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roce (크로체)
날 짜 (Date): 2001년 4월  4일 수요일 오전 11시 30분 56초
제 목(Title): 수행중 경계에 관한 글


우곡선원에 있는 글을 퍼왔습니다.
joh님께서 명상중에 보이는 장면들이 무엇이냐 하셨는데, 이 글을 읽어보시면
알게 되실 것입니다.


---

禪 수행과 제 경계

參 禪 수행의 본질은 人生을 가장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기술한 제 경계는 전대미문의 체험에 입각하여 최상의 法을 설파하는 
牛谷禪院 수행 경책문입니다. 이제 심오한 경계를 밝힘은 이 시대 대다수 정신 
수행인들이 幻의 일부분에 불과한 습인의 화현을 깨달음으로 인식하는 오류를 
바로잡고 미래 學人들이 外道 길에서 헤매는 것을 방지케 하는데 그 뜻이 
있습니다.

1. 參 禪과 21세기

21세기 들어 參 禪은 다양한 종교의 벽을 초월하여 세인들의 주 관심사로 
등극하고 있습니다. 禪이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삶은 지식과 부, 
명예와 권력으로는 욕구를 다 충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올바로 인식한 현실귀의 
현상입니다.

禪은 敎法과 함께 불교의 수행방법론에 속합니다. 여래, 조사의 골수라 
일컬어질 禪法은 그 종적을 헤아리기가 간단치 않으나 선의 본성은 현대사에서 
唯一無二하게 깨달음을 제시해주는 지침서이자 제3의 종교라고 할 만합니다.

禪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고조되는 반면에 지금은 수행법의 오류가 너무도 
많습니다. 참 선 수행은 문자에 의존한 교리적 관행을 뛰어넘은 以心傳心이기에 
根器에 따라 뜻을 달리 헤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생에 사람으로 태어날 
보장을 받을 곳이 없는 것이 지금 우리 인생임을 살펴본다면 터무니없는 外道 
길에서 허우적거림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禪의 본질과 계합된 깨달음은 별 요상스런 능력자가 됨이 아닙니다. 수행으로 
業習이 녹아 나는 경계가 어떤 형태로 도래하였든 주어진 현실은 그의 시대적 
소명 그대로입니다. 

2. 聖人의 길

고요는 中道의 초석입니다. 衆生은 흔들리는 인식의 소유자이자 곧 凡夫입니다. 
聖人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가짐을 이룬 者이며 유유자적한 운명을 일구어낸 
개척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무위법계인 실상계에서 건너온 전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몸 
받기 전 실상계를 살 때 가지고 있던 因은 지금의 중생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탐심이 주류였습니다. 前生 집착의 잔재인 習因은 처절한 생존경쟁의 현장인 
윤회과정에서 습득된 인습이기에 무수한 絆緣의 끈을 가지고 있습니다.
絆緣의 인자들은 분별에 길들어져 있습니다. 고요는 분별의 무덤이기에 
반연들은 고고한 성인의 길 근처에만 다가 가려해도 극렬히 저항합니다. 좌선 
중일 때는 幻으로, 일상에서는 靜寂을 저해하는 악운으로 부단히 다가섭니다.

옛 부처도 오랜 고행 후 정각을 이루는 과정에서는 갖가지 저항과 유혹이 
난무하는 반연의 숲을 헤쳐 나갔습니다.
성인의 길에는 숙세 간 지은 業緣들이 별스런 모습으로 들고일어나 正道앞에서 
죽어 자빠져야 합니다.

3. 참 선 수행의 길

참 선 수행은 오매일여가 된 삶을 구축하기 위함입니다. 수행을 지어 가는 
방법에 있어서 看經, 염불, 기도, 주력 등에 집중하는 것도 한 방편이기는 
합니다. 그것 중에 좌선으로 자아를 參究한다는 것은 다사다난한 운명으로부터 
如如해 지기 위한 실천수행의 첩경입니다. 특정한 대상에 의존하지 않고 
호흡으로 육신을 통제한 고요로서 六識을 정화하는 좌선수행은 제 경계현상들이 
간단없이 드러나 보입니다.

