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5년08월08일(화) 09시21분40초 KDT 제 목(Title): 반야심경 10 10.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사리자야! 이러한 모든 현상적인 모습으로 드러나는 실제하는 부처님의 절대생명은 태어남이 있지 아니하고 사라짐도 있지 아니하고 더러움이 있지 아니하고 깨끗함도 있지 아니하고 더할 것도 없고 감할 것도 없나니... 1) 시제법공상 사리불 존자가 알고 있던 오온법의 세계, 즉 색수상행식으로 설명되고 이해되었던 세계관, 나의 육체, 나의 정신이 항상치 않기에 "나" 역시 항상치 않다는 오온법의 세계속에서 자신을 규정했던 사리불 존자에게 부처님께서는 그 오온이라는 생명현상으로 설정된 "허망한 나"의 이면에 실제하고 있는 것은 절대무한의 부처님의 생명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부처님의 절대무한 생명이 곧 "나"의 실상이지 항상치 않고 변하는 "오온"이 나의 실상이 아님을 말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실제 우리의 육체와 우리의 정신이라는 것으로 보이는 모든 주관적 현상들과 우리의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객관의 모든 현상들 사이 사이 마다 가상으로 있지 아니하고 실제로 있는 절대무한의 부처님의 성품을 지적하여 "시제법공상"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2) 불생불멸 그렇게 모든 현상의 세계, 즉 상대유한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세계이라도 그 이면의 실상을 보면 거기에는 생멸이 없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생명의 현상을 보면 지금 그것이 새로 만들어졌다. 혹은 태어났다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기"라는 모습을 보고서 "아기"가 새로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기"라는 생명의 현상이 있다고 생명이 새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기"라는 모습을 있게한 힘은 아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은 절대무한으로 그대로 있는 것이고 현상적인 모습이 "아기"라는 모습이고 "아기"라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나"라고 말할 때에 "나"는 현상을 지칭하면서 "나"라고 고집합니다. 그 현상의 이면에 있는 "참다운 나"를 두고 "나"라고 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언제 태어났다" 혹은 "내가 언제 죽는다"등의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상속의 나"가 나오기전에 이미 스스로의 생명으로서의 "참다운 나"는 존재합니다. 가상속의 나가 태어나기 전에 "나의 참다운 생명"은 태어남이나 죽음과 관계없이 그대로 있습니다. 가상속의 나란 것은 "참다운 나"가 그 순간 선택해서 보인 현상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만든 현상을 두고 그것을 "나"라고 하고 "너"라고 하고 있을 뿐이지 본래 "참다운 나"는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습니다. "불생불멸"입니다. 3) 불구부정 사바의 세계는 고통이 넘치고 더러움의 세계이고 정토는 즐거움만 있고 깨끗함만 있는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윤회의 세계는 온통 괴로움과 다툼의 세계이고 열반의 세계는 평화와 다툼이 사라진 세계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사바와 정토, 윤회와 열반에 대한 의미매김입니다. 그렇지만 사바세계와 사바세계에 대응하는 정토, 윤회와 윤회에 대별되는 열반이라는 것 그 모두는 사실 우리들의 상대적인 생명관속에서 규정됩니다. 우리들의 진실생명에는 윤회도 없고 열반도 없고 사바세계도 없고 정토세계도 없습니다. 절대무한에는 그러한 상대적인 세계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현상적인 모습 이전에 생명 그 자체는 그냥 스스로 그렇게 항상합니다. 더러움이나 깨끗함이 아닌 실답게 그냥 있습니다. "나의 진실생명"은 더러움으로 물들을 수도 없고 깨끗함으로 치장될 수 없습니다. 저것은 더러운 것이야라고 할 때의 "더러움"이란 이름과 이것은 깨끗한 것이야라고 할 때의 "깨끗함"이란 우리 스스로 붙힌 이름이 그때 그때 존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름을 실제로 착각합니다만 이름을 붙힌 스스로의 우리 생명 거기에는 더러움이나 깨끗함이 없습니다. 