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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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roce (크로체)
날 짜 (Date): 2001년 3월 12일 월요일 오후 06시 55분 30초
제 목(Title): 佛性과 하나님


〈불성과 하나님〉
많은 사람들이 불교와 기독교는 그 교리가 서로 아주 판이하게 다른 것으로 
알고있지만, 그 본질을 자세히 살펴보면 두 종교의 교리는 서로 다르지 않다. 

흔히 두 종교간에 서로 대립되는 부분을 말하라면 바로 기독교에 
있어서「하나님」의 존재인데, 불교에서는 절대자로서의 신(神)을 인정치 
않으므로 기독교인들은 이를 두고 불교는 「사교(邪敎)」라거나, 더 
나아가서「마귀의 종교」라고까지 극언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진리의 눈을 떠서 본다면 기독교에서 일컫는「하나님」이란 불교에서 
말하면 바로 일체 중생에게 갊아있는「佛性」을 가리키는 말로써, 두 종교간에 
근본교리는 사실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여기, 왜 그런지 그 근거를 살펴보자. 


〈佛性과 하나님〉
1. 만법(萬法)과 짝하지 않는다 / 유일(唯一)하다 

불교에서 佛性이란, 말 그대로「부처의 성품(본성)」을 뜻하는 것으로써, 일체 
중생의「본래 마음자리」즉, 自性(스스로 가진 성품)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온 우주만유의 「근본뿌리」가 되는 진리를 가리킨다.
이 불성은 비유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무엇으로도 가히 설명할 
수가 없어서 도무지 그 짝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萬法과 더불어 짝하지 않는다[不爲侶萬法]」라고 한다. 여기서 「만법」이란 
「일체 모든 것」을 뜻하는 말이다. 

기독교에서의「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유일한 존재이다. 그 비교대상을 찾을 수 없다. 오직 하나님뿐이다. 
그래서 족히 짝할만한 상대가 없다. 

이처럼, 불성과 하나님은 그 짝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전혀 차이가 
없다. 

2. 항사묘용(恒沙妙用)을 나툰다 / 만물을 창조하셨다 

불성은 진리의 본체로서 그 자체는 텅 비고 고요하지만 여기서는 또한 헤아릴 
수 없는 진리의 작용[妙用]을 나타낸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한다.
즉, 불성은 텅 비어서 그 가운데는 한 물건조차 설 수 없지만, 우주를 
삼라만상으로 나타나게 하고 일체 생명이 각각의 인연을 따라 태어나고 또 
멸하게 한다. 이 모든 것이 진리 즉 불성의 작용이다.
그러므로 물질의 성주괴공(成住壞空), 생물의 생로병사 등 이른바 삼라만상 
모든 현상계는 다 이 불성의 작용인 것이다.
불성은 이처럼 일체 우주만유의 생성과 소멸의 근원이다. 

하나님도 그러하다. 하나님은 우주 삼라만상의 창조자이다. 일체 생명은 저절로 
태어나지 않았고 모두 하나님이 생명을 넣어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우주는 
하나님이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처럼 불성과 하나님은 둘 다 우주 만물을 있게 한 원천이라는 점에서 서로 
차이가 없다. 

3.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 스스로 존재[自存]한다 

불성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 즉, 불생불멸이다. 과거 무수겁 
이전에도 있었고 앞으로 무량겁이 지나더라도 없어지지 않는다.
불성은 어떤「물질」이 아닌지라, 어디서 난[生] 것이 아니므로 또한 
없어질[滅] 수도 없다. 물론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도 있었고, 온 우주가 다 
없어진다 해도 이것은 없어지지 않는다.
이와 같이 불성은 늘 항상(恒常)한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自存]한다. 하나님은 나거나 
죽는 일이 없다. 하나님은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냥 스스로 
있다. 항상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불성과 하나님은 그 항상성(恒常性)에서 전혀 차이가 없다. 

4. 본체는 가히 사량(思量)할 수 없다 

불성은 일체가 텅 비어서 모든 名相(이름과 모양)이 다 끊어진「절대 空」의 
자리이기 때문에, 그 본체란 어떤 말과 글로도 정확히 표현할 수 없다. 이른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자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가히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으며,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인간의 지적(知的)능력으로는 가히 사량(思量)하여 미칠 수가 없는 
곳이다. 그러므로 이 자리는 다만 깨쳐서 알 도리밖에는 없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스스로 깨치지 않고는 이것은 바로 알지 못한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결코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 또한 아무리 
눈, 코, 귀, 입, 몸을 통해서도 결코 하나님의 존재는 찾을 수 없고, 
생각으로서도 가히 미치지 못한다. 하나님은 오직 마음의 눈을 떠서 보아야 
한다. 즉, 깨치지 않고는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과 같이 물질적인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성과 하나님은 지각으로는 느낄 수 없고, 생각으로도 가히 미치지 
못하며, 오직 깨달음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서로 차이가 없다. 

