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roce (크로체) 날 짜 (Date): 2001년 1월 9일 화요일 오후 05시 01분 39초 제 목(Title): 위앙록 해제 위앙록(위仰錄) 庚辰年 立冬에 牛谷禪院은 禪法의 體性이라 일컬을만한 위앙록 총론과 상당을 解題하고 편집하였다. 위앙록은 위산 영우선사(唐代 771∼853)와 그의 제자 앙산 혜적(807∼883)스님과 함께 위앙종(위仰宗)을 형성하여 남긴 기록이다. 明, 1630년에 원신과 곽응지에 의한 오가어록(五家語錄)편집 때 산재한 위앙록이 정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위산선사는 육조 혜능(六祖 慧能, 唐. 638∼713) 이후 남악 회양 - 마조 도일 - 백장 회해 - 위산 영우 - 앙상 혜적으로 이어진 법통으로 5가어록(五家語錄)에 들어있다.[五家語錄: 위앙의 근엄함, 조동의 세밀함, 임제의 통쾌함, 운문의 高古함, 법안의 간명함을 통칭하는 것으로 法은 그대로이나 시대와 사람에 따른 道風을 정리한 것이다.] 1. 위산경책(위山警策) 업(業)은 형체에 매임을 면치 못하여 부모인연을 빌려 몸으로 이루어진다. 四大로 지탱하는 몸은 항상 서로 등지니 덧없는 생· 노· 병· 사가 우리에게 예고 없이 다가와 아침엔 살았다가도 저녁에 죽어 찰나에 다른 세상이 된다. 마치 봄 서리나 새벽 이슬 같아서 잠깐 사이에 말라버리며 벼랑 위의 나무나 우물 속에 비추인 등넝쿨과도 같은데 육신이 어떻게 오래갈 수 있겠는가. 한 찰나에 숨이 떨어지면 그대로가 저승인데 어찌 허송 세월 하랴. 그대 납자(衲子)들은 부모를 봉양하지도 않고 6친(六親)을 이별하였다. 나라를 다스리지도 않고 가업(家業)을 버렸으며 속세를 떠나 삭발염의 하고 계(戒)을 받았다. 그렇다면, 안으로는 망념 이기는 공부를 부지런히 하고 밖으로는 다투지 않는 덕을 키워서 티끌 같은 세상에서 아득히 벗어나기를 기약해야 한다. 그런데 계를 받자마자 "나는 비구(比丘)로다"하며 상주시주물을 받아 먹으면서도 그것이 어디서 왔는가를 생각할 줄 모른다. 그리고는 공양을 받는 것을 당연시하고 머리를 맞대고 세상 잡사만을 논하니 이것이야말로 그저 한때의 즐거움만을 찾는 것일 뿐 그 즐거움이 결국에는 괴로움의 과보를 받는 줄을 모르는 것이다. 무수한 세월 속에서 6진(六塵)에 휘둘려 한번도 자신의 처지를 돌이켜보지 못하는구나. 날이 갈수록 받아쓰는 것이 늘어나 시주물의 업은 무거워 지고 찰나에 해 지는데 업을 녹일 생각은 하지 않고 더욱 쌓아 허망한 육신만 붙드는구나.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도를 닦고 몸을 단속하는 데에는 옷과 밥과 수면 이 세 가지를 넉넉하게 하지 말라"고 경계하며 법도를 지어주셨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쉬지 않고 탐내느라 세월을 보내 어느덧 흰머리가 된다. 방향을 잡지 못한 후학이라면 반드시 선지식에게 널리 물어야 하는데도 "출가한 이는 옷과 밥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만 생각한다. 부처님께서는 먼저 계율을 정하여 발심한 이를 인도해 주시고 몽매함을 열어 주셨는데 그 법도(法道)가 빙설처럼 청정(淸淨)하다. 우선 선(善)을 실천하고 악(惡)을 예방하는 것으로 발심을 단속케 하시며 나아가 자세한 조목으로 모든 폐단을 개혁하시어 계율 도량을 이루셨다. 그런데도 학인들은 전혀 공부할 생각을 하지 않으니 궁극적인 이치로 가는 최상 법문[了義上乘]을 어떻게 알 수 있으랴. 애석하다. 일생을 부질없이 지내면 뒤늦어 후회한들 돌이킬 수 없다. 