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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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Enlight (D.S.)
날 짜 (Date): 2002년 1월  9일 수요일 오전 06시 55분 47초
제 목(Title): 달의 집에서 3


  불성이란 잠 속에서도 깨어 있음이 지속될 만큼 아주 민감한 상태를
      의마한다.  심지어는 죽을때도 깨어서 죽는다. 이제는 민감함을
      읽어버릴 길이 없다. 그것은 그대의 본성이 되었다.

         이것이 붓다의 메시지의 진수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않는 한 그대는
      이뀨(一休)선사의 모든 경문을 놓칠 것이다. 그 경문에는 여러 주석들이
      있는데, 특히 서양의 주석자들은 핵심을 놓치고 잇다. 그들은 그 경문이
      말하는 것이 하나의 철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고의 주석자는
      블리스(R.H. Blyth)인데 그 마저도 놓치고 있는 것은, 그 역시 내면의
      타당성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는 이 경문들이
      염세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붓다와 염세주의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 경문들이 염세적으로 보이는 것은 그것들이 그대의
      이른바 낙관주의를 거스리기 때문이다.

         붓다는 그대에게 아무 희망도 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메세지는
      무기력하지 않다. 그는 희망을 제거함과 동시에 무력감 또한 제거한다.
      그대가 내면의 타당성을 지니지 않는한 그것은 대단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는 모든 낙관성을 파괴한다. 하지만 그는 염세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라. 낙관주의가 없는데 어찌 염세주의가 있겠는가?  그들은
      공존한다. 삶에 대한 그의 비전은 침울하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침울하게 보인다.

         심지어 이뀨 경전에 대해 가장 통찰력 있는 서양 주석자인 블리스
      마저도 계속 요지를 놓치고 있다. 그는 계속 붓다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계속 이뀨의 이상한 점을 말하고 있다.

         만일 그대가 주의하려고 애쓰지 않고 이 경문 자체를 바라본다면
      전체의 요지를 놓칠 것이다. 이 경문들은 그대를 주의 깊게 만들기우한
      하나의 장치이다.