5. 만유(萬有)를 총섭(總攝)한다 / 우주를 주관한다 

불성은 곧 法(Dharma)이며, 동시에 진리 그 자체이다. 이것은 우주 삼라만상의 
근본 바탕이며, 만유를 있게 하는 원천이다. 불성은 인간을 포함해서 우주의 
형상을 가진 모든 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 생기고, 머물고, 무너지고, 
없어지는 것)의 이치로 변화케 한다.
불성이 만약 텅 빈자리[空寂한 體]가 아닌 어떤「물질」이라면 우주만유를 
이토록 끝없이 정교하게 움직일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형체를 가진 
것들은 반드시 스스로 멸함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온 우주를 주관한다. 우주 삼라만상을 창조하고, 
끊임없이 운영하며, 또한 무너뜨리는 것 모두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만물을 이렇게 조금도 빈틈없이 운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인간처럼 어떤 
물질적 형태를 가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만상(萬像)은 스스로 태어나고 없어질 수 없다. 모두 
오직「하나님」이라는 존재에 의하여 생기고 멸망하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불성과 하나님은 우주만유를 관장한다는 점에서 전혀 차이가 없다. 

6. 지공무사(至公無私)하다 / 공정(公正)하다 

불성은 본시 텅 비어서 空寂한지라, 여기서 나투는 무수한 작용은 어느 한 
가지라도 한 쪽으로 치우치거나 사사로움이 없다. 왜냐하면 불성 
자체에는「나[我]」라는 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쉼 없이 우주 
삼라만상을 움직이면서도 털끝만큼도 어긋나거나 지나침이 없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얼핏 이해가 되지 않는 현상들이라도 무궁한 세월을 놓고 
볼 때는 결코 빗나감이 없다. 그래서 중생의 눈으로는 간혹 이러한 운행원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진리를 부정하는 자들도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영원한 정의(正義)이다. 하나님이 행하는 모든 일은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이 행하는 바는 모두 절대(絶對)의 
올바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라도, 
하나님의 행위는 모두 인간의 지적능력의 한계를 벗어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시비의 대상이 안된다. 하나님은 모든 이치를 초월하여 절대 공정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성과 하나님은 추호도 치우침이 없이 공정하다는 점에서 전혀 차이가 
없다. 

7. 자비가 갊아있다 / 사랑이다 

불성은 일체의 相이 다 끊어진 자리이다. 그래서 여기에는「나와 너」라는 
구별, 즉 自他가 없는 절대의 자리이다. 자타가 없다는 말은 우주만유 일체가 
다「내 몸」아님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나」와「남」이 둘이 아니니, 작은 
벌레 한 마리, 꽃 한 송이, 돌멩이 하나까지도 다 소중하다는 것이다.
불성에는 이와 같이 스스로 한없는 자비가 갊아있다. 

하나님도 그러하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을 
한없이 사랑한다. 여기에는 어떤 예외가 있을 수 없다. 비록 하나님을 모르거나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빠짐없이 사랑한다. 아무 쓸모도 없이 세상에 나온 
존재는 없다. 모두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피조물들을 어찌 하나인들 사랑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을「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불성과 하나님은 스스로 사랑이라는(자비가 갊아있다는) 점에서 전혀 
차이가 없다. 

8. 거역하면 고통을 받는다 

불성은 스스로 지혜를 갖추고 있다. 이것을 공적한 가운데 나오는 오묘한 
지혜라고 한다. 그래서 몸이 피곤하면 저절로 쉬라고 일러주고, 배가 부르면 
그만 먹게 하며, 추위에 떠는 사람은 따뜻하게 해주라고 하고, 굶주린 사람에게 
먹이를 나눠주라고 일러준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몸에는 병이 
따르고, 진리의 인과작용에 따라서 언젠가 자신도 똑같은 고통을 당하게 된다. 
이것은 자신의 불성에서 나오는 지혜를 스스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불성을 거스르면 스스로 고통과 괴로움이 찾아오게 된다. 

하나님도 그러하다. 누구나 하나님의 피조물인 이상 하나님에게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는 결코 고통을 피할 수 없다. 

