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Enlight (D.S.) 날 짜 (Date): 2002년 1월 9일 수요일 오전 06시 57분 06초 제 목(Title): 달의 집에서 4 한 제자가 그의 스승 이뀨를 보러 왔다. 제자는 이따금 수련을 해왔었다. 비가 오고 있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면서 신발과 우산을 바깥에 놔두었다. 그가 스승에게 예를 표하자, 스승은 신발의 어느쪽에 우산을 두었는지 물었다. 자, 무슨 질문이 이런가? 그대는 스승이 그런 터무니없는 질문을 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대는 스승이 신에 대해서나 쿤달리니가 일어나고 차크라가 열리고 머리에서 빛이 발생하는 것 따위를 묻기를 기대한다. 그대는 그렇게 거창한 것, 초자연적이고 밀교적인 것을 묻는다. 하지만 이뀨는 아주 평범한 질문을 한다. 기독교 성자들은 그런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다. 자이나 승려들이나 흰두교 스와미들은 그렇게 묻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질문은 오로지 진정으로 붓다와 함께 있는 자, 붓다 안에 있는자, 진정으로 붓다인 자에게서만 나올 수 있다. 그 스승은 신발의 어느쪽에 우산을 두었는지 묻는다. 지금 신발이나 우산이 영성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만일 그대에게도 같은 질문을 한다면 그대는 짜증을 낼 것이다. 그대는 이 사람이 도대체 스승이 아니라고 느낄 것이다. 이게 무슨 질문이란 말인가? 그 속에 무슨 철학이 있을 수 있는가? 하지만 그 속에는 무진장한 가치가 담겨 있다. 만일 그가 신에 대해, 큰달리나나 차크라들에 대해 물었더라면 그것은 난센스이고 전혀 쓸모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의미가 있다. 제자는 기억 할 수 없었다. 누가 신발 둔 곳이나 우산 둔 곳을, 오른쪽인가 왼쪽인가 신경쓰겠는가? 누가 신경쓰는가? 누가 주의 깊에 신발이나 우산에 주의를 기울이는가?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 제자는 거절 당했다. 이뀨는 말했다. "가서 7년 간 더 명상하라." "7년이나?" 제자가 말했다. "겨우 이 작은 허물 때문에 말입니까?" 이뀨가 말했다. "이것은 작은 허물이 아니다. 허물은 작거나 큰것이 아니다. 너는 아직 명상적으로 살고 있지 않다. 그게 다다. 돌아가라. 7년 간 더 명상하고 다시 오라." 이것이 불교 가르침의 정수이다. "정성을 기울여라. 모든 것을 지극하게 하라. 사물들 사이에 이것은 하찮고 저것은 아주 영적인 것이라고 차별을 짓지 말아라.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주의를 기울이고 지극하게 하면 모든 것이 영적이 된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거나 지극하게 하지 않으면 일체가 비영적이 된다." 영성은 그대에 의해 부여된다. 그것은 세상에 전하는 그대의 선물이다. 이뀨와 같은 스승이 우산을 만지면 우산도 다른 모든 것처럼 신성하다. 그리고 그대가 신을 만진다면 신까지도 한찮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만지는 데 따라 다르다. 명상적인 에너지는 연금술적이다. 그것은 저금한 쇠붙이를 금으로 변형시킨다. 명상적이 될수록 그대는 더욱 도처에서 신을 본다. 그 최정점에서는 일체가 신성하다. 바로 이 세계가 낙원이고 바로 이 몸이 붓다이다. 경전. 달은 집 마음은 그 집의 주인이라 할 때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덧없는 세상 우리의 진정한 집은 마음에 있지 않다. 마음은 단지 하나의 여인숙이다. 하룻밤 머물기에 좋은. 하지만 기억하라. 아침이면 우리는 떠나야 한다는 것을. 마음은 진정한 그대의 집이 아니다. 마음은 오로지 꿈들을 창조할 뿐이다. 어찌 꿈들이 그대의 진정한 집일 수 있는가? 마음은 욕망들을 창조한다. 어찌 욕망들 속에서 그대가 살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사람들이 하는 일이고, 사람들이 고통받는 이유이다. 그들은 욕망 속에서 살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조재하지 않는 것 속에서 살려고 노력한다. 욕망이란 그 뜻이다. 그들은 미래에 살려고 노력한다. 어찌 미래에 살 수 있겠는가? 삶은 오직 현재에만 가능하다. 그런데 마음은 도무지 현재에 있지 못하다. 그것은 과거나 혹은 미래 둘 중 하나 속에 있다. 그서은 항상 존재하지 않는 것 속에 있다. 그것은 오직 비존재와 함께 있다. 존재가 있으면 그것은 사라진다. 우리는 우리의 집을 마음속에 지어 왔다. 그대 마음을 지켜 보면 요점을 알 것이다. 