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roce (크로체) 날 짜 (Date): 2001년 1월 9일 화요일 오후 05시 00분 11초 제 목(Title): 백장어록 해제 古鏡 百丈語錄 총론을 註解하여 海雲臺 禪院에 비추인다. 회해(懷海)백장선사(百丈禪師 唐. 720∼814)는 중국 복주 장락 사람으로서 강남성 남창부의 백장산(百丈山)에 살았다. 마조 도일(709∼788). 남전 보원(748∼843) 등과 비슷한 연대의 禪僧으로서 고상하고 절도 있는 수행을 지어간 분이다. 세수 90에도 울력에는 항상 앞장서기에 소임자가 민망하여 연장을 숨기고 쉬기를 청하니 내가 아무런 덕(德)도 없는데 어찌 남들만 수고롭게 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日一不作 日一不食"이라는 일화를 남겼다. 百丈錄(백장록)은 가장 오래된 선종사서(禪宗史書)로써 모두 20권으로 되어 있으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해인사에만 있다. 952년 천주(泉州) 초경사에서 정(靜)과 균(筠)스님에 의해 편집되었고 그 후 고려 고종 32년(1245) 10권인 것을 목차 등을 넣어 20권으로 엮었다는 기록이 있다. 二乘의 道[無色界] 이승(二乘)은 탐욕과 성내는 병통을 다 쉬어버렸으나 탐내는 마음이 없어진 경계에 눌러앉아 옳다고 여기니 이는 무색계(無色界)이다. 그러나 이것은 부처님의 광명을 가리고 부처님 몸에 피를 내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수행자에게는 선정을 닦고 지혜를 배우게 해야 하며 깨끗하고 더러움을 구별해 주어야 한다. 더러운 법이란 탐욕·성냄·애착 등을 말하며 깨끗한 법이란 보리·열반·해탈·등으로 불리어진다. 왜냐하면 불조(佛祖)의 가르침은 초선(初善) 중선(中善) 후선(後善)의 세 구절도 초월하기 때문이다. 초선(初善)은 범부와 성인, 색·소리·냄새·맛·촉감·생각과 세간과 출세간법에 티끌만큼의 애착도 가지지 않는다. 이미 애착하지 않게 되면 그 애착하지 않음에 생각이 눌러앉아 그것만을 옳다고 여기는데 이것을 일컬어 초선(初善)이라 한다. 이것은 조복된 마음 [調伏心]에 스스로 안주하는 것이며, 강을 건넌 자가 타고 온 뗏목이 아까워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성문(聲聞)으로서 이승(二乘)의 도(道)에 지나지 않으며 선나과(禪那果)이다. 중선(中善)은 애착하지도 않고 애착하지 않는 마음에 눌러앉지도 않는다. 이러한 경계는 반자교(半字敎)로서 아직은 무색계(無色界)에 속하나 이승과 마군의 도에 떨어짐은 면한다. 그러나 선병(禪病)과 보살 행에 끄달림이 있다. 후선(後善)은 애착하지 않음에 눌러 앉지도 않고 눌러앉지 않는다는 생각마저도 내지 않는다. 이것은 만자교(滿字敎)로서 무색계(無色界)에 떨어짐을 면하고 선을 닦는 병통에 떨어짐을 면하며 보살승에 떨어짐을 면하고 마왕의 지위에 떨어짐을 면한다. 그러나 지혜[智]에 막히고 지위[地]에 막히고 행(行)에 막혀 자기 불성(佛性)을 보는데는 마치 캄캄한 밤중에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 불지(佛地)는 미세소지우(微細所知愚)와 극미세소지우(極微細所知愚)의 두 가지 어리석음[二愚]도 벗어난다. 그러므로 큰 지혜는 미진(微塵)을 타파하여 경전[經卷]을 벗어난다. 3구(三句: 三善)를 꿰뚫어 세 단계에 매이지 않는다면 교학[敎家]에서는 그것을 세 번 뛰어 그물에 벗어난 사슴에 비유하며 번뇌를 벗어난 부처라고 하는데 그를 구속할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이는 연등불(然燈佛) 이후의 부처님에 속하며 최상승(最上乘), 상상지(上上智)로서 불도(佛道) 위에 오른 것이다. 이 사람은 불성을 가졌으며 스승[導師]으로서 걸림없는 지혜를 구사한다. 그는 차츰 인과와 복덕 지혜를 자재하게 굴리니 수레를 만들어 인과를 실어 나르며 삶에 묶이지 않고 죽음에 이르러도 죽음에 매이지 않으며 5음(五陰)에 처하여도 문이 여닫히듯 행장이 자유롭다.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지위와 우열을 논할 것이 없으며 일상이 불가사의한 정토인 것이다. 부처다 보살이다 하는 것도 부스럼을 만드는 일이며, 있다 없다는 식으로 법을 설명하면 긁어 부스럼을 덧나게 만드는 행이다. 일체법은 모두 유·무에 포함되기에 수행력을 구분 지어놓은 십지보살(十地菩薩)은 탁류(濁流)가 되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은 청류(淸流)가 된다. 지난날 10대제자 사리불·부루나·바른 믿음을 가진 아난·삿된 믿음을 가진 선성 등은 저마다 본보기나 법칙이 있었는데 모두들 부처님에게 설파 당했다. 