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5년08월09일(수) 13시44분37초 KDT 제 목(Title): 반야심경 11 11.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그러므로 절대생명인 나의 참다운 무한생명속에 육신이란 한계는 없으며 느낌.생각.의지.분별심이란 한계가 설정되지 않음이라... 1) 공중무색 우리의 생명은 무제한의 생명이고 절대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오온 즉 육신과 정신작용이란 한계성속에서 규정하였습니다. 반야바라밀다에 의하여 그 한계성속에서의 몸부림을 포기하니 무한광명이 본래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의 육신이란 것이 "나"인 줄 알았더니 육신은 단지 "참 나"의 생명현상에 불과합니다. "나의 진실 생명"은 육신이란 테두리로 도저히 한정할 수도 없고 한정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이란 것은 "나의 진실 생명"이 소유한 나의 소유물이지 그것이 "나"를 지칭할 수 없음을 압니다. 끝없이 변하여 소멸되는 육신과 상관없이 변화의 주체인 "참다운 나"는 육신의 변화 이전에 주체로서 실답게 그냥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냥 그렇게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소유한 변하는 육신에 구속되어서 그 육신을 나라고 생각하면서 고통과 번민과 다툼속을 삽니다. 2) 무수상행식 정신현상인 느낌.생각.의지.분별심이란 것을 "나"라고 착각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도 그냥 "스스로의 진실된 나"가 소유한 소유물입니다. 우리는 소유한 것에 의하여 거꾸로 규정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서 "내가 옳다","너는 그르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옳고 그름 이전에 있는 생명을 망각합니다. 우리의 정신현상들 순간 순간 변하는 정신현상이거나 분별심처럼 비교적 장시간의 습관과 지적인 쌓임에 의하여 형성된 것 조차도 우리의 생명 그 자체를 규정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들이 순간 순간 소유한 정신의 현상에 소유당하여 "나의 생명 가치"를 왜소하게 만드는 어리섞음을 반복하는 삶을 삽니다. 부처님의 절대생명인 나의 참생명은 육신과 정신이란 생명현상의 주인공이므로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데 생명의 가치를 육신과 정신으로 한정한 그 순간 부터 우리의 생명가치는 스스로 제약되어 참으로 가치있는 인생살이를 왜곡과 질곡속에 오염시키고 맙니다. 3) 육신을 나라고 착각하는 연장선 속의 수행 앉아서 호흡을 가다듬고 호흡을 바라보는 수행은 육신을 나라고 착각하는 연장선속의 계속적인 확장으로 자신의 생명을 갈 수록 위축시킵니다. 이렇게 어떤 육신적인 방법에 의미를 부여하는 수행은 모두 대승의 수행이 아니고 그냥 외도입니다. 이런 외도 행법을 하는 경우에는 숫자노름을 자신의 가치로 착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참선을 십년간 했느니 또는 수식관을 몇년씩해서 어떤 현상을 경험했느니 수행의 단계에 어디쯤에 있느니 하면서 최악의 거짓의 허구세계에 빠집니다. 이런 행법은 하루 하면 하루 만큼 거짓의 세계로 가고 일년 하면 일년 만큼 거짓의 세계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겉은 도인이고 속은 부패되어 있는 사람이 됩니다. 4) 정신을 나라고 착각하는 연장선 속의 수행 지적으로 교학을 추구하고 가정을 세워서 논리에 의하여 짐짓 자신이 불법을 이해하여 깨달았다고 말하는 것은 계속적으로 정신을 나라고 착각한 연장선에서의 수행입니다. 이런 수행은 실존의 문제에 대하여 전혀 대응할 수 없는 것이기에 무의미하고 허망함의 극치일 뿐입니다. 또한 정신현상을 이용하여 자신의 육신을 학대하는 백골관같은 위빠사나 수행 역시 정신을 나라고 착각한 연장선에서의 수행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념을 본다고 말하는 위빠사나 역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는 정신현상을 "나"라고 여전히 착각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거짓의 세계입니다. 