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Enlight (D.S.) 날 짜 (Date): 2002년 1월 9일 수요일 오전 07시 01분 50초 제 목(Title): 달의 집에서 [마지막] 본래인(本來人)은 필시 본래의 장소로 돌아간다 그런데 왜 우리는 헛되이 부처를 구하는가? 아름다운 성명이다. 이뀨는 말한다. "붓다에 대해 개의치 말아라. 붓다를 구하지 말하라. 본래인을 찾아라. 그러면 붓다를 발견하리라! 붓다를 구하게 되면 결코 본래인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분명 토마스 켐피스(Tomas Kempis)의 유명한 책 <그리스도의 모방>에 대해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선객은 그런 제목을 생각도 할 수 없다. '붓다의 모방',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켐피스의 책은 너무나 유명해서 거의 그 자체로 성경 다음 가는 중한 위치에 있다. 그리스도의 모방? 만일 그대가 그리스도를 구한다면 모방꾼이 될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될수 밖에 없다. 그대는 그리스도처럼 혹은 붓다처럼 행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는 가장할 것이다. 어떤 인격을, 어떤 인물을 양성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서서히, 더욱더 비본연적이 될 것이다. 누구도 그리스도가 될 수없고 누구도 붓다가 될수없다. 그렇지만 누구나가 본래인이 될수 있다. 그대의 본질성은 그대 안에서 찾아야 한다. 그대는 내부로 들어가야만 한다. 그대 자신 안으로 깊숙이 파들어가야 한다. 그대의 원천은 거기에 있다. 그대는 밖을 볼 필요가 없다. 붓다는 아마 아주 아름다울 것이다. 그래서 어쨌다는 건다! 만일 모방한다면 그대는 추해진다. 모방은 죄다 추하기 때문이다. 붓다가 되고 싶다고 무엇을 할 텐가? 그대는 그처럼 걷고 그처럼 말하고 그가 먹듯이 음식을 먹을 테고 그가 움직이는 방식으로 움직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에 불과하다. 내면 깊숙이에서는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그대는 여전히 어리석은 사람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환상을 창조할 것이다. 다시 그대는 달의 집을 창조하고 마음의 주인이 될 것이다. 위대한 교사는 항상 모방을 반대해 왔다. 붓다가 되려고 애쓰지마라. 본래인이 되려고 애써라. 그것은 또한 붓다가 되는 길이다. 하지만 그대의 본래인을 되찾음으로써 붓다가 된다면 이는 새로운 불성의 표현이 될 것이다. 그것은 아무튼 예전 붓다의 될풀이가 아닐 것이다. 한 번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그것이 좋다. 한번 생각해 보라. 수많은 붓다들과 수많은 그리스도들과 수많은 크리슈나들이 사는 세상을. 그런 세상을 한번 생각해 보라. 그것은 살아갈 가치가 없는 세상일 것이다! 음?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를 마주친다. 우유배달부도 그리스도이고 우체부도 그리스도이다. 그대는 자살할 것이다. 그대는 그리스도들에게 지쳐 버릴 것이다! 신은 절대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한 명의 그리스도는 더할나위 없이 아름답다. 한명의 붓다는 아름답다. 그대가 그대의 본래의 성품에 이르게 되면 그것은 신의 새로운 표현이 될것이다. 새로운 현상, 새로운 광휘, 이전에 불려진 적이 없는 새로운 노래가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헛되이 부처를 구하는가? 아침 이슬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네 그 누가 이 세상 끝까지 살아 있으리? 다만 모든 것은 덧없이 사라진다는 것, 모든 것은 부단히 흐르고 있다는 것, 그 하나만 기억하라. 우리는 아침 이슬과 같다. 태양이 떠오르면 우리는 사라질 것이다. 그일이 일어나기 전에 한가지, 그대 내면의 가장 깊은 핵심을 자각하라. 이슬방울이 사라지기 전에 그대 내면 가장 깊은 핵심을 자각하라. 이슬방울이 사라지는 것 속에 결코 나지 않고 죽지 않는 어떤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 유동적인 세계 속에 절대 불변하는 것이다. 덧없을지라도 우리는 내일의 목숨을 기원한다 이것은 어제 자나가 버린 우리 마음의 습관. 그대는 내일을 위해 무엇을 기원하는가? 한 번이라도 그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그저 어제의 반복일 뿐이다. 아마도 조금 더 꾸며지고 조금 더 치장되고 조금 더 세련되고 조금 더 장식된 것일 테지만. 그러니 내일을 위해 무엇을 기원하고 있는가? 그대의 어제를 기원할 것이다. 그러면 어제는 어땠는가? 그대는 어제 진정으로 행복했는가? 상투적인 버릇으로 우리는 과거가 미래에도 또다시 반복되기를 기도하고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일체를 그만둬라! 과거가 그대 마음속에서 사라지도록 놔둬라. 그리고 다시는 그것을 기원하지 말아라. 거기에서 아무 기대도하지 말고 순간에 살아라. 그럴 때 커다란 축복이 있다. 기대없이 순간을 살때 무한한 축복이 일어난다. 하지만 성취하길 바라며, 어떤 기대를 기원할때는 오직 좌절이 있을뿐, 아무 것도 안 일어난다. 축복스러운 사람은 기대 없이 사는자. 단순하게 사는자, '일은 이렇게 돼야만 한다'고 기원하지 않는 자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건 완전히 깨어서 사는 법을 아는 자이다. 그는 삶 속에서도 깨어 있고 죽음 속에서도 깨어 있다. 행복 속에서도 깨어 있고 불해 속에서도 깨어 있다. 성공 속에서도 깨어 있고 실패 속에서도 깨어 있다. 그는 비밀 열쇠를 지니고 있다. 