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roce (크로체)
날 짜 (Date): 2001년 2월  3일 토요일 오후 10시 56분 18초
제 목(Title): Re: 겸손함과 자유


판단 수정을 하는 행위와 순수 관찰이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순수 관찰은 단지 보기만 하는 행위입니다. 이 보기만 하는 행위는
즉시의 상태 혹은 바로 즉시의 기억의 상태만을 계속 따라가는
행위입니다.
==========================================================================
순수 관찰에는 내가 없습니다.
순수관찰을 단지 보는 행위라고 한다면 이것은 마치 거울 앞에 선 사람이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면서 내가 나를 비추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경우가 됩니다. 





판단 수정은 순수 관찰보다는 그 진행 시간이 길고 복잡하며, 그 사고의 대상을
설정하고 연관되는 것을 얻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판단 행위를 하는 순간에는 순수 관찰조차 하지 못합니다.
순수 관찰은 잠시 시간을 두고 우리 몸에 기억된 기억결과를 살피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그리고 순수 관찰 행위는 매우 즉각적입니다. 판단이나 여러 사고
행위는 시간이 걸리고 여러 단계를 거치나 이 순수 관찰은 거의 즉시
이루어지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행위라서 다른 행위를
할 때에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기억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
순수관찰에 의지가 개입된다는 것은 '나'가 순수관찰의 영역에 붙어 있다는 것이죠. 
이 '나'에서 판단,수정의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이 '나'가 순수관찰의 영역에서 
떨어져서 대상으로 나가야됩니다. 그래야 진실로 순수관찰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본래의 상태가 바로 이것(진실한 순수관찰의 상태)입니다. 이 '나'(에고)가 
순수관찰의 지점에서 교묘히 남는 것은 정신수행자들만이 갖는 병이죠. 보통 
사람들은 이 상태까지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판단하는 것과 행위자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러한 판단 행위와 수정 행위에 행위자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떠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을 묶어서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상에서 말하기를 누가 무슨 목적을 위해서 이러한 행위를 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각각의 행위에 대해서 행위자를 설정한다면 인간은 매 순간에
수많은 행위자를 전환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련의 행위자가 아니라 수천 수만 수억의 행위자의 행세를 하면서 움직이는
복잡한 체계라는 생각이 듭니다.
==========================================================================
그렇습니다. 행위자는 수천 수만 수억의 행세를 합니다. 이 행위자를 통합시키는 
중심이 '나'라는 기억입니다.







 

단지 이러한 관찰 행위를 하면서 또한 판단 행위를 하면서 그 상황을 보고
적절하게 선택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살아가는 상황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즉 매순간에 적절한 행위자를 선택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인간의 생리 구조라는
것이 현실적인 상황입니다.
===========================================================================
나쁘지 않습니다. 행위자라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이 행위자가 순수관찰을 
자신이라고 고집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순수관찰은 내가 아니라, 본연의 
존재바탕입니다. 그래서 제법무아라고 하죠.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잠을 잘 때조차도 이러한 행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시 즉시의 순수 관찰 행위를 하다고 좀 긴시간이 걸리는 행위를 하고도 하는 등
여러가지의 행위를 하고 살아갑니다.
잠을 자면서로 행위를 하는 것은 자고 나면 깨끗하게 감정과 지식이 정리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잠을 자는 동안에 순수 관찰 과정이 없이 내부의 연관
체계의 모순이나 갈등을 해결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꿈은 이 기억된
것을 보는 것에서 얻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
그렇지 않습니다. 순수 관찰은 자신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는 자연스러운 
상태입니다. 일종의 거울이랄까요? 그래서 깨어있을 때는 배고픔을 알고, 
희노애락을 알죠. 잠들면 깜깜해지거나 꿈 속에서 또한 느낍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있는 그대로 비치는 거울과 같은 성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말을 성철스님이 한 것이지만, 성철스님은 이 같은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49년간 8만4천 법문을 행하셨지만, 그 스스로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스스로 설한 바 있다고 했다면 불법은 
전부 한 개인의 머릿속에서 나온 장광설로 전락하고 말았을 겁니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이 보기만을 하는 순수 관찰을 상태로서는 별 재미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황에 맞게 적절한 목표 설정하는 탐색 행위를 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행위를 일으키는 것이 필연적입니다. 이러한 활동이 없으면
살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스로의 몸 덩어리에서 일어나는 이 현상을 하나의 현상으로
참조 한다면 거기에 휘둘리는 것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을 안다면 가만히 있는 돌 덩어리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와의 차이점이 없을
것입니다. 그 돌도 스스로의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행위자가 있을 까요?
다만 행위할 뿐입니다. 그것에 "행위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행위에     
지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
우리는 이 순수관찰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본래 그대로 있을 뿐이죠.  
우리가 삶에서 해야할 일은 다만 착각하지 않는 것, 잘못 된 것을 바르게 아는 것 
뿐입니다. 순수관찰은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갖춰져 있는 존재 그 자체입니다. 때문에 모든 이가 다 깨달아있다고 하는 것이죠. 
이 순수관찰의 청정한 거울이 없다면 어찌 우리가 성내고, 기뻐하고, 배고픈 줄을 
알며,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우리의 행위를 비추는 거울 덕분에 우리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반성하며 살아가는 것이겠지요. 우리가 이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외면하고 살아간다면 거기엔 진실은 없는 것이며,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면 거짓도, 비겁함도 모두 있는 그대로 진실이 되는 것입니다.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