교리(敎理)에는 원래 뜻을 두지 않았으므로 현묘(玄妙)한 도(道)를 깨달을 씨앗이 없다. 그러고도 나이 먹고 법랍이 많아지면 속은 빈 것이 아만(我慢)을 부리며 어진 벗과 친하려 하지 않고 오직 거만이 가득하다. 법도와 계율을 몰라 전혀 조심성이 없어서 말끝마다 교만하고 큰소리 치며 위아래 사람을 공경하지 않으니 바라문(婆羅門)의 떼거리와 다를 바 없다. 공양을 할 때는 바릿대 소리를 시끄럽게 내다가 공양을 마치고 나서는 먼저 일어나 거슬리고 괴팍스럽게 행동하니 사문의 체통이라곤 전혀 없다. 불쑥불쑥 섰다 앉았다 하여 남들을 놀라게 하니 자그마한 법도와 소소한 몸가짐도 되어 있지 않은데 무엇을 가지고 성품을 단속하겠는가. 그래서는 후배들이 본받을 것이 전혀 없다. 그러다가 남을 훈계할 때는 '나는 산승(山僧)이로다'하나 불교적인 수행은 들어 본 적도 없고 오직 티끌 같은 경계에만 생각을 둔다. 이 같은 소견은 모두 발심부터가 졸렬하고 게을러 도철(도철: 욕심이 많아서 자신을 망치는 짐승)처럼 세속에서 세월을 그럭저럭 보내다가 드디어는 황폐해질 것이니 어느 결에 걷지 못할 정도로 늙게 되면 하는 일마다 철벽을 마주한 듯 캄캄하게 될 것이다. 이때는 후학이 물어도 지도할 말이 없고, 설사 있다 해도 경전의 말씀과는 관계없는 말이 될 것이다. 혹 업신여기는 말을 듣기라도 하면 즉시 예의가 없다고 화를 내면서 꾸짖는다.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병상에 눕게 되어 뭇 고통이 조여오면 아침저녁으로 생각해 보아도 두렵고 앞길만 아득할 것이다. 이러고 나서야 허물을 후회하게 되지만 마치 당장 목이 타서 우물을 파는 격이니 어찌 하겠는가! 수행을 저버리고 방일타가 늙고 병들면 제 허물이 많음을 스스로 한스러워하다가 죽음에 이르러 손을 허우적거리며 두려움에 떤다. 그 다음 병 안의 새가 날아가듯 식심(識心)이 막아 놓았던 비단뚜껑을 뚫고 업(業)을 따라가는데 마치 여러 사람에게 빚진 사람이 힘센 빚쟁이에게 먼저 끌려가는 것처럼 갈래갈래 무거운 업 쪽으로 떨어진다. 염왕은 내 뜻대로 수명을 연장해 주지 않으며 지은 업(業)은 다시 태어남을 면하지 못한다. 이렇게 받아온 몸은 고행의 세월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겁수(劫數)를 따져 볼 수도 없다. 회한과 탄식으로 가슴이 저려오니 어찌 입을 봉하고 경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한스러운 것은 상법(像法)이 다하고 말법(末法) 시대에 태어나 부처님 세월이 아득하다는 점이다. 불법(佛法)은 생소하고 사람들은 게으름을 많이 피우므로 간략히 나마 좁은 소견을 펴 뒷사람들을 일깨우려 하니 이래도 교만심을 버리지 않는다면 생사윤회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출가한 사람이라면 발을 들어 세속을 뛰어넘어 몸과 마음을 그들과 달리해야 한다. 부처의 종자를 이어 융성하게 하고 마군을 항복 받아서 4은(四恩: 부모 스승 국가 시주의 은혜)에 보답하고 3계 중생을 제도해야 하니 만약 그렇지 못하면 사문의 대열에 끼어 든 자일뿐이다. 이들은 언행이 거칠고 상주시주물만 축내면서 옛사람들의 삶과는 조금도 닮아가지 않고 정신없이 일생을 보내니 장차 무엇을 의지하겠는가. 그러나 이제는 당당한 사문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지난 세상에 선근(善根)을 심어 이렇게 남다른 과보를 받은 것인데 여기서 부지런히 닦아 과보를 성취해야 한다. 어버이를 하직하고 결연한 마음으로 먹물 옷을 입은 것은 무엇을 뛰어넘으려 했던 것인가. 