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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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roce (크로체)
날 짜 (Date): 2001년 1월  9일 화요일 오후 05시 06분 05초
제 목(Title): 神과 나, 윤회


神과 나 그리고 輪廻

 

1. 業因의 生成 

몸 있을 때 成住壞空 生住異滅하는 存在의 실상을 올바로 수용하지 못한 無明의 
정신인자는 무위법계에 사유하는 것만큼의 파장을 일으켜 낱낱이 그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대양의 파도가 갯바위에 주름살을 남기는 것과 같습니다.)

無明 즉, 어리석음은 사바세계의 제 형상이 개시 허망함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體[몸]를 가지고 있을 때는 눈, 귀, 코, 혀, 촉각신경과 
생각하는 기능 즉, 六根[六識]을 총 동원한 탐심을 일으킵니다. 이러한 소양의 
정신에너지가 '業'입니다.

2. 業의 윤회

"業"은 駐着을 한 만큼 薰習을 키우고 그 훈습의 因은 과보만큼의 緣을 따라 
유·무위법계를 윤회합니다.
'業 에너지'는 그 성향에 상응하는 각양각색의 생명체로 변모하게 되며 그 중에서 
특히 사유기능을 가진 인간은 자기 모습에 얼굴, 다리, 가슴, 손 등의 이름을 
붙이고 그 물건을 '나라는 존재'로 인식하게 됩니다. 훈습의 因이 두터울수록 
'나'를 지키려는 성향은 보다 강하게 나타납니다.

'業 에너지'는 이 사바세계가 제행무상(諸行無常)하고 제법무아(諸法無我)이며 
일체개고(一切皆苦)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업식은 이 세상이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여 제 형상에 나[我]를 고착시키려 합니다. 
이러한 業은 삶을 "총체적인 인식의 場"으로 보지 못하고 한 변에 치우친 
집착에너지로 굳어진 것이기에 또다시 윤회를 해야 될 習因을 남기게 됩니다.

'業 에너지'는 '나'라는 생명체로 이 세상에 나타난 후 수많은 궤적들을 그리면서 
다양한 양태로 변화시켜 갑니다. 그러다가 삶을 지탱하는 조건들이 다하게 
되면[생명 에너지의 소멸] '나'라고 주장하고 있던 '業 에너지'는 생명력과 이별을 
해야 합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인간 앞에는 일생을 살면서 스스로 지어온 業種에 따라 여러 
가지의 말기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즉 살아서 業을 완전히 정화시킨 사람은 業이 
남아있지 않는 "無生의 경지"를 깨달아 '무여열반의 세계'로 向할 준비를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생명력 있을 때 집착[無明]에 사로잡혀 지내면서 남긴 
業으로 말미암아 그에 상응하는 윤회 길로 들어서야 하는 운명 앞에 놓여지게 
됩니다. 이처럼 '業 에너지'가 각기 다른 모습의 세계로 옮겨가는 것을 불교에서는 
轉流라 합니다.

무명을 밝힌[깨달은] 사람은 습인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윤회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몸 있을 때 업습[無明]을 다 밝히지 못하면 업식의 과보만큼 또다시 
차등된 윤회 길을 헤매게 됩니다.

3. 神의 태동

내가 죽으면 地, 水, 火, 風의 기운을 빌어 조합된 이 몸은 흩어져 원래로 되돌려 
지고 이와 함께 육신에 의존하던 6근의 감각기능과 인식작용도 사라지게 됩니다. 
다만 생명 있음에 의존하여 지어놓은 '業因'은 공과에 따라 또 다른 생명체로 
탈바꿈하여 그 "業 에너지"를 이어갑니다.

六根에 의존하던 의식[業]은 '無爲의 세계[실상계: 中陰의 세계]'로 회귀합니다. 
이때 업인을 배태한 나[我]는 자율능력이 박탈되어진 주체로써 오직 업보에 의한 
因만을 간직하여 또다시 이 몸 받기 전의 中陰身[불교용어]또는 靈魂이 되어집니다.