이름에 의하여 규정될 수 없습니다. "불구부정"입니다. 4) 부증불감 우리는 우리 생명을 아주 작고 못나게 규정하고서 부족함을 채우려고 닦치는데로 소유하고 수행이라는 것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수행을 한다기 보다는 수행을 소유해서 다시 수행에 의하여 우리를 더 좁게 규정한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한 것입니다. 수행이란 것을 소유하여서 못나다고 규정해서 스스로 부족하다고 인정하고서 수행이라는 어떤 것을 집어넣어서 만족을 찾으려고 하는 아귀(목은 가늘고 몸뚱이는 엄청 커서 항상 탐욕에 굶주린 귀신)의 전형적인 모습이 우리들이 말하는 수행입니다. 그러니 갈 수록 더욱 자신의 생명가치를 좁고 더 좁게 만들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절대무한 생명인 "참 나"는 부족함이란 것이 있을 수가 없는 생명입니다. 원래의 "나"라는 것이 조금도 부족함이란 것이 있지 아니하다는 것을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다를 통하여 알려주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반야바라밀다를 하면 되는 것이지 굳이 수행이라는 어떤 틀을 소유하고 소유당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현상적으로 뭔가 하나 늘어난 것 같지만 생명 그 자체에는 늘어난 것이 없습니다. 현상적으로 뭔가 하나 줄어든 것 같지만 생명 그 자체에는 줄어들었음이 없습니다. 그저 완전성취의 세계 모든것이 본래 완전함 그것이 "참 나"입니다. "부증불감"입니다. 5) 나무아미타불 본래 불생불멸인 우리가 생사에서 해탈하겠다고 죽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부처님 말씀에 의하면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본래 불구부정인 우리가 더러운 사바세계에서 깨끗한 정토세계에 태어나겠다는 것이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본래 부증불감인 우리가 수행을 해서 못난 상태를 잘난 상태로 만들겠다는 것이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족하고 불안함속에 삽니다. 이렇게 부족하고 불안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불법을 듣고 수행을 한다고 하는데 그 수행 또는 신행이란 것이 부족함을 가지고 완전함을 추구한다고 하면 반야심경의 가르침에 빚대어 평생해도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족함이 노력해서 완전함 되는 수행은 불교가 아니라 외도입니다. 부족함으로 완전함을 추구하는 수행의 모습이 "집중"의 강요입니다. 대승불교의 수행은 집중이 아닙니다. 부족함으로 완전함을 추구하는 또 다른 수행의 모습이 "주시"의 강요입니다. 대승불교의 수행은 주시가 아닙니다. 집중과 주시는 삼매라는 또하나의 상대적인 소유물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니 이것은 여전히 상대적인 세계입니다. 상대적으로 아무리 최상의 삼매라도 그것은 이름이 최상의 삼매일뿐 오히려 허망함으로 최고일 뿐입니다. 본바탕이 절대무한이기에 그 절대무한에서 나오는 삶이 대승의 수행입니다. 여기에서는 수행이라는 말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래 절대인데 절대가 수행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그냥 "나무아미타불"입니다. 내가 오온에 의하여 스스로 규정되었거나 말거나 관계없이 원래가 절대무한이기에 "나는 절대무한"이구나 하고 선언하고 절대무한에서 나오는 무한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대승의 수행인 "나무아미타불"입니다. 절대무한을 살기에 아무리 소유해도 소유한 것에 의하여 규정당할 수 없고 하나도 소유하지 않아도 본래 무한하기에 넉넉한 삶이 대승의 삶입니다. 이렇게 매일 "나무아미타불"로 스스로 제약시켰던 원래의 최상의 내 생명가치를 절대무한에 의하여 회복하면서 강박관념이나 규정됨이란 어둠속에 반야광명을 들이대고 활달자재하게 사는 "삶"이 대승의 삶이고 "나무아미타불"입니다. 부처님이 6년 고행의 어둠을 "나무아미타불"의 반야광명으로 없애고 평생 "나무아미타불"의 무량광명으로 사신 것이 또한 "나무아미타불"입니다. 그러니 이 최상의 법문인 "나무아미타불"은 절대에서 나오는 법문이기에 지금도 끝없이 부처님의 입을 통하여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