 다른 병의 근원지 즉 완전하게 견성오도를g 지a ㅅ하여 실언과 실수를 계속하게 됩니다. 그러니 불필요하게 따질 것이 아니라 1. 주관과 객관이 없다라는 말이 어째서 불가에서는 깨닫지a ㅅ한 말이라고 하는 것일까? 2. 바라보는 의식이 진아라는 표현이 어째서 불가에서는 틀린말이라고 하는가? 3. 연기를 깨치는 것과 마음의 인식틀이 전화되는 jㄱㅅ이 어째서 불교에서는 같은 말로 쓰이는 것일까? 그것을 알아보도록 하십시요. 그리고 앞서 말한 몇가지의 예들을 우습게 알지 마십시요. 칠불통게와 연기법은 언뜻 보면 다른 것처럼 보이나 둘은 같은 것입니다. 쓰임을 모르는 사람... 그는 자신도 건지지 못하고 남도 건지지 못하네... 자신에 대한 탐구를 멈춘 사람이네... 대기대용은 연기를 깨달은 중도의 사람만이 할t 있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