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Enlight (D.S.) 날 짜 (Date): 2002년 1월 9일 수요일 오전 06시 58분 50초 제 목(Title): 달의 집에서 5 달은 집 마음은 그 집의 주인이라 할 때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덧없는 세상 그대가 이해하지 못하면 꿈들은 실재가 된다. 이해한다면, 그대가 실재라고 부른 것은 그 자체가 꿈이다. 경문의 핵심을 보라. 그것은 가장 의미심장한 경문 중의 하나이다. 만일 이해하지 못하면 심지어는 꿈마저도 실재인 것처럼 보인다. 이해한다면, 자각하게 된다면, 민감해지고 사물을 꿰뚫어 본다면 그대가 항상 실재라고 생각해 왔던 것들도 이제는 실재가 아니다. 그땐 일체가 하나의 꿈이다. 붓다가 말하는 "세상은 하나의 꿈이다."는 그 의미이다. 그는 세상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는 거을 기억하라. 그는 세상을 거부하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어찌 꿈을 거부할 수 있는가? 그는 그것에서 도망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꿈에서 도망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는 다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라."고 말할 뿐이다. 또한 기억하라. 많은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 "만일 세상이 꿈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그것이 꿈임을 안다면 그것이 멈춰질까요?" 세상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집단적인 꿈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것들을 이해함으로써 그대 개인의 꿈을 멈출수 있다. 그러나 집단적인 꿈들은 멈출 수 없다. 그것들은 그대에게만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집합적인 마음에 달려 있다. 그것은 마치 극장에 앉아서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 영화는 꿈이다. 그대는 그것을 안다. 화면에는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이따금 그대는 그것을 잊고 몹시 흥분한다. 그대는 아주 동일시되어서 영화를 실재로 여기기 시작한다. 그런다음 그대는 기억한다. 그러면 다시 의자 안에 몸을 풀고 이것은 한낱 장난이라는 걸, 화면에서 움직이는 그림자에 불과할 뿐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거기 아무 것도 없고 다만 꿈일 뿐이라는 사실은 그대가 안다해도 영화는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영사기는 연신 돌아갈 것이다. 그것은 그대 한 사람에게만 달려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한가지는 바뀔 것이다. 그대는 휴식할 것이다. 그대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동요되지 않을 것이다. 이야기는 지속될 테지만 그대는 떨어져 나와 있을 것이다. 그대와 이야기 사이에 거리가 생길 것이다. 그대는 영화속의 인물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그 안의 어떤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붓다는 말한다. "이해함으로써 그대가 이제껏 실재라고 생각해왔던 것이 비실재가 된다." '비실재'한다는 것은 그것이 사라진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지속될 것이다. 가령 그대는 이 사람이 그대의 아내, 그대의 자식, 그대의 남편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이해력이 생기고 더욱 명상적이 된다 해도 그대의 명상으로 여자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여자는 거기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꿈, '이 여자는 내 아내다' 라고 하는 동일시, 그 소유 관념은 사라질 것이다. 그 여자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실제로는 그 이상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여자를 소유하는 순간 그녀는 물건이 된다. 소유는 추하다. 그것은 폭력이다. 소유는 잔인하다. 소유할 때면 항상 그를 모욕하는 것이다. 어떻게 사람을 소유할 수 있는가? 여자는 거기에 있을 테지만 더 이상 아내이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더 이상 남편이지 않을 것이다. 자식이 거기에 있을 테지만 그는 그대를 통해 태어났을 뿐 그대에게 속하지 않는다. 