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roce (크로체) 날 짜 (Date): 2001년 3월 25일 일요일 오전 10시 04분 07초 제 목(Title): Re: to neon to Enlight. 여여하게 보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이것이 크리슈나무르티, 라즈니쉬와 라마나 마하리쉬를 가르는 큰 차이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 라즈니쉬는 둘 다 주시를 강조했지만 라마나 마하리쉬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라즈니쉬의 경계에는 관찰자가 남아있고, 크리슈나무르티는 관찰자 없는 자각을 이야기했지만, 방법론적으로 주시에만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전달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두 사람의 제자중에 大覺이 없었던 반면, 라마나 마하리쉬에게는 슈리 푼자(빠빠지)라는 대각이 탄생했던 이유입니다. 돈오한 사람들이 돈오돈수를 모르고, 점수에 빠져 고생하는 것은 주시에만 매달려 여여한 경계에 머무르기 때문입니다. 여여한 경계 역시 경계이며, 더 깊이 들어가야만 합니다. 여여한 경계에서는 더이상 나아갈 수 없는 한계에 반드시 맞닥뜨리게 됩니다. 여여한 경계가 부처님의 中道의 깨달음이라면 금강경에서 "相이 相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본다"하지 않고, "相이 相임을 보면(여여하게 보면) 곧 여래를 본다"했을 것입니다. 그 여여한 경계를 뚫고 나가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합니다. 여여하게 보는 자에 의식을 되돌려 고정시켜야 합니다. 좌선시에 눈을 감고 한다면, 일단 의식을 돌려 고정시키고, 안이비설신의 여섯가지 대상이 일어남을 알아차리는 순간, 알아차리는 의식으로 회귀시켜서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고정시키기 위해서는 의문을 갖는 것도 좋습니다. "이 알아차리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마하리쉬가 말했던 가장 직접적인 방법, 자아탐구법이며, 선가의 화두 중에서 "이 뭣고"입니다. 눈을 감는 동안 이 고정이 유지되었다면 눈을 서서히 떠서 色의 경계에 들어서도 유지되어야 합니다. 눈을 감든, 뜨든 관계없이 여여하게 유지되어야 합니다. 호흡관을 할 적에는 이렇게 합니다. 호흡을 관찰하면서, 관찰하는 것이 무엇인가로 들어가야합니다. 호흡(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에 머무는 게 아니라, 관찰이 나오는 곳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입니다. 들어가면 고정되어 성성적적한 佛地에 곧 도달합니다. 눈을 뜨건 감건 잠들건 관계없이 佛地에 머물게 됩니다. 여기에 머물러 나오지 않게끔 계속 수련하는 것이 진정한 점수이며, 이 佛地에 머무는 것 이상이 없기 때문에 여기까지 가능하면 돈오돈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돈수는 하루에도 수천번 가능하며, 매번 0.1초도 안되는 순간에 뛰쳐나가려는 소(마음)를 붙잡아 佛地로 되돌려 놓는 것이 전부입니다. 돈오돈수의 진의를 저 역시 최근 몇일 간 좌선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부동지이며, 불퇴전의 경지이며, 무소의 뿔처럼 그물이나 바람에 걸리지 않고,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이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 들어서서 자리를 잡아야만 비로소 부처님의 말씀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왜 선가에서는 라즈니쉬와 크리슈나무르티를 말하지 않고, 라마나 마하리쉬만 인정해주는지를 알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