제 현상들이 발동하는 양태는 根器에 따라 차등이 있습니다. 修增으로 반연을 
끊어내는 정진의 길도 있으며 일거에 경계를 무너뜨리는 대 폭발도 있습니다. 
또, 일생을 다 바쳐 수행에 몰두하여도 如如한 입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4. 체험의 實相

 1) 좌선과 육신의 포획

禪 수행은 일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맑고 고요한 마음이 되고자 함입니다. 그것 
중에 좌선과 호흡은 육신의 포획을 통하여 날뛰는 마음을 길들이고 평정을 
되찾고자 하는 기능적 방법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좌선과 호흡은 차츰 
닦아 나아가는 수행방법으로는 가장 무난합니다.

생명력의 원초인 호흡을 통하여 정신과 육신을 통제하는 좌선 수행은 부단한 
노력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대폭발로 인하여 일시에 운명의 프로그램이 바뀌는 
질곡보다는 證得으로 차츰 지어감이 대가없는 수행입니다.

대폭발의 경우는 목숨이 경각에 걸린 무의식 상태에서 유, 무위법계를 섭렵하는 
참담한 현장을 거쳐야 합니다. 이런 현상은 배우고 익혀 꾸준히 고요를 
추구함으로 말미암아 드러나 보일 수 있는 갖가지 薰習들이 일시에 한 무대에 
뛰어올라 시연하는 業緣의 결전장입니다.

 2) 습인의 창궐

좌선이든 아니면 타력에 의하여 육신이 통제된 고요 속에서 드러나는 제 형상은 
숙세 간에 축적된 薰習의 因子들입니다. 고요와 더불어 주변 타력에너지가 
난동하고 또, 환상처럼 와 닿는 갖가지 모습들은 과거 현재 생에 본인이 지은 
業識으로서 제 형상들은 대체로 처참하며 무서움을 유발하는 그림들로 채워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림의 종류는 다양한 형태로서 언뜻 스치기도 하며 반복하여 
지속적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낮은 근기일 때 실체처럼 인식되는 제 현상들은 대체로 무슨 부처, 보살 또는 
그가 평소에 求하거나 매달리는 특별한 모습으로 드러나 보입니다. 흔히 무슨 
영적 체험을 깨달음으로 인식하는 下根氣들에게는 습인의 환시에 불과한 제 
형상들이 절대자나 경배의 대상으로 각인 되어지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은 
靜으로 가는 항로에서 마주칠 수 있는 난관의 첫 관문입니다. 

선지자 인연이 없는 경우는 대부분 이 단계에서 드러나는 업식 종자와 타협하여 
새로운 종속관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그것은 드러나는 제 현상으로부터 무슨 
수기를 받은 것으로 인식하거나 아니면 음성이나 모습으로 인하여 자신이 
깨침의 길에 들어선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그 한 例로 현대판 얼치기 
覺者들의 잡설에서 보여주듯이 단식이나 기도 중에 무슨 모습이나 소리, 빛, 
또는 자신이 긴 어둠의 터널에서 벗어나는 듯한 과정을 겪은 후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주장 등은 새로운 分別인 幻影을 주빈으로 맞아 들여 
고착화시킨 것입니다.

석가세존께서도 오랫동안 고행 중일 때는 난관으로 인하여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육신과 정신을 가다듬은 보편적인 생활로 돌아온 후 비로소 
분별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3) 홀로그램 현상

육신과 정신을 가라앉혀 통제하는 초기단계에서 고요가 한층 더 깊어지면 
드러나는 현상들은 홀로그램처럼 더욱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다가옵니다. 제 
현상들은 때로는 사천왕상과 같은 험악한 모습으로 위협을 하여 靜을 깨트리려 
하는가 하면 때로는 특별한 극락정토가 있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의 아늑한 
환경을 열어 보이며 유혹합니다.