이처럼 누구나 불성과 하나님을 거스르면 고통을 받는다는 점에서 전혀 차이가 
없다. 

9.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불성에는 한량없는 지혜와 일체 만법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이것을 가리켜 「一切가 具足하다」고 한다.
불성은 텅 비고 고요하면서도 또한 스스로 두렷이 밝아서 가없는 지혜를 다 
갖추고 있는데 이것을 항사묘용(恒沙妙用), 즉 진리의 한없는 작용이라고 한다. 

우주 삼라만상이 저마다 형형색색(形形色色)으로 벌어져있는 것이나, 
부처님께서 다함이 없는 지혜(반야)를 갖추셨다는 것은 모두 이 불성에서 
나오는 오묘한 진리작용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만 중생은 스스로 분별과 집착 때문에 이 불성의 지혜를 덮어버리고 갖가지 
고통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중생 스스로의 분별 집착으로 인해 이 지혜가 가려져 있다는 것이지, 
본래 그 지혜의 밝음은 부처나 중생이나 조금도 차이가 없다.
이렇게 불성에는 스스로 완전한 지혜와 작용을 갖추고 있다. 

하나님도 그러하다. 하나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 하다.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능히 할 수 있다. 여기서「全知」란 불성에서 
말하면「반야(一切智)」 이고,「全能」이란「萬行이 구족하다」는 말과 같다. 

이처럼 불성과 하나님은 서로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차이가 
없다. 

10. 오직「마음」이 관건이다 

불성은 우리 마음 밖에서는 찾을 수 없다. 즉, 마음을 떠나서는 불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주 현상계에 있어서 
불성은「진리」혹은「道」라고 부르고, 우리 내면에 있어서는 
「마음」혹은「성품」 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진리, 즉 불성을 깨닫는 것은 
오직「마음」이 관건인 것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존재, 즉 성령을 느끼는 것은 마음을 통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마음은 하나님을 만나는 문이다. 그 까닭에 
기독교에서는 비신자들에게「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을 영접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불성과 하나님은 모두「마음이 관건」이라는 점에서 서로 차이가 없다. 

11. 죄와 복을 내린다 

불성은 텅 비고 고요하며 두렷이 밝은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일이 인과의 
원리에 의하여 추호도 어김없이 그 뿌려진대로 열매를 맺게 된다. 불성이란 
본시 완전히 텅 비어서(眞空), 티끌만큼도 사사로운 情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성에서 나투는 결과는 그 원인적 행위에서 비롯되므로 일체 만물이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다.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듯이, 죄를 
심으면 죄를 받고, 복을 심으면 복을 받기 마련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우주 삼라만상 일체를 주관하는 것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모르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의 피조물 하나 하나가 어떻게 
행동하고 생각하는지를 다 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이 행한 
각각의 행위에 따라 털끝만큼도 어김없이 그에 맞는 죄와 복을 내린다. 
그래서「네가 뿌린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이 있다. 이와 같이 생명 있는 자는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이처럼 불성과 하나님은 그 행한 바에 따라 반드시 죄복을 내린다는 점에서 
서로 차이가 없다. 

12. 죄업 소멸 / 죄를 사함 

불성은 본시 텅 비어 한 티끌도 물들지 않은 청정한 자리[淸淨法身]이다. 즉, 
이 자리가 바로 우리의 본래 마음자리이다. 그런데 중생들은 온갖 탐욕과 
집착을 일으켜서 이 자리를 뒤덮어 버린다. 

모든 탐욕과 집착은 그 뿌리를 들여다보면 정작 實體가 없어서, 마치 눈앞에 
어른거리는 아지랑이와 같다. 중생은 이러한 허깨비에 끌려서 온갖 죄업을 짓는 
것이다. 즉, 중생의 죄업은 미혹한 마음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성을 깨쳐서 미혹한 마음을 없애면 죄업의 근본이 空하여 죄업은 
스스로 청정해진다. 이것이 이른바 「죄업소멸」이다.
불교에서는 불성을 깨쳐서 두렷한 자성의 혜광을 비추어 근본이 본래 공한 
죄업을 스스로 청정케 하는 것을 「진정한 참회」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마음에 미혹을 없애서, 늘 자성의 혜광으로 맑고 깨끗한 
근본자리를 비추면 죄업이 스스로 청정해지는데, 이것을 「진정한 참회」라고 
하는 것이다.
즉, 참다운 참회는 죄업을 스스로 청정케 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진실로 회개하면 모든 
죄를 사하여 준다. 즉, 마음으로부터「진정으로 참회」하면 하나님은 모든 
죄업을 다 소멸시켜 준다는 말이다. 