아침저녁으로 생각하면 어찌 마음 편하게 세월을 보내랴. 마음속으로 불법의 대들보가 될 것을 다짐하여 뒷날 본보기가 되게 하라. 설사 항상 이와 같이 한다해도 조금밖에 상응하지 못한다. 납자(衲子)는 말을 꺼내면 반드시 경전에 들어맞고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도 옛 것을 상고해야 하며 우뚝한 몸가짐과 고고한 기상을 가져야 한다. 먼길을 갈 때는 좋은 도반과 동행하여 자주자주 눈과 귀를 맑게 하고 머무를 때에도 반드시 도반을 가려 때때로 아직 듣지 못한 것을 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속서(俗書)에도 이르기를 "나를 낳아준 사람은 부모이고 나를 완성시켜 준 사람은 벗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덕 있는 자와 가까이 하면 이슬 속을 걷는 것처럼 비록 당장에 옷이 젖지 않아도 점점 촉촉하게 그 덕이 스며든다. 한편 악한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나쁜 지견(知見)을 길러서 아침저녁으로 악한 짓을 하며 가까이는 목전에서 과보를 받고 멀게는 죽은 뒤에 윤회 고를 받게 된다. 한번 사람의 몸을 잃으면 다시 인간 몸 받기 어렵다. 쓴 경책이 귀에는 거슬리나 어찌 마음에 새겨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음을 씻고 덕을 길러 자취와 명성을 숨기고 정신을 깨끗하게 길러 마음에 시끄러운 경계를 끊어야 한다. 만일 참선(參禪)으로 현묘(玄妙)한 도(道)에 이르려면 그 마음을 나루터에 두고 정밀하고 묘(妙)함을 끝까지 파고들어야 한다. 심오한 뜻을 결택하여 참 근원을 깨달아야 하며 선지식에게 널리 묻고 좋은 도반을 가까이 해야 한다. 묘(妙)한 도리(道理)는 깨닫기 어려우니 참으로 빈틈없이 마음을 써야 한다. 만일 그러던 중에 본심[正因]을 단박에 깨달으면 그대로 티끌세상과 수행점차[階級漸次]를 벗어나니 이것이 곧 3계 25유[3계에 있는 25종의 중생세계]를 타파하는 것이다. 안팎의 모든 법이 실제가 아니라 마음을 따라 변하여 일어난 것으로 모두가 거짓이니 그쪽으로 마음이 끄달리지 마라. 감정이 사물에 끄달리지만 않는다면 사물이 어찌 사람을 장애하랴. 법성(法性)을 흐르는 대로 맡겨둘 뿐, 끊으려 하지도 말고 이으려 하지도 말라. 소리를 듣고 물건을 볼 적에도 일상대로 하면 이쪽과 저쪽에 응용하되 조금도 모자라게 하지 말라. 이렇게 살아가면 실로 속절없이 법복(法服)만을 입은 것은 아닐 것이다. 나아가 4은(四恩)에 보답하고 3계 중생을 구제하며, 세세생생토록 도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끝내는 성불을 기약하리라. 3계의 손님으로 왕래하면서 나고 죽는 이들의 본보기가 될 것이다. 그 법(法)은 참선(參禪)이 가장 오묘하니 마음만 굳히면 그대를 속이는 말은 아닐 것이다. 단박에 생사를 초월하지 못할 중간부류라면 우선 교학(敎學)에 마음을 두어 경전을 반복해서 익혀야 한다. 이론을 치밀하게 연구하여 전해 주고 널리 펴서 뒷사람을 지도하여 부처님의 은덕에 보답해야지 그저 세월만 보내서는 아니 된다. 반드시 이와 같이 해 나갈 것 같으면 모든 일상이 납자 가운데서 법기(法器)가 될 만하다. 보지도 못하였느냐? 소나무에 감긴 칡넝쿨이 높이 솟아오르는 것은 훌륭한 바탕에 의지한 때문이다. 재(齋)와 계(戒)를 성실히 닦아서 부질없이 부족하거나 넘치게 하지 말라. 출가인이 된 것은 수승한 선업이 있기 때문이니 허송세월을 보내서는 아니 된다. 