홀로그램 현상 중에는 지금 이 순간을 인정하면 중생계에서는 가장 안락한 
미래가 보장되는 황홀한 운명의 例示까지 합니다. 선과 악, 유·무의 경계에서 
피조시킨 관념들은 수행이 깊어갈수록 더욱 입체적이고 사실적인 모습으로 
다가와 고요를 파괴하려 합니다. 이때의 제 경계는 몸서리 쳐질 정도로 
사실적입니다. 그러나 소가 닭 쳐다 보듯 하여 제 현상에 끄달림을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제 현상에 작은 관심이라도 일으키는 순간 무한 
에너지 배양이 아닌 駐着한 만큼의 한계가 설정된 또 다른 衆生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업식의 발동이 고차원적이고 사실적으로 다가올수록 수행자의 心身은 많은 
변화가 찾아듭니다. 첫째, 육근이 기민하게 반응합니다. 둘째, 시공간에 따라 
머리끝이 하늘에 매달린 듯한 직선화 현상과 때로는 밝은 빛이 머리를 가득 
채워 머리뚜껑이 없어진 것 같은 느낌 등 내·외부의 에너지 흐름에 신체가 
다양한 형태로 반응하고 셋째, 낌새를 알아채며 예지능력도 생겨납니다.


이러한 변화는 蓄氣로서 六塵의 통로가 원활해지기 위한 생체 에너지 집중화 
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변화가 확인되었으면 즉시 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체감하는 제 현상을 절대적 능력이나 신비로움으로 인식하여 
그것을 붙잡으려 하면 상기현상을 일으킵니다. 상기가 굳어지면 하늘에 매달려 
세상을 내려다보는 인식의 소유자가 됩니다. 이런 부류들은 자기만의 특별한 
아방궁을 설정한 상 높은 도인 행세를 하며 세인을 현혹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때로는 머리가 터지고 눈알이 튀어나올 듯한 고통을 받게 되므로 
정진의 길인 충돌과 내적 처단을 극구 회피하며 간교한 술수로 세상과 타협하는 
기술자가 됩니다. 그 이유는 스스로 처방을 내릴 수 있는 자정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4) 도(道)가 석자면 마(魔)가 석자

이 말뜻은 홀로 앉은 모습인 좌선으로 고요를 익히는 수행의 초기 단계를 
벗어나 실생활에서 부닥쳐오는 삶의 현장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좌선시 상으로 드러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이 지어놓은 업식 종자이며 
반연의 환영임을 항상 직시해야 합니다. 좌선으로 일념이 깊어 갈수록 업식도 
분명해집니다. 더불어 일상 생활 속에서도 예감하지 못하던 갖가지 난제들이 
불거져 나와 앞길을 가로막고 곤경에 시달림을 당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苦를 스승으로 삼아야 할 단계입니다. 부대끼는 현실을 극기하지 않고서는 결코 
자아가 올바르게 성숙하지 못합니다. 바름을 추구할수록 다가서는 갖가지 
난관들은 고요에 이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겪어야 되는 고난의 여울목인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인연과 연기를 관하여 원인을 밝혀 가야 합니다.

像으로부터 지배당한 의식은 맹목적 희사나 구원을 자초하여 연비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신체부위를 절단하거나 불에 태워 육신을 훼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몸을 벗어난 깨침도 없거니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육신을 임의로 
망실하고서는 어떤 경우에도 깨달음에 이를 수 없습니다. 더욱 통탄할 노릇은 
禪房 修者가 마장에 걸려 들어 자신의 성기를 절단한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두고 
그의 스승이 그 행위를 깨달음의 용단으로 인식하여 만천하에 자랑한 일화는 
암울한 시대의 서글픔입니다.

지혜의 불꽃을 피워 올리는 용트림은 業緣으로부터의 해방과 정확히 비례하며 
깨달음은 相이 아닌 뜻으로 헤아리는 지혜의 힘이 발로된 것입니다. 그것은 
업습을 멸한 것이기에 幻으로 드러날 因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석가세존께서도 
정각의 초석을 놓는 과정에서 실상계의 갖가지 유혹과 협박을 겪은 사실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5) 자연을 觀하다

강철은 불에 거듭 달궈낸 무쇠이듯이 人天의 법리에 입각하여 좌선 중에 
일어나는 갖가지 환영으로부터 물러나지 않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면 차츰 
내공이 생겨 삶의 경계에서 흔들림이 줄어들게 됩니다. 이때부터 놓고 비우고 
버린 것의 본성인 분별이 줄어들어 생체 에너지 보존이 가능한 이익되는 삶을 
구축하기 시작합니다. 