그들은 팔만겁을 선정에 머무는 사선팔정(四禪八定)의 아라한은 아니었으나 행할 바를 의지하고 정법(淨法)에 집착하는 술(術)에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성문인(聲聞人)이 불법을 들으면 위없는 도를 행할 마음을 내지 못하고 오히려 선근(善根)을 끊는 사람이 되는데 경전[敎]에서는 이를 "해탈이라는 깊은 구덩이는 두려워할 만한 곳이다"라고 하였다. 부처라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한다. 부처란 중생편에서 쓰는 약이니 병이 없으면 먹을 필요가 없다. 약과 병이 없어지면 맑은 물과 같다. 스스로 알고 절로 깨닫는 이것이 자기 부처인줄 알지 못하고 밖으로 부처를 찾는다. 선지식의 설법을 의지하여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는 것이 술술 나오게 하는 약을 지어 구하여 밖으로 치달리던 병통을 치료한다. 이윽고 구하여 밖으로 치달리던 병이 낳으면 약은 버려야 한다. 또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는데 집착한다면 그것은 선병(禪病)이며 영락없는 성문이다. 이러한 수행력은 마치 물이 얼음이 되면 얼음 자체가 물이긴 하나 목마름을 풀어주기 어려운 것과도 같다. 이런 경우는 스스로 묶인 병통이기에 세상 그 어떤 의원도 약 처방이 없는 속수무책에 놓여지게 된다. 선지식은 있음[有]에 집착하지 않고 없음[無]에서 집착하지 않아서 십구(十句) 마군의 말[분별상]을 벗어나 있기에 말을 꺼내도 사람을 얽어매지 않는다. 그는 설법을 해도 스승이라 자칭하지 않고 말뜻이 골짜기를 가득 채우는 메아리 같아 허물이 없다. 만일 "나는 설법할 수 있다"라든가 "나는 스승이고 너는 제자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을 마군이다. 또 눈빛 부딪치는 곳에 도가 있다"라든지 부처는 부처가 아니다라고 한다든지 또는 보리·열반·해탈 등등을 열거하면서 근거 없는 말을 한다. 또한 알음알이를 근거 없이 설명하며 한 손가락을 들고 세우고 "이것이 선(禪)이고 도(道)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사람을 얽어매는 것으로 수행자에게 결박만 더하게 하는데 이런 자는 말을 하지 아니해도 구업(口業)을 짓는 것과 같기에 마음마저도 스승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평등한 진여법계(眞如法界)는 부처도 없고 그러기에 중생을 제도하지도 않는다. 싹을 보고 토질을 알아내듯 주·객관이 분명하며, 세간 출세간 법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나 중생의 분별하는 성품은 한번도 부처님의 단계를 밟은 적이 없기 때문에 시시때때로 모든 법에 끈끈하게 집착한다. 그들은 잠깐 묘한 이치를 맛보아도 약이 되지 못하며 잠깐 틀을 벗어난 도리를 들어도 믿음을 가지지 못한다. 이렇기 때문에 깨친 후에는 중생을 위한 설법에 깊은 고뇌를 하게 된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일에 휘말리지 않으려거든 상대적인 개념을 끊기만 하면 된다. 분별에서 해방되면 어떠한 테두리도 그를 매어두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는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며 가깝지도 멀지도 않다. 높낮이와 평등도 없으며 가고 옴도 없다. 방편을 떠나 마음에 조금이라도 알음알이를 낼 틈을 준다면 또다시 테두리에 매이게 된다. 아직 깨닫지 못했을 때를 탐진(貪瞋)이라 하고, 깨닫고 나면 부처님의 지혜다라고 한다. 깨달음을 얻은 다음은 깨달음 얻기 전의 사람과 달라진 것이 아니라 깨닫기 이전의 생각과 행동이 다를 뿐이다. 한 생각 생각이 유·무 등 모든 법에 매이지 않는다면 예나 지금이나 부처가 사람이고 사람이 부처일 뿐이다. 이것이 삼매정(三昧定)이기도 하니 정(定)을 가지고 정에 들어갈 필요가 없고, 선(禪)을 가지고 선을 생각할 필요가 없으며, 부처를 가지고 부처를 찾을 필요가 없다. 일색(一色)이 일진(一塵)이고 일불(一佛)이 일색(一色)이며, 일체불(一切佛)이 일체색(一切色)이고, 일체진(一切塵)이 곧 일체불(一切佛)이다. 또한 색·성·향·미·촉·법도 이처럼 낱낱이 모든 세계에 두루 가득한 이치를 통달한 것이 삼매정(三昧定)임을 요해(了解)하는 것으로 백장(百丈)의 장서(藏書)를 해제(解題)하였다. -출처:상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