이행치 않으면 부딪치는 곳마다 걸리니 사람들에게 업신여김과 기만을 당한다. 옛사람은 말하기를 "그가 장부였다면 나도 대장부니 결코 자신을 가볍게 여기고 퇴굴해서는 안된다"라고 하였다. 만일 이렇지 못하면 부질없이 절집에 있으면서 일생을 그럭저럭 보낼 뿐 조금도 이익이 없을 것이다. 간절히 바라노니 맹렬한 뜻과 각별한 마음을 내어 상근기를 바라보고 처신할지언정 함부로 용렬하고 비속한 이들을 따르지 말라. 금생에 모름지기 결단하라. 생각해 보면 깨달음이란 다른 사람을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알음알이를 쉬고 반연을 잊어 모든 번뇌와 마주하지 말라. 마음은 빈 것이고 경계도 고요하건만 단지 오래 막혔기 때문에 통하지 못할 뿐이다. 이 글을 잘 읽고 수시로 자신을 경책하여 굳세게 주관을 세워 인정을 따르지 말라. 가벼이 업과(業果)에 끌리면 홀로 서기 어렵느니라. 목소리가 온화하면 메아리가 순조롭고, 모습이 반듯하면 그림자가 단정하다. 인과(因果)는 형상처럼 분명하기에 어찌 삶을 근심하고 두려워하지 않으랴. 경(經)에 이르기를 "인과를 남기면 영원한 세월이 지난다 해도 지은 업은 없어지지 않고 인연이 회합할 때 지은 과보를 다시 받는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삼도의 형벌[지옥, 아귀, 축생]이 사람을 얽어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열심히 닦고 부질없이 날을 보내지 말아라. 5욕[색 성 향 미 촉의 情欲] 생사(生死)가 허물과 병통임을 깊이 성찰하여 수행할 것을 권하며 백천겁토록 어디서나 다같이 도반되기를 바란다. 2. 상당법어(上堂法語) 위산 선사께서 상당(上堂)하여, "도를 닦는 사람은 곧고 좋아하거나 거짓과 싫어함이 없으며 허망한 마음도 없어야 한다. 듣고 보는 일상에 굽음이 없어야 하며 그렇다고 눈을 감거나 귀를 막지도 말아야 한다. 다만 마음이 경계에 끄달리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옛부터 모든 성인들은 단지 물든 세속사를 치유하는 측면에서 말씀하였을 뿐이다. 허다한 나쁜 지경과 망상 습기가 없으면 마음이 맑고 고요한 가을물살처럼 청정할 것이다. 맑고 잔잔하여 아무 할 일도 없고 막힐 것도 없으리니 그런 사람을 도인(道人)이라 부르기도 하고 일없는 사람[無事人]이라고도 한다. 그때 납자 왈, "단박 깨친 사람도 더 닦을 것이 있습니까?" 참으로 근본을 체득한 이라면 닦는다느니 닦을 것이 없다느니 하는 것이 관점을 달리하는 말[兩頭語]임을 깨닫는 그 순간 스스로 안다. 지금 처음 발심한 사람이 인연 따라 한 생각에 본래 이치를 깨달았으나 비롯함이 없는 여러 겁의 습기(濕氣)를 당장 없애지는 못하므로 그것을 깨끗이 없애기 위해서는 현재의 업과 의식의 흐름을 맑혀야 한다. 이러한 훈습(薰習)을 닦는다 하는 것이지 따로 닦게 하는 이치는 없다. 법을 듣고 진리를 깨치는데 깊고 묘한 진리를 들으면 마음이 저절로 밝아져서 미혹한 경계에 머무르지 않게 된다. 그렇긴 하나 백천가지의 묘한 이치로 세상을 휩쓴다 할지라도 결국 저자거리에 적응하는 도리를 체득해야 한다. 요약하면 진리의 경지에는 한 티끌도 받아들이지 않지만 만행(萬行)을 닦는 가운데서는 한 법(法)도 버리지 않는다. 몰록 깨달아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허망한 생각이 모두 녹아지면 참되고 항상함이 그대로 드러나고 진리(眞理)와 현실(現實)이 둘 아닌 여여한 부처를 이루느니라. -출처:상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