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feeling (김종선) 날 짜 (Date): 2001년 2월 3일 토요일 오후 03시 45분 11초 제 목(Title): Re: 겸손함과 자유 이 부분은 혼동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이 혼동의 가능성 때문에 응시와 내성의 차이를 언급했지요. 내면을 돌아보아 과정을 관찰하고, 불합리하게 중요도를 주었다는 것을 인식하여 다시 적절하게 수정하는 활동은 분명 행위이며, 이것을 주관하는 행위자가 존재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내성이라 하지요. 일기를 쓰는 것과 같은 반성의 일종입니다. 내성(안으로 돌아봄)은 호오를 일으키기 때문에 행위자가 남게 됩니다. 응시는 이러한 판단작용을 일으키지 않는 순수관찰이죠. 판단-수정 작용은 그것이 아무리 제대로 된 것이라 해도 순수관찰의 대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 판단 수정을 하는 행위와 순수 관찰이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순수 관찰은 단지 보기만 하는 행위입니다. 이 보기만 하는 행위는 즉시의 상태 혹은 바로 즉시의 기억의 상태만을 계속 따라가는 행위입니다. 판단 수정은 순수 관찰보다는 그 진행 시간이 길고 복잡하며, 그 사고의 대상을 설정하고 연관되는 것을 얻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판단 행위를 하는 순간에는 순수 관찰조차 하지 못합니다. 순수 관찰은 잠시 시간을 두고 우리 몸에 기억된 기억결과를 살피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그리고 순수 관찰 행위는 매우 즉각적입니다. 판단이나 여러 사고 행위는 시간이 걸리고 여러 단계를 거치나 이 순수 관찰은 거의 즉시 이루어지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행위라서 다른 행위를 할 때에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기억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판단하는 것과 행위자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러한 판단 행위와 수정 행위에 행위자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떠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을 묶어서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상에서 말하기를 누가 무슨 목적을 위해서 이러한 행위를 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각각의 행위에 대해서 행위자를 설정한다면 인간은 매 순간에 수많은 행위자를 전환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련의 행위자가 아니라 수천 수만 수억의 행위자의 행세를 하면서 움직이는 복잡한 체계라는 생각이 듭니다. 단지 이러한 관찰 행위를 하면서 또한 판단 행위를 하면서 그 상황을 보고 적절하게 선택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살아가는 상황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즉 매순간에 적절한 행위자를 선택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인간의 생리 구조라는 것이 현실적인 상황입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잠을 잘 때조차도 이러한 행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시 즉시의 순수 관찰 행위를 하다고 좀 긴시간이 걸리는 행위를 하고도 하는 등 여러가지의 행위를 하고 살아갑니다. 잠을 자면서로 행위를 하는 것은 자고 나면 깨끗하게 감정과 지식이 정리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잠을 자는 동안에 순수 관찰 과정이 없이 내부의 연관 체계의 모순이나 갈등을 해결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꿈은 이 기억된 것을 보는 것에서 얻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이 보기만을 하는 순수 관찰을 상태로서는 별 재미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황에 맞게 적절한 목표 설정하는 탐색 행위를 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행위를 일으키는 것이 필연적입니다. 이러한 활동이 없으면 살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스로의 몸 덩어리에서 일어나는 이 현상을 하나의 현상으로 참조 한다면 거기에 휘둘리는 것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을 안다면 가만히 있는 돌 덩어리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와의 차이점이 없을 것입니다. 그 돌도 스스로의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행위자가 있을 까요? 다만 행위할 뿐입니다. 그것에 "행위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행위에 지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