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Enlight (D.S.) 날 짜 (Date): 2002년 1월 9일 수요일 오전 07시 00분 05초 제 목(Title): 달의 집에서 6 봄마다 피는 벚꽃을 볼 때 생(生)의 무상함을 아파하라. 여기가 블리스(R. H. Blyth)의 '선과 선의 고전 (zen and zen classics)'에서 이 구절은 뭔가 병적이다라고 지적한 대목이다. 그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병적이지 않다. 블리스는 분명히 구절에 겁먹고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방어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진술이다. 봄마다 피는 벚꽃을 볼 때 생(生)의 무상함을 아파하라. 이것은 단순한 진술이다. 누구라도 지켜 보면 그것을 느낄 것이다. 아픔으로 느낄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목숨이건만 그토록 연약하다고? 참으로 눈부신 광휘이건만 그토록 순간적이라고? 이 아름다움이 그토록 덧없다고? 그토록 아름다운 사람들, 그러네 한낱 대향의 잔물결처럼 한 순간 여기에 있다고 사라진다고? 누가 그 아픔을 피할 수 있는가? 잘 보면, 장미꽃 하나하나가 그대에게 생명의 고통을 상기 시킬 것이다. 왜 아픈 것일까? 아름다움은 영원해야 한다는 것, 사랑은 영원해야 한다는 것, 진리는 영원해야 한다는 것, 거기에 아픔이 있다. 진리, 일시적인 것? 사랑, 덧없는 것? 아름다움, 한낱 하나의 꿈? 이것은 아픔이다. 그 구절은 조금도 병적이지 않다. 도저히 그럴수 없다. 이뀨는 시인이 아니다. 이뀨는 한 사람의 붓다이다. 그에게서 나오는 것은 일체 병적일 수 없다. 블리스의 마음이 병적인 것이 틀림없다. 아마 그는 그 구절의 진실이 두려워 졌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읽을때, 그것을 번역할 때, 그것에 주석을 달 때 그의 여자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꽃들이나 봄에 대한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두려워졌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생의 덧없음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는 매달리고 싶다. 우리는 이것이 계속해서 살아남을 거라고 맏고 싶다. 여자와 사랑에 빠졌을 때 그대는 이것이 영원하리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그대는 안다. 누구나가 안다. 여기 지상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그대는 안다. 하지만 그것을 믿고 싶지 않다. 그대는 것을 숨기고 싶다. 그대는 "아마 남들은 그렇겠지만 내게는 영원할 것이다. 나는 예회일 것이다." 라고 믿고 싶다. 정원에 꽃들이 피어나는 것을 볼때 그대는 "남들의 정원에서는 꽃들이 실들어 떨어져도 내 정원에서는 아니야. 신이 그토록 무지비할 수 있는가? 기적이 일어나겠지. 내 꽃들은 계속해서 남아 있을 거야." 그러나 기적은 없다. 예외는 없다. 법칙은 완벽하다. 봄마다 피는 벚꽃을 볼 때 생(生)의 무상함을 아파하라. 이 아픔을 그대를 슬프게 만들려는게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거기서 사람들은 줄곧 이 경문을 놓치고 있다. 이 아픔은 단지 그대를 더욱 깨어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들은 오직 화살이 그들의 심장 깊숙히 박혀 상처가 났을 때만 깨어 있기 때문이다. 안 그러면 그들은 깨어 있지 못한다. 생활이 순조롭고 편안하고 안락할 때 누가 염려 하는가? 누가 깨어나려고 신경쓰는가? 친구가 죽을 때는 하나의 가능성이 생긴다. 그대의 연인이 떠나고 혼자 남겨질 때, 그 어두운 밤 그대는 외롭다. 그대는 그 여자를 너무나 사랑해서 모든 걸 걸었지만 어느날 갑자기 그녀는 떠났다. 외롬움 속에서 울고 있을 때, 그때가 기회이다. 그 기회를 이용한다면 그대는 깨어날수 있다. 화살에 상처 입을때 그 기회를 이용할 수 있다. 그 아픔은 그대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 아픔은 그대를 더욱 깨어 있게 한다! 그리고 깨어 있을 때 불행은 사라진다. 따라서 그 구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시대를 거쳐오며, 생에 대한 붓다의 접근 방식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다 하며 붓다를 반대하는 논쟁이 되어 왔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만일 삶이 불행하다면, 붓다는 단순히 그것을 자각하게 만들 뿐이다. 그는 그대가 깨어나서 뭔가 할 수 있기를, 삶이 불행할 필요가 없기를 바란다. 거기엔 또 다른 류의 삶이 가능하다. 무상함이 없는 삶, 영원한 삶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른바 이 삶이 끝났을 때, 이 삶에 대한 집착이 끊어졌을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물론 집착이 끊어질 때는 아픔이 따른다. 모든 기회를 이용하라. 