그대는 그에게 권리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장래의 그대 야심을 위해 자식을 이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자식을 타고 진출하지 않을 것이다. 자식을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의 욕망에 따라 자식을 주조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누구인가? 모든 것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전적으로 다른 빛이...... 나, 그대, 소유함, 소유권, 이러한 것들은 사라질 것이다. 한번 생각해 보라. 거기 소유함이 없고 내가 없고 그대가 없다면 그대 안에 참으로 깊은 고요가 내려 앉을 것이다! 참으로 그윽한 평화가 압도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덧없는 세상. 그때 이 일체의 세상은 그저 일시적인 세상이다. 우리는 여기에 잠시 있다가 사라진다. 왜 그것을 그토록 걱정하는가? 그것이 그토록 무상한 세상이라면 왜 그토록 그것을 염려하는가? 누군가 그대를 모욕했다 하자. 거기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며칠내로 그대와 그에 대한 아무 얘기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먼지는 먼지로 돌아가 사라진다. 그대 이전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땅에 살아왔는가? 그들도 그대처럼 번민했었다. 누구는 그들을 욕했고 누구는 그들에게 불쾌한 말을 했으며, 혹은 그들이 거리를 지나갈 때 어떤 사람들은 빈정거리고 비웃고 조롱했다. 그래서 그들은 아파했고, 상처 받았다......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 친구들과 그 적들에게 무슨일이 일어났는가? 그들은 여기 있던 동안에 얼마나 많은 소란을 피우며 번민했던가! 붓다는 간단히 말한다. "그대가 이해한다면 많은 소란을 피우지 않을 것이다." 그게 전부다. 그대는 별 소란을 피우지 않으며 세상을 통과해 나갈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포기이다. 그것이 산야스(수행자)이다. 별 소란을 피우지 않고 지나치게 실각해 하지 않으면서 거기에 너무 의미를 두지 않고 세상을 통과해 나가는 것. 그것은 하찮은 것이다. 어느 바보가 지껄인 격분과 소음으로 가득 찬 대수롭지 않은 소설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말아라... 깊이 생각해 보면 남과 나 사이에 구별이 없다. 이 마음 이외에 다른 마음이 없기에. 그것을 깊이 생각하고 자각하고 명상하라. 모든 관계와 모든 뒤얽힘과 모든 인생의 복잡성을. 깊이 생각해 보면 남과 나 사이에 구별이 없다 이 마음 이외에 다른 마음은 없기에. 우리는 다만 같은 대양 안에 있는 파도들이다. 남과 나 사이에 구별이 없다. 이 마음 이외에 다른 마음이 없기에. 거기엔 오직 하나의 마음, 환영(幻影)의 마음만이 있다. 나의 환영이 사라지고 그대의 환영이 사라졌을 때 무엇이 있어 우리를 분리시키고 구별 짓겠는가? 우리의 환영들이 우리의 경계들이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들에 매달린다. 그것들은 그대에 대한 정의(定義)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말한다. "나는 아름답고 당신은 추하다." 그는 한정짓고 있다. 어떤 사람이 말한다. "나는 아주 지성적인데 당산은 별로 지성적이지 않다." 그는 한정 짓고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나는 아주 강한데 당신은 약하다." 그는 한정 짓고 있다. 우리가 내리는 정의는 우리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그대가 모든 환상들을 버린다면 어떻게 자신을 한정 지을 수 있겠는가? 그때 무슨 경계들이 있겠는가? "나는 흰두교인이고 당신은 기독교인이다. 나는 여자고 당신은 남자이다. 나는 흑인이고 당신은 백인이다. 나는 학식이 있고 당신은 학식이 없다. 나는 이것이고 당신은 저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라고 느끼기 위해 한정 지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우리가 내리는 모든 정의는 한낱 환영일 뿐이다. 남과 나 사이에 구별이 없다 이 마음 이외에 다른 마음이 없기에. 이 꿈꾸는 마음, 이 루나틱 마음, 과거나 미래를 생각하며 결코 지금 여기에 이르지 못하는 이 마음, 이것이 유일한 마음이다. 이것이 제거되고 나면 무엇이 다른가? 흑인과 백인 사이에 부슨 차이가 있는가? 기독교인과 흰두교인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일단 마음이 제거되고 나면 일체 구별이 사라진다. 이것이 실체이다. 이것이 하나이다. -------------------------------------- Show me your smile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