識이 맑았다 흐렸다 하는 느낌이 분명해집니다. 뇌 세포가 증식되어 지혜의 
힘이 솟아나고 피부 속에서 지렁이가 기어가 듯 폐쇄된 모세혈관이 재생되는 
현상이 자주 일어납니다. 외부 신체의 변화는 가끔 휴화산 폭발로 열꽃이 피며, 
업식이 녹아 나는 실상으로써 피부에 얼룩이 배어 나오기도 합니다. 이것은 
생체에너지를 몰아 쓸 줄 아는 일념의 동적 반증이며 道의 길을 확 포장하여 
재정비하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和尙은 마음의 징표입니다.

올바른 수행은 선각자들이 지어간 뜻의 배를 타고 자연의 질서인 순리에 영원히 
빠져 죽는 것입니다.[寂靜涅槃]

이 단계에서는 긍정과 부정 무슨 발원 등 육근 경계를 뛰어 넘기 위한 대승법의 
방편들마저도 놓아져야 합니다. 익은 고요가 됨은 먼저 들려오는 소리로부터 
해방되어지는 이식(耳識) 관법(觀法)을 시작으로 안식(眼識)을 해방시키고 
비(鼻) 설(舌) 신(身) 의(意)등 육근에 묶여있는 육식을 차츰 자유로 인도해 
내어야 합니다.

육근이 해방되어지면 흐르는 물처럼 스스로 기혈을 순환시키며 이때부터 서서히 
의심은 쉬어집니다. 때로는 대 자연과 벗하며 좌선 중에 환희지를 즐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 자유는 환희지 마저도 놓을 수 있는 용기를 길러 가는 
것입니다. 

대 자유인 中道는 범부와 성인의 길도 아니며 선정의 즐거움과 대 긍정만으로 
채워지는 땅이 아닙니다. 그가 나아갈 길이 절대 고독일지라도 지금의 
즐거움에서 털고 일어날 수 있어야 요원한 불씨를 밝힐 수 있습니다.

 6) 無心의 등잔을 밝혀라

대 자유는 無心의 등잔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씨를 지펴 들고 태양을 우러러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살아가는 實像觀입니다. 그 힘으로 三界를 觀합니다. 

무심의 등잔이 놓여질 땅은 아수라가 활개치고 야단법석을 이루는 
저자거리입니다. 그는 萬象과 교감하기에 세상을 어지럽히는 형상을 짓지 
않거니와 희로애락이 중첩하는 세속사를 등지거나 行이 없는 無記의 길을 걷지 
않습니다. 무심의 등잔을 밝혀든 자는 行住座臥 그 자체가 坐禪이기에 相으로 
그를 가늠할 수 없습니다.

 7) 행동하는 禪으로 거듭나다.

禪定의 지혜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영원한 자산입니다. 옛 부처와 염라대왕도 
선정에 익은 者를 어쩌지 못하며 역대 조사도 그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는 미래에 올 눈 밝은 者에게 거꾸러질 禍를 자초하지 않을 수 있다면 청정한 
律로서 叢林을 이루고 人天의 스승을 길러내는 시대적 소명을 지어갑니다. 
그리하여 如如한 生老病死로 회귀합니다.

5. 禪 警策

아침에 일어나면 마당 쓸고 하루를 준비하듯 心身을 갈고 닦아 定慧雙修를 
익히지 않으면 절반 농사일 뿐이며 돌아앉은 고요를 즐기려 함은 수행이라는 
이름으로 無記에 떨어져 또다시 그 안에 마구니를 불러들이는 몸짓입니다. 용과 
호랑이를 조복시키듯 한 용맹으로 萬法을 具足하여 지혜의 불꽃을 키우는데 
게을리 하지 않음이 걸림없는 삶이며 지고한 參 禪입니다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