모두 외도 행법입니다. 이런 수행도 하루 하면 하루 만큼 거짓의 세계로 일년하면 일년만큼 거짓의 세계로 자신을 인도합니다. 겉은 성자이고 속은 썩어서 곪은 사람이 됩니다. 거짓과 가상의 세계에서 보았다는 진실은 그냥 거짓입니다. 5) 믿음과 나무아미타불 이런 거짓된 행법이 아닌 참으로 대승의 수행은 반야바라밀다에 바탕한 수행입니다. 오온으로 설정된 거짓된 나의 수행을 멈추고 본래 부처님의 무한광명에 의지하는 수행이 대승의 수행입니다. 거짓된 나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오온의 주인인 원래의 절대무한의 나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상대유한의 나밖에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인식의 근본을 깰 수 있는 방법은 믿음외에는 없습니다. 아님 극단으로 자신을 학대하였다가 완전한 절망에 빠지는 방법이 있습니다. 즉 부처님이 6년 고행한 그 과정을 하나씩 힘내서 하는 겁니다. 아마도 평생해도 다 못하고 평생 거짓에 뒤덮힌 인생살이로 마감할 것입니다. 즉 나의 진실생명인 부처님을 지금 오온의 한계선상에서는 알지 못하지만 분명히 있음을 절대로 믿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이 없이 참선을 하거나 교학을 해서 깨쳤다고 하는 분들도 간혹 있습니다만 그것은 깨침이 아니라 그냥 자기의 한계적 연장선 속에서의 이해수준인 것이고 오온에 소유당한 상태에 불과합니다. 이런 분들은 간단한 실존적 문제만 닦쳐도 회피하고 합리화하는 수준에서의 위선을 떨 수 밖에 없습니다. 나의 진실생명인 부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6년 고행끝에 느낀 완전절망과 동일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상대적인 오온의 거짓세계가 타파됩니다. 이 믿음에 근거해서 절대무한의 삶을 실현해 나가는 것이 "나무아미타불"입니다. 믿음이 없이 뭔가를 해보겠다는 것은 거짓된 자기을 계속 인정하는 거짓의 증폭만을 결과로써 가져옵니다. 나무아미타불입니다. 부처님의 절대력을 믿고 나무아미타불하여야 합니다. 6) 소승과 대승 소승과 대승을 사회적인 봉사 수준에서 규정할려고 하는 학자분들이나 학승들로 인하여 소승과 대승이 왜곡되고 있습니다. 소승은 버리는 것을 특징으로 합니다. 대승은 하나도 버리지 않는 것을 특징으로 합니다. 버리는 것은 부처님의 6년 고행에 기반합니다. 하나도 버리지 않는 것은 부처님의 성도 이후에 기반합니다. 버리는 불교는 부처님이 외도라고 실랄하게 비판한 6년 고행을 비판한 것인지도 모르고 긍정한 무리들이 하는 외도입니다. 부처님이 바라문을 통열히 비판한 내용을 제대로 모르고 바라문화되고 성직화된 것이 소승이라고 말해지는 상좌부불교입니다. 거짓된 성직자 혹은 봉사자의 모습을 취한 무리들이 자신의 모습을 가장한 것이 소승의 승가입니다. 대승경전에는 온갖 우리들의 삶의 모습과 관념의 모습이 다 나옵니다. 그것을 하나도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현상은 거의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모습으로 나오는데 그 모습 하나도 버리지 않기에 언뜻 보면 황당하고 시대에 맞지 않는 경전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도 버리지 않으면서 대승경전은 오직 진실을 꿰뚫어 말하고 있지 거짓의 세계속에서 말하고 있지않기에 거짓의 세계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것처럼 보일뿐입니다. 거짓의 세계에서 이해되기 쉬운 가르침이 진실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승경전을 믿어야 합니다. 만일 대승경전을 보아서 머리로 따져서 그렇겠지 이해하는 수준이라면 대승경전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어떻게 진리라는 것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거짓된 나에게 맞추어 질 수 있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