그 비밀 열쇠는 각성이다. 이제 그는 그외에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는 모든 상황을 축복으로 변형시키는 예술을 안다. 그 각성의 영광은 지옥조차 천국으로 변형시킨다. 상심하지 말라 진리의 길은 다만, 있는 그대로이다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닌. 이것은 이뀨의 마지막 경문이다. 상심하지 말라 진리의 길은 다만, 있는 그대로이다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닌. 그것은 궁극의 근원적인 성명이다. 그것은 말한다. 삶이 길이다. 삶 그대로. 그것을 바꾸려고 수고하지 말아라. 내세를 구하지 말아라. 낙원을 구하지 말아라. 삶은 있어야 할 그대로 있는 것이다. 그것을 놓친다면 그대가 깊이 잠들어 있다는 걸 보여 줄 뿐이다. 그게 전부다. 깨어 있어라. 모든 것은 있어야 할 그대로 이다. 그대는 성자가 될 필요가 없다. 그대는 오로지 깨어 있기만 하면 된다. 거기에 죄인도 없고 성자도 없다. 오직 잠들어 있는 사람과 깨어 있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사람들의 차이는 이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잠들어 있고 어떤 사람은 깨어 있다는 것. 그것이 붓다와 그대의 유일한 차이이다. 별로 많은 차이가 없다. 그대는 바로 한 사람의 붓다이다. 다만 아직 눈 뜨지 않았을 뿐이다. 그대는 아직도 달의 잡에서 살고 있다. 그대는 아직도 마음이 그대의 주인이도록 허락하고 있다. 그대는 각성을 위해 탐구하지 않았다. 그대는 깨어 있으려고 스스로를 흔들지 않았다. 그대가 바보거나 죄인이라고 근심하지 말아라. 어리석음과 지혜, 환영과 깨달음, 구원과 저주, 그 근본은 하나이다. 실체에는 오직 하나의 셰만 있다. 아무리 우리가 그것으 과학적인 것과 시적인 것,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 이것과 저것으로 나눈다 해도 말이다. 이 구별들은 모두 마음의 일이다. 세계는 하나이다. 그것이 선하든 악하든, 지옥이든 천국이든 셰계는 하나이다. 이것이 존재하는 유일한 세계이다. 필요한 일체는 이 세계를 자각하는 것, 햇빛을 자각하는 것, 나무의 푸름을 자각하는 것, 새들과 차들의 소음을 자각하는 것, 그대 주변의 사람들을 자각하는 것, 그대 자신을 자각하는 것이다. 각성은 열쇠가 되는 낱말이다. '붓다'라는 말은 곧 깨어 있는 사람, 깨어난 사람이란 뜻이다. 그 차이를 보라. 다른 종꾜는 그대에게 "착한 사람이 돼라. 도덕적이 돼라. 성자가 돼라."고 말한다. 다른 종교들은 그대를 죄인으로 비난한다. 본연의 그대를 무가치한 존재로 비난한다. 불교는 비난하지 않는다. 불교에는 원죄라는 개념이 없다. 불교는 그대에게 성자가 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대가 뭘 하겠는가? 성자가 되고 싶다 해서 그대가 뭘 하 수 있겠는가? 이른바 죄라는 것들을 억압할 것이다. 그러나 억압된 것들은 그대의 무의식 속에 쌓일 것이다. 그들은 그대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안에서 들 끓을 것이다. 그것들은 그대를 미치게하고, 타락으로 몰고갈 것이다. 어찌 그대가 성자가 될 수 있겠는가? 그대가 뭘 할 수 있겠는가? 그대가 화가 났다 하자. 성자가 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화를 억누른다! 성욕이 일어난다 하자. 어떻게 하겠는가? 성욕을 억누른다. 하지만 성욕은 그대로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억압된 상태로 그대의 뿌리로 더 깊숙이 들어가, 그대 일생의 독소가 될 것이다. 그것은 타락의 방식으로 발산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은 뒷문으로 들어와 그대를 지배하기 시작할 것이다. 억압한다고 해서 그대 인생이 변형되지는 않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죄에 대한 개념이 없고 성인에 대한 개념이 없다. 불교는 말한다. "단순히 해야 할 게 한가지 있다. 사람들은 줄곧 잘못을 행하는데,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잠들어 있어서 이다."차이점을 보라. 어떻게 잠들어 있는 사람에게 바른 일을 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몽유병 환자 같다. 잠자면서 걸어가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그런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열명 중에 거의 한명은, 10퍼센트의 사람들이 잠속에서도 걸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만일 여기에 천명의 사람들이 있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잠 속에서도 걸을 수 있다. 하지만 잠 속에서 걸을 때는 자연히 뭔가에 걸려 넘어질 수 있다. 어쩌면 벽에다 머리를 부딪힐지도 모르는데 그를 죄인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를 영원한 지옥에 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잔혹해 보인다. 할 수 있는 건 그를 깨우는 일이다! 그러면 그 깨어 있음이 모든 것을 변화시킬 것이다. 불교는 말한다. "거기 유일한 죄가 있는데-만일 그것을 죄라고 부르고 싶다면-그것은 잠, 즉 무자각이다. 그리고 거기 유일한 미덕이 있는데-그것을 덕이라고 부르고 싶다면-그것은 각성, 즉 깨어 있음이다." 불교는 대단히 과학적인 종교이고 철두철미하게 심리학적인 종교이다. 지금껏 있어 왔던 가장 위대한 심리학적 통찰이다. -------------------------------------- Show me your smile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