四大를 잃어버린 이후에 드러나는 중음신[業因]은 대체로 살아있을 때보다 
기민성이 탁월합니다. 육근을 통제해야 할 일이 없어진 업인은 시공을 초월하여 
살았을 때의 훈습을 재현하려 합니다. 그러나 다음 몸 받기 전까지는 유위법계에 
그 모습을 나타낼 수 없으며 스스로는 작용도 할 수 없습니다.
[이 몸인 色身을 벗어난 깨달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中陰身은 생전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육신을 찾아 배회하지만 불태워졌거나 땅 
밑에서 썩어 가는 자기 육신을 바라보며 타는 듯한 괴로움만 느낄 뿐입니다. 
중음신은 자신의 의지를 의탁할 처소가 없습니다. 때로는 살아있을 때의 기억을 
따라 舟遊天河도 해보지만 그것은 메아리 없는 함성과 같기에 그럴 때마다 
중음신은 더욱 더 큰 허망함과 괴로움을 느껴야 하는 일 이외에는 별다른 묘수가 
없습니다.

하루살이 몸이라도 받기 전의 중음신은 사람으로 살 때 누리고 부린 빚을 갚기 
위하여 아수라, 아귀, 지옥 三惡道의 굴레를 돌아야만 합니다. 善因善果, 
惡因惡果의 과보는 보이지 않는 세계인 실상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 
존재의 근본 논리입니다. 三惡道를 거치면서 惡業을 소멸시킨 중음신은 살았을 때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신에너지이기에 業果에 따라 後生을 받게 됩니다. 그 
후생은 좋은 국토, 좋은 부모, 좋은 스승을 만나 해탈할 인연이 지어지든지 아니면 
천상에 태어나 놀고 즐기느라 깨달음을 얻을 수 없든지 아니면 축생으로 태어나 
온몸으로 업을 소멸시키는 고행의 나날을 보내어야 할 것입니다.

無明을 다 밝히면 後生은 자신이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올바른 수행자는 三惡道에 
떨어질 일은 없지만 한 순간 방심은 즉시 분별에 걸려 업인을 낳기 때문에 언제나 
一心으로 존재의 실상을 觀하는 지금의 수행력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4. 神의 역할

불교경전에서는 神은 인연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다는 단 한마디의 애매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오늘날의 불교가 엉뚱하게도 무슨 
영가천도니 업장 소멸이니 하는 귀신교 같은 해프닝을 벌이게 되는 빌미를 남기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깨달음이란 지혜의 힘이며 지혜는 업식으로부터의 해방과 비례하는 
정신에너지입니다. 大覺을 성취한 초조께서 神의 작용에 대해서 모호한 표현을 한 
것은 불교가 태동하던 인도의 시대상황을 고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온 천지에 갖가지 신을 섬기는 무리밖에 없는 상황에서 알아서 
해석하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던 석존의 심중이 이해될 만한 표현입니다.


神은 전지전능하다는 무슨 神이 만들어낸 것이 아닌 '業' 즉, 나의 육근(六根)에 
묶여진 육식(六識)이 밖으로 생각을 내면서 들락거린 탐심의 결정체입니다. 
사람들이 무릎 꿇어 빌고 구하는 神은 그것이 하나님이라고 불리어 지든 아니면 
무슨 대왕이라 하든 그것은 모두 전생에 깨닫지 못한 정신에너지의 집합체인 
중음신입니다. 

미혹한 사람들이 절대성을 부여하는 그 神들이 아직도 神으로 남아 있다면 그것은 
전생에 그들이 지은 業이 너무도 무겁고 질겨 그 죄업을 녹여야 할 찌꺼기가 아직 
남아 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지은 업습도 아직 다 해결하지 못해 
중음신의 모습으로 머물고 있는 習因의 化身인 神에게서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무엇을 배우고 구할 것이 있겠습니까? 神 입장에서 보면 그는 몸 있을 때 지은 
무거운 업으로 말미암아 아직 神으로 남아있는 것도 통탄할 노릇인데 못난 
인간들이 반 토막에도 못 미치는 습 에너지의 결집체인 나에게 매달려 밤낮으로 
불러 재끼니 神이라 일컬어지는 나는 그 몹쓸 絆緣때문에 "다음으로 윤회하기조차 
어려운 처지에 몰려있다"라고 하소연할 것입니다.

神은 業의 피조물이며 무위법계에 작용하는 집착 에너지의 흐름현상이기에 덜된 
인간이 부르면 그와 함께 한 지붕 두 가족 세 가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로 
인하여 神은 인간에 의존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금강경 제32품)

모든 有爲法界[형상계]는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아침 이슬과 
같고, 번갯불과 같으니 마땅히 수행자는 이와 같이 觀할 지어다.

