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6년01월27일(토) 15시27분59초 KST 제 목(Title): [답] 참선의 상기 증세 좌선을 하다보면 많이 발생하는 것이 위의 분이 말한 상기증세입니다. 그것은 좌선을 하는데 있어서 목적성이 강하기 때문에 발생을 하는 것입니다. 상기증세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삶속에서도 복잡한 문제에 걸리거나 아니면 무엇인가에 정신적인 압박을 받으면서 살때에 발생하는 두통 증세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리에 앉아 있을 때에 호흡은 어떻게 해야 하고 호흡을 바라보는 것은 어때야 한다는 말을 듣고 그 말대로 할려고 집중을 하다보면 호흡을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목적성을 가지고 하는 것이 되어서 앉아 있을 때에는 졸음이 오게 되고 좌선이나 수식을 끝내고 나면 집중적인 강박에서 풀려나기 때문에 오히려 정신이 맑아진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좌선 혹은 마음을 응시하는 기본적인 인식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을 고정시켜놓고서 그것을 찾아 보겠다고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선은 앉아있는 자세나 호흡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생명가치를 어디에다 두고서 하느냐에 따라서 좌선 아니라 무엇을 하더라도 상기증세가 발생하기도 하고 안하기도 합니다. 스스로의 생명가치를 무한하고 대우주적인 절대적인 최대가치에 두고 있을 때는 호흡을 하더라도 호흡에 집중을 해야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러할 때에 마음이 쉬게 되고 마음이 쉬는 상태에서 호흡을 보면 자연히 호흡을 이해하게 됩니다. 만일 나의 생명의 실상을 모르고 있는데 모르는 내가 실상을 알아보겠다고 명상법을 택하면 그 명상법은 필히 육체와 정신의 학대증상을 가져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명상이라는 수행틀을 소유하기 전에 자신의 생명가치를 무한과 절대적인 대우주생명에 기반하는 가치로 중심을 두는 것이 선결되어야 합니다. 좌선에 대한 좋은 예가 마조스님의 일화입니다. 마조 스님은 한번 자리에 앉으면 일어설 줄 모르기에 절구통 스님이란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어느날 마조스님의 스승이 마조스님이 좌선하는 모습을 보니 영 그렇게 해서는 않될 것 같아서 마조 스님이 좌선하고 있는 앞에서 기왓장을 박박 거리면서 돌에 갈고 있었습니다. 좌선을 하던 마조스님은 그 소리가 시끄러워서 도저히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승에게 "왜 이렇게 시끄럽게 하십니까? 좌선하는 게 보이시지 않으십니까? 지금 무엇을 하시는 중입니까?" 스승이 말하기를 "보면 모르냐? 기왓장을 갈고 있지 않느냐?" 마조스님이 묻기를 "기왓장을 갈아서 무엇을 하게요?" 스승이 답하기를 "바늘을 만들려고 한다." 마조스님이 다시 묻기를 "아니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립니까? 기왓장을 갈아서 어떻게 바늘을 만듭니까?" 그러자 스승이 답하기를 "그럼 이놈아 기왓장을 갈아서 바늘을 만들 수 없는 것은 알면서 앉아 있다고 부처가 될 수 없는 것은 어째서 모르느냐?" 그러자 마조스님이 정신이 번쩍 듭니다. 그래서 다시 묻기를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스승이 답하기를 "수레가 움직이지 않을 때에 소를 때려야 하느냐 아니면 수레를 때려야 하느냐?" 마조스님이 말하기를 "소를 때려야 합니다" 그러자 스승이 말하기를 "마음공부도 그와 같아서 공부가 안되면 육신을 움직이는 주인공을 때려야지 수레와 같은 육신을 때린다고 될 일이 아니니라" 이것은 좌선을 하는 사람들이 요긴하게 마음속에 가지고 있어야 할 법문입니다. 마음들이 급하고 무엇인가 결과가 눈앞에 보이기를 바라면 언제나 하는 일이 수레에다가 째찍질을 하는 어리섞음을 반복하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