그대는 없는 과거를 회상하며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거나, 오지 않은 미래를 계획하며 또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 여기에 살아라! 지금 살아라! 지금이 집이다! 하지만 마음은 그대가 현재에 사는 걸 허용하지 않는다. 만일 그대가 지금 여기에 있다면 마음은 사라진다. 마일 그대가 마음 안에 있다면 그대에게 지금 여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달은 집..... 달은 꿈의 환각의 한 상징이다. 그 때문에 광인들을 루나틱(lunatic)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들은 달 속에서 산다. 그들은 달을 통해 산다. 달은 그대의 꿈꾸는 기능이다. 달은 그대를 황홀하게 한다. 그것은 비실재이다. 상상이다. 달은 집 마음은 그 집의 주인이라 할때... 달, 그대의 꿈꾸는 기능은 집을 창조한다. 그 집은 허구이다. 그때는 당연히 마음이 주인이 된다. 마음은 오로지 허구 속에서만 주인이 될 수 있다. 거짓 속에서 마음은 아주 편안하다. 진리 속에서는 꼼짝도 못한다. 하여 명상이 깊어질수록 그대 안에 공포가 일어나는 것이다. 내게 가까이 올수록 마음은 더욱 말한다. "여기서 도망가라." 내게 가까이 오면 올수록 더욱 공포가 올라온다. 그대는 그것을 측정할 수 있다. 만일 내가 굉장히 두려워진다면 내게 더욱 가까워지고 있다고 봐도 좋다. 그대는 분명 더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명상이 두려워진다면 마음이 지금 위태로움을 걱정하고 있다는 표시이다. 한 걸음만 더 가면 그대는 돌아오기에 너무 늦을 돌아올수 없는 지점에 도착할지도 모른다. 마음은 환각 상태에서는 더 할 나위 없이 편안해 한다. 그래서 온갖 꿈들을 창조한다. 밤에만 그러는게 아니다. 기억하라. 심지어는 낮에도 그런다는 것을. 그대가 완전히 깨어 있을 때... 최소한 완전히 깨어 있다고 생각 할 때 - 사실은 그럴 수 없다. 완전히 깨어 있는 사람은 붓다가 되기 때문이다. 그대가 각성 속에서 잠잘 때 지켜보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완전한 깨어 있음'이란 뜻이다. 그저 눈을 감고 내면을 바라보다. 다만 꿈들이 흐르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은 별과 같다. 낮에 볼수 없다고 별들이 사라졌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그들은 거기에 있다. 밤에는 그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낮는 햇빛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꿈꾸는 기능도 정확히 같은 경우다. 밤에는 그들이 아주 선명하다. 낮에는 다른 수많은 것들로 채워져 있어서 배경으로 밀렸났지만 그들은 거기에 있다. 낮에 아무 때라도 눈을 감아봐라. 길 한복판에 서서 눈을 감아보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그 꿈들이 거기에 있다. 어떤 꿈은 계속 흐르고 있다. 그것은 그대가 협조하지 않아도 지속된다. 달은 집 마음은 그 집의 주인이라 할때.... 그리고 마음은 꿈이 있을 때만 주인으로 머물 수 있다. 그래서 마음은 항상 새로운 환상을 일으키는 약물이나 환각 상태를 찾아왔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인이나 젊은이들하고 관계있는게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오래된 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그것은 리그베다의 시대에도 존재했다. 그것은 소마라고 불렀다. 오늘날의 LSD이다.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은 약물을 갈구해 왔다. 약물은 그대의 꿈꾸는 기능을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그대의 꿈을 더욱 현란하고 초현실적이며 더욱 실재적이고 입체적으로 만들어 준다. 그것들은 그대가 원하는 어떤 것이라도 제공할 수 있다. 만일 그대가 사마디(삼매)를 원한다면 마리화나는 사마디를 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마디는 고작 꿈일 뿐이다. 그것은 그대를 변형시키지 못한다. 그대 존재에게 확실한 변형을 가져다 주진 못한다. 그대는 동일한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전보다 더 밑으로 추락할지도 모른다. 그대는 퇴보할 수도 있다. -------------------------------------- Show me your smile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