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2월 25일 일요일 오후 07시 33분 26초 제 목(Title): 부처와 선사 2 조연현 - 부처와 선사 ② 독불장군과 천상천하유아독존 2001.1.5 오랫만입니다. 1월엔 인도를 다녀오느라 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부처와 선사>도 1번을 올린 지가 2달이 되었군요. 글을 독촉하신 독자분들도 있었는데, 어찌됐든 글이 늦어져 죄송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우선 <부처와 선사>의 후속글을 올리고, 제가 인도에서 느낀 점을 <인도에서-붓다의 재발견>이라는 제목으로 연속해서 글을 올릴 계획입니다. 석가모니는 중생의 고통을 보고, 중생의 고통을 치유하는 법을 찾기 위해 왕위마저 버리고 출가했고, 마침내 `고통은 집착으로 부터 오며, 그 집착을 놓아야, 열반에 이를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석가모니는 정각을 이룬 뒤 열반할 때까지 45년동안 걸식을 하며, 중생들이 고통으로 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일러주었습니다. 정각을 얻는 순간 더 이상 얻어야할 어떠한 욕구마저도 여의었기에 곧 바로 열반에 들 수 있었지만, 그는 45년동안 걸식으로 거친 밥을 먹으며, 거리에서 잠자며 사람들을 만나 모든 생명에 대한 자비를 몸소 실천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의 깨달음은 고행굴 속이 아닌, 삶속에서,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피어났습니다. 그는 수행이나 깨달음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깨달음 이후에 보여준 `자타가 모두 함께 행복해지는 삶'이 진정한 목적이었음을 삶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니 석가모니와 같은 삶을 살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수행이 아니라, 오직 수행 자체만을 목적으로 삼은 채, 중생을 외면하고, 산좋고 물좋은 곳에서 일신의 성불행만을 도모하는 삶은 석가모니 부처의 삶과는 천리 만리 떨어진 삶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는 수행자들에게 고통의 근본 원인인 무지와 갈애로 부터 벗어나도록 안내했지만, 일반 민중들에겐 그의 지식과 그의 환경과 그의 업장에 맞는 얘기를 해주어 그가 `자신의 문제가 문제가 아님'을 스스로 깨닫도록 해주었습니다. 석가모니께서 하신 이런 얘기들을 우리는 8만4천법문이라고 합니다. 8만4천법문이란 상징일뿐, 실은 한량없는 법문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에 맞는 얘기를 하다보니, 이처럼 한량없는 법문이 된 것입니다. 그는 확철히 깨달은 뒤 연기법(緣起法·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는 생명의 인과와 연관)과 삼법인(三法印· 무상 無常, 무아 無我, 열반 涅槃)으로 생명과 존재의 실상을 설명했고, 고통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는 길로 8정도(정견 正見, 정어 正語, 정업 正業, 정명 正命, 정념 正念, 정정 正定, 정사유 正思惟, 정정진 正精進)와 3학(계·정·혜, 戒·定·慧-미혹을 깨뜨리고, 선을 행하고, 몸과 마음을 안정하게 해 밝게 함)을 제시했습니다. 삼법인을 통해 어떠한 것도 집착할 바가 없음을, 연기법을 통해 우주 일체의 모든 것이 연관돼 있음을 깨달아 존재의 실상을 낱낱히 해부했고, 8정도와 3학으로 고통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는 방법론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의 가르침이 이처럼 간결하고, 명쾌함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법문이 많아진 것은 그만큼 사람마다 마다의 환경과 고민과 번뇌가 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석가모니께서 상세히 한량없는 법문을 남겼는데도, 왜 살아있는 스승, 살아있는 스님이 필요한 것일까요. 그것은 돌부처, 금부처는 상황에 따라 업장에 따라 근기설법을 해줄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바보 천치인 주리 반특까지 깨달음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요즘 스님들이 상대의 근기에 따라 설법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는 것 같습니다. 큰스님으로 일컬어지는 분들도 부처와 조사와 선사들의 법문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석가모니와 사람이 만나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를 딛고 순식간에 마음이 통해 너와 내가 둘이 아닌 경지가 되는 데 반해, 현재의 이런 스님들의 법문 후에는 여전히 중생은 중생으로 남는 것은 무엇때문일까요. 여전히 벽과 벽이 만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부처와 조사, 선사의 법문을 들으려면, 굳이 고생스럽게 절까지 찾아가지 않아도 불경이나 고전을 보면 더욱 명쾌한 진리를 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절을 찾아 스님을 접하는 이유는 안락의 기운과 근기설법이 주는 감화력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의 고통을 덜어줄 방법을 제시해 줄 방편을 지니고 있지 못하고, 중생의 고통을 건지려는 보살심마저 갖지 못한 채 높은 법상위에만 앉아 있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마치 세상에서 부르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처럼. 그러나 석가모니가 선언한 천상천하유아독존의 뜻은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강한 아상으로 군림하려하고, 아집을 지닌 사람은 독불장군으로 불러야 옳을 것입니다. 우주에 나 홀로 존귀하다는 뜻의 天上天下唯我獨尊은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며, 모든 생명과 내가 서로 연관되어 뗄레야 뗄 수 없는 한 생명이라는 뜻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니 천상천하에 나 홀로 존귀하다고 할 때 그 `나'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한 개체로서의 나가 아닌, 모든 생명 전체, 우주 전체를 일컫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가 깨달은 연기실상과 삼법인은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할 수 없음을 명쾌히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잘못 혼용하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은 부처의 진정한 모습에 대한 오해만큼이나 깊고도 깊은 것 같습니다. 일체 생명을 보지 못하고, 오직 한 몸, 한 생각에만 메달려 세상과 벽을 쌓고, 생명을 죽이고, 평화를 깨뜨리고, 자신도 고통에 메어 살 것인가. 아니면 天上天下唯我獨尊의 경지로 자타가 일시에 성불하는 길과 사랑, 평화, 행복의 길을 갈 것인가. 지옥도 극락도 우리의 선택에 메인 것 같습니다. 조연현 기자 cho@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