신은 아뢰야식이라고 불려지는 기억의 창고인 제8식에 갈무리 되어있던 
습인입니다. 제 8식은 삶의 경험들을 컴퓨터와 같이 고스란히 저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저장된 낱낱의 경험들은 유기적인 생명활동을 지어 가는 業種子로 작용하게 
됩니다. 중생들의 일상은 대다수 욕심, 성냄, 삿된 의심 같은 번뇌가 
대부분입니다. 결코 정상적일 수 없는 중생의 '業 에너지'는 대다수 因子가 어둡고 
무거운 것이기에 根이 남아 윤회의 단초가 됩니다. 

第八識[業]은 내생에 가장 먼저 육신 속으로 들어가 주인 자리를 확보하며 죽을 
때는 마지막으로 몸을 떠납니다. 맑아야 될 정신창고 안에 무단 입주하는 습인인 
제8식에서 터져 나오는 제 현상들을 실재하는 것으로 인식할 때 삶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 빠지게 됩니다. 허구인 신을 숭배하고 삶과 죽음까지도 창조신의 
조화로 여기는 어처구니없는 행위는 제8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법구경의 쌍서품에 석가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모든 일의 근본이 된다. 마음이 주가되어 모든 일을 시키나니 마음속에 
착한 일 생각하면 그 말과 행동도 또한 그러하리라 그 때문에 즐거움이 그를 
따르리, 마치 형체를 따르는 그림자처럼.

5. 神과 參 禪

흔히 말하는 정신은 그것이 통째로 윤회하지 않습니다. 사유하는 의식 중 윤회하는 
요소는 생명력이 있을 때 오감 기능에 맛을 들여 내려놓지 못한 즉 객관화가 덜된 
의식 덩어리와 과거 생각과 미래 생각에 매달려 연연하는 분별심이 육도 윤회를 
하게 됩니다. 그것은 인간으로 살면서 보고 듣고 맛본 것을 제8식의 창고 안에 
차곡차곡 쌓아 둔 習因으로서 인연 따라 여러 모습으로 전류합니다.

이때 전류하게 되는 "업 에너지"는 중음신으로 아니면 三惡道의 형벌에 처하게 
됩니다. 그것은 인간일 때 제대로 닦지 못하던 불쌍한 훈습 덩이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근자 무슨 神을 빌미로 별스런 종교 단체가 우후죽순처럼 탄생하였고 그들은 
스스로 무슨 神의 종이라고 말하고 다녀도 전혀 부끄러움을 느낄 줄 모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업식 종자인 神과의 종속관계로 전락한 나약한 무리도 나름대로의 
파장력이 있는 에너지[神氣]입니다. 이처럼 주객이 뒤바뀐 음기가 도처에 창궐하면 
세상의 질이 척박해 집니다. 
제 현상은 급변하는 물질계에 비례하여 낙후한 정신 사조의 말기 증상이며 또 
한편으로는 시대에 부응할 새로운 정신철학이 태동할 전조이기도 합니다.

올바른 수행자는 제 현상들을 무시하거나 멀리하지 않습니다. 禪 수행자는 그것이 
무엇이든 恒常하는 실체가 없음을 분명히 인식하기에 스스로 어쩔 수 없어 
직·간접으로 밖으로 드러나는 유·무위법계의 習因을 계도하여 그들이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발원합니다.

慈悲와 放生은 올바른 힘을 갖춘 자가할 수 있는 최상의 덕목이기에 참 선 
수행자는 스스로 가지 못하는 業識 종자를 길바닥에 그대로 방치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은 옛사람 어록이나 신비스러움과 동거하지 않습니다.

긴 인류역사에서 아무도 들추어내지 못하는 神을 직관함은 그것이 무엇이든 
緣起하는 존재의 실상에 불과함을 올바로 이해할 때 어리석음[無明]에서 벗어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6. 오늘의 Key Word

體를 가진 '業 에너지'가 본연의 업을 지어 가는데 一念이 된다면 그것은 분명한 
'나의 모습'이며, 體를 가지고서도 망념이 그를 지배하도록 수수방관한다면 본질이 
허(虛)한 것이기에 흔히 神이라 일컬어지는 타력에너지의 지배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출처: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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