상처들을 숨기지 말아라. 그래서 블리스는 그것이 뭔가 병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왜 그대의 상처들을 자꾸만 들추는가? 왜 자꾸만 상처들을 들여다 보는가? 잊어버려라! 삶의 긍정적인 면을 보라. 왜 다른 것들을 생각하는가? 왜 꽃이 죽는 것을 생각하는가?" 하지만 그대가 생각하든 안하든 꽃은 죽게 되어 있다. 붓다가 강조하는 것은 이렇다. "그대가 이 꽃이 죽을 것임을 안다면 절대 죽지 않는 꽃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 그 연꽃은 그대 안에서 필 수 있다. 하지만 그대는 이 피고 지는 꽃들에 사로잡혀있다. 그러면 연꽃은 영원히 피지 않은 채 남아 있을 것이다." 본래인(本來人)은 필시 본래의 장소로 돌아간다 그런데 왜 우리는 헛되이 부처를 구하는가? 그 본래인은 불교의 목표이다. '본래인'이란 무슨 말인가? 본래인이란 마음이 없는 사람, 조건화되지 않은 사람이다. 본래인은 자연스런 사람이다. 우리는 조건화되고 훈련되고 양식된다. 우리는 정해진 마음의 모습을 만들어 낸다. 흰두교인, 기독교인, 자이나교인, 불교인이라고. 이들은 모두 부자연스러운 사람들이다. 기독교인은 하나의 부자연스러운 사람이다. 자연스런 사람은 기독교인이나 흰두교인이 될수 없다. 자연스러운 사람은 단순히 '존재함' is-ness의 일종이다. 이념이나 인격이나 도덕성을 가지지 않은 순진무구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허공일 뿐이다. 본래인(本來人)은 필시 본래의 장소로 돌아간다 그 본위로, 그 본래의 공간으로 돌아가는 길은 각성이다. 그대는 세뇌되어 왔다. 그대는 무엇이 돼야 하는지, 어떻게 돼야 하는지 교육받아왔다. 그리고 그 조건들을 자동적으로 따라왔다. 그대는 로봇처럼 살고 있다. 붓다는 말한다. "이 로봇과 같은 존재는 떨쳐 버려야한다. 그것을 반(反)자동화시켜라. 그대를 반자동화시키는 과정은 오직 더욱 민감해지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지 더욱 각성을 가지고하라. 깨어 있을수록 그대는 덜 경직된다. 깨어 있을수록 그대는 더 예측 불가능하게 된다. 깨어 있을수록 그대는 덜 습관적으로 움직인다. 안 그러면 그대는 그저 습관적으로 움직일 뿐이다. 줄곧 습관을 통해 작용한다." 누가 질문을 하면 대답하기 전에 잠시 기다려라. 그 대답이 기계적이지 않은지 잠시 보라. 만일 그것이 기계적이라면 그 대답은 하지 말아라. 그대는 기계가 되고 있다. 감응하라. 누가 "당신은 신을 믿는가?"라고 물으면 기계적인 대답이 나온다. "예, 나는 카톨릭인입니다." 그것은 그대의 대답인가? 아니면 남들에게서, 즉 그대의 부모나 교사, 교회에서 들은 대답은 아닌가? 만일 그대가 회교 국가에서 성장했거나 공산주의 사회에서 성장해다면 동일한 대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내 친구 한명이 소련에 갔었다. 그는 불교 승려였으며 아주 지적이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였다. 초등학교에서 그가 한 어린아이에게 물었다. "너는 신을 믿니?" 그 아이가 웃으며 말했다. "신이요? 옛날엔 사람들이 믿었지요. 과거에요. 신은 하나의 신화에요." 어린아이가 말한다. "신은 신화ㅇ요. 사람들은 신을 믿었지요. 지금은 신을 믿을 정도로 바보가 어디었어요?" 그리고 그 소년이 물었다. "당신은 아직도 신을 믿고 있나요?" 만일 그대가 공산주의 국가에서 성장했다면 신을 믿지 않는다. 칼 마르크스를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대는 성경책을 믿지 않는다. 자본론을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마찬가지다. 믿음은 타인들로 부터 온다. 본래의 사람은 믿음을 가지지 않는다. 믿음 체계를 버려라. 그러면 원래모습으로 될것이다. 대답할때는 기억하라. 그것이 그대의 대답인지, 아니면 기계적인 것인지? 그것은 그대의 감응인가? 아니면 그대의 어머니가 그대를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인다? 그저 잠시 주의 깊게 들어라. 그러면 놀랄 것이다. 누가 이야기하고 있는지, 그대의 어머니인가 아버지인가 교사인가 그대는 정확히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대답은 기계적이다. 그것을 버려라. 차라리 "나는 모르겠다." 라고 말하는게 낫다. 적어도 그것은 그대의 대답이므로 한층 진리에 가깝다. 한층 더 신에 가깝다. 진리는 신이므로. 그외에 다른 신은 없다. 사소한 일들 속에서 그대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계속 지켜봐라. 그대는 반응하는가? 아니면 감응하는가? 반응으로부터 더욱더 감응 쪽으로 마음을 기울여라. 반응이 조건화된 상태이고 감응은 각성이다. 이것은 그대를 탈바꿈시키기 위한 붓다의 기술이다. 차츰 본래인으로 다가선다. 차츰 조건화된 사람은 사라진다. 만일 그대가 그 조건화된 사람에 협조하지 않는다면 그는 가야만 한다. 그는 그대의 협조를 통해서 살아간다. 그는 오직 그대의ㅣ 협력 속에서만 살 수 있다. 그대는 그것에 영양분을 주고 음식을 공급해 준다. 영양분을 주는 것을 멈춰라. 그가 기아로 죽게 나둬라! -------------------------------------- Show me your smile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