이처럼 불성과 하나님은 진정한 참회(회개)를 할 때 궁극적으로 모든 죄업이 
청정해진다 (사해준다)는 점에서 서로 차이가 없다. 

13.「존재여부」가 아니라 「알고 모름」의 문제이다 

불성은 아득한 과거로부터 영원한 미래까지 恒常한 것으로써, 나고 
죽음[生滅]이 없으나, 그것은 다만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해 처음 알려졌다.
불성은 석가세존께서 깨치고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전에도 이미 있었으나, 
사람들이 단지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있고 없음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알고 모름의 문제이다. 즉, 다시 말하면, 깨달음의 문제인 
것이다. 믿고 안 믿고는 별 문제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 누구나 
불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그에게서 불성이 없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창세기 이전에도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고 영원한 
미래에도 또한 존재할 것이지만, 그 사실을 사람에게 처음 가르쳐 준 것은 바로 
예수님에 의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존재는 恒常하지만 예수님 이전 
사람들은 그것을 잘 몰랐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는 결국 있고 없음의 문제가 아니라, 다만 알고 모름의 
문제이다. 즉, 다시 말해서 마음으로「깨달았느냐 못 깨달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믿음은 오히려 별로 문제가 안된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恒常하는 하나님의 존재가 없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성과 하나님은「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알고 모름」의 
문제라는 점에서 서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14. 몰라도 살 수 있다 

누구에게나 불성은 항상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사실을 모른다고 해서 
살아가면서 곤란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불성을 까맣게 몰라도 
그는 스스로 그 불성을 때와 장소에 맞게 잘 쓰면서 살아간다. 살아있는 
생명체에 있어서 모든 행위와 작용의 원천은 바로 불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령 모든 생물은 제 자신의 근본 뿌리를 모르는 것뿐이지, 그 
뿌리에서 비롯되어 나타나는 많은 이로움, 즉 불성의 혜택은 모두 받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누가 하나님의 존재를 모른다고 해서 그가 살아가는데 
장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살아가면서 누리는 모든 혜택은 
하나님이 준 선물이다. 일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라고 하더라도 다만 하나님의 존재를 모르는 것뿐이지,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주는 모든 혜택은 고스란히 다 받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불성과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가 설혹 몰라도 살 수 있다는 점에서 서로 
차이가 없다. 

15. 유일한 신앙의 대상이다 

불성은 곧 마음이다. 그래서「心卽是佛」이라고도 한다. 즉,「마음이 곧 
부처」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부처는 마음 밖에서는 결코 찾을 수가 없다. 

달마조사께서 말하기를 『자신의 마음이 부처인줄 안다면,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지 말라 [若知自心是佛 不應心外覓佛]』고 하였다.
또한 이르시되『자기의 마음이 곧 부처인지라, 부처를 가지고 부처에게 절하지 
말라. 만약 형상을 취하면 곧 마귀에게 포섭되어 모두가 삿된 도에 떨어진다 
[自心是佛 不應將佛禮佛若取相 卽是魔攝 盡落邪道]』라고 경계하였다. 

이와 같이, 마음이 바로 부처인 것이므로, 신앙의 대상은 오직 자신의 마음 
하나 뿐으로써, 이것 말고 다른 것을 취하여 예경(禮敬)의 대상을 삼으면 모두 
다 삿됨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에 이르기를「나 말고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였다. 즉, 하나님만이 유일한 경배의 대상이다. 신앙의 대상이 그 외에 더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 외에 다른 대상을 섬기면 모두 삿되고 그릇된 
것이다. 

이처럼 불성과 하나님은 오직 유일한 신앙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서로 조금도 
차이가 없다. 


결론으로, 많은 기독교 신자들은 이 우주의 창조자이자 절대자인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를 삿된 종교로 규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교의 참다운 교리를 잘 몰라서일 뿐,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불교에서의 「불성」은 기독교에서의「하나님」과 그 정체성(正體性)이 
서로 정확히 일치한다. 

즉, 불교에서의 불성을 마치 의인화(擬人化)하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와 기독교는 그 가르침의 본질에 있어서 크게 차이가 없음을 
알아서, 신앙인들은 서로가 서로를 마구잡이로 비방하는 우(愚)를 범하지 
않도록 해야겠다. 

懶牛, 1998.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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