            붓다는 우리가 어떻게 주의해야 하는지 단지 예만 보여 줄
      뿐이다. 그는 물이 언저리까지 가득 찬 항아리를 이고 균형을
      이루며,  사람들도 매우 혼잡한 시장 속을 걸어가라고 명령받은 사람에
      관해 말하였다. 그 뒤에는 긴칼을 든 병사가 따라가고 있다. 만일 한
      방울의 물이라도 흘린다면 병사가 목을 칠 것이다. 그 사람은 분명
      조금도 방심함이 업이 항아리를 이고 걸어 갔다. 하지만 편안한 상태로
      주시해야만 한다. 만일 지나치게 힘을 주거나 긴장하면 아주 조금만
      부딪쳐도 물을 떨어뜨리게 될 것이다. 항아리를 인 그 사람은 기운을
      빼고 리듬이 있어야 한다. 환경의 변화와 함께 흘러가되 매 순간 아주
      주의 깊게 있어야 한다.
        이완된 민감성, 이것은 각성을 향상시키는 데 있어 유의해야 할
      사항이다.
         이 두 낱말은 정반대처럼 보인다. 그들은 정반대이다. 왜냐하면
      이완되면 민감함을 잃어버리고 민감하면 이완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양자가 함께 일어나지 않는 한 그대는 계속 붓다의 메세지를 놓칠
      것이다. 그것은 아주 기묘한 메시지이다. 그것은 그대가 이 양극을 함께
      데려오길 원한다. 그것은 인간 의식의 가장 높은 합일점이다. 한 극은
      이완함이고 나머지 극은 민감함, 주의 깊음이다.
         만일 내내 주의만 기울이고 있다면 조만간에 지칠 것이다. 그대는
      24시간 내내 주의 깊게 있을 수 없다. 그대는 휴식이 필요할 것이다. 그
      주의 깊음을 벗어나기 위해 알코올이나 약물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서양에서 일어난 상황이다. 사람들은 더 주의 깊게 되었다.
      주의 깊음을 가꾸었다. 대부분 교육의 메커니즘이 억지로 더욱 주의
      깊게 만들었다. 보다 주의 깊은 사람은 성공했고, 덜 주의 깊은 사람은
      실패했다. 세상은 대단히 경쟁적이다. 성공하고자 한다면 매우 주의
      깊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면 피곤해 진다. 긴장으로 머리가 무거워진다.
      그것은 그대를 신경증으로 몰고 같다. 그 부산물로써 광기가 발생함은
      아주 당연한 것이다.
          동양보다 서양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신경증적인 상태로 돼가고
      있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서양에서는 오랜 세월동안 주의 깊음이
      훈련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많은 대가를 치렀다. 테크놀로지,
      과학의 발달, 부의 창출, 이 모든 것들이 주의 깊음을 통해서 왔다.
      동양에서는 사람들이 이완된 상태에 있어 왔다. 하지만 주의 깊음이
      없이 이완만 된다면 무기력해지고 수동적이 되고 일종의 우둔함이 된다.
      그래서 동양은 여전히 가난하고 비과학적이고 반기술적이고 기아로
      허덕이고 있는 것이다.
         붓다의 메세지가 바르게 이해된다면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 일어날
      것이다. 붓다 안에서 양자는 만날수 있다. 그의 메시지는 이완된 주의
      깊음이다. 그대는 아주 아주 이완되어야 하며 동시에 깨어 있어야 한다.
      거기엔 아무 문제가 없다. 그것은 가능하다.
         내면의 타당성에서 말하건대, 그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오직 이
      가능성만이 그대를 전체적인 인간으로, 성스러운 인간으로 만들 것이다.
      안 그러면 그대는 반쪽으로 머물 것이다. 반쪽의 인간은 항상 불행하다.
      이런 식으로든 저런 식으로든. 서양은 영적으로 불행하고 동양은
      물질적으로 불행하다. 인간에겐 둘 다 필요하다. 인간은 내면과 외면
      양쪽의 풍요가 필요하다.
         붓다와 함께 새로운 시대가 동틀 수 있다. 비법은 간단하다. 이완된
      각성을 배우는 것. 그대가 주의 깊게 디려고 노력할 때, 동시에 몸은
      긴장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라. 몸은 휴식하고 이완되고
      일종의 내맡김 속에 있어야 한다.
         나는 아난다가 머리를 베개에 대는 순간 깨닫게 댔다는 그 내용을
      좋아한다. 깨닫는 데 그 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다. 그것을 명심하다.
         붓다는 명상의 대상을 주지 않았다. 그대더러 신에 대해 명상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마트라에 대해 명상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어떤
      상에 대해 명상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생할의 사소한 일들을
      이완된 각성으로 하라고 말했다. 음식을 먹을 때 전적으로 먹어라.
      전적으로 십고 전적으로 맛보고 전적으로 냄새 맡아라. 빵을 만지고
      질감을 느껴라. 빵의 냄새를 맡아라. 향취를 맡아라. 그것을 씹어라.
      그것이 그대 안에 흡수되도록 놔두면서 의식 속에 머물러라. 그대는
      명상하는 것이다. 그러면 명상은 생활과 떨어져 있지 않게 된다.
         명상이 생활과 분리되어 있을 때는 항상 뭔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부정적인 생활이 된다. 그때 사람은 수도원이나 히말라야의 동굴에 갈
      생각을 한다. 생활로부터 도망가고 싶어한다. 생활이 명상에 장애가
      되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생활은 장애물이 아니다. 생활은 명상을 위한 계기이다.
         걸으면서 숨이 들어오고 숨이 나가는 것을 주의깊게
      지켜보다.  그대는 한쪽 다리를 앞에 내딛는다. 지켜보다. 그것을
      안으로부터 느껴라. 그대의 발이 땅에 닿는다. 땅에 닿는 감촉을
      느껴라. 그리고 새들은 노래하고 태양은 빛나고 있다.... 인간은
      다처원적으로 감각적이어야 한다. 이것은 그대의 지성이 성장하는 걸
      도와줄 것이다. 이것은 그댁를 더욱 밝고 총명하고 생기에 넘치게
      만들것이다. 종교는 그대가 더욱 생기에 넘치도록, 더욱 감각적이도록
      만들어야 한다. 생명은 신이고, 그외에 다른 신은 없기 때문이다.
         붓다는 토스카니니(Toscanini)에 동의 했을 것이다..... 
         토스카니니의 80회 생일날, 누군가 토스카니니의 아들에게 그의
      아버지가 무엇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성취로 치는지 물었다. 아들이
      대답했다. "그분에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 순간에 일어난 일이
      그의 생애에 있어 가장 큰 일입니다. 그가 심포니를 지휘하고 있든
      오렌지 껍질을 벗기고 있든 말입니다."
         마치 심포니를 지휘하듯이 오렌지 껍질을 벗긴다면 그대는 점점 더
      붓다에게 가까워질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그림을 그리듯이, 그
      주의 깊음과 배려와 사랑과 전체성을 가지고서 오렌지 껍질을 벗긴다면
      말이다. 오렌지 껍질을 벗기면서 다차원적으로 자각하라. 거기서
      풍겨나오는 냄새를 맡고 느끼고 만지고 맛보아라. 그러면 작은
      오렌지가, 하나의 보통 오렌지가 탈바꿈된다. 그대가 가져다 준 의식의
      특성으로 탈바꿈된다.
         이런 식으로 삶을 살수 있다면 종교는 생활을 부정하지 않는다.
      긍정한다. 그것은 그대를 생활로부터 떼어 놓지 않는다. 그대를 그
      안으로 데려간다. 그것의 가장 깊은 핵심으로 데려간다.  그대를 그
      것의 신비 속으로 데려간다.
         그것은 또한 나의 접근 방식이다. 절에 가서만 해야 하는 기도라든가
      히말라야의 동굴에서만 할 수 있는 명상 따위의, 생활에서 동떨어진
      것을 고수해야 하는 종교는 별 가치가 없다. 그대는 24시간 내내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히말라야의 동굴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음식을 빌러 가야 할 것이고 겨울이 오면 쓸 나무를 모아야 할
      것이며 비를 피해야 할 것이고 밤에는 야수가 있을지 모르니 뭔가
      궁리를 해야 할 것이다.  동굴에 있는 사람조차 수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다.  그대는 그냥 24시간 내내 명상만 하고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실행 불가능하다.
         하지만 붓다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는 말한다. "명상을
      생활에서 분리시키지 말아라. 그것들이 공존하도록 나둬라. 생활의 모든
      기회를 명상으로 돌려다. 완전히 깨어서, 민감하게, 주의 깊게 지켜
      보고 관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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