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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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wwww (DD15러셀)
날 짜 (Date): 2000년 11월 16일 목요일 오후 02시 23분 46초
제 목(Title): 황벽 희운선사 전심법요


황벽(黃蘗) 희운(希運) 선사 전심법요(傳心法要)


                                                하동(河東) 배휴(裵休) 엮음

 

대선사(大禪師)가 있었으니, 이름은 희운이요, 홍주(洪州)의 고안현 황벽산 축봉 
밑에 살았다. 조계 6조의 적손(嫡孫)이요, 백장의 제자이며, 서당(西堂)의 
조카로서 최상승인 문자를 여읜 심인(心印)을 홀로 지니고, 오직 한 마음만을 전할 
뿐, 딴 법이 없었다.
마음의 본체는 공하여서 만 가지 인연이 모두 공적하니, 마치 둥근 해가 허공에 
솟아 비치는 것이 고요하여 가는 티끌도 없는 것 같다. 증득한 것은 신구(新舊)도 
심천(深淺)도 없고, 말하는 것은 이치도 견해도 세우지 않고 종주(宗主, 주장)도 
세우지 않고, 문호도 열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어서 생각을 움직이면 곧 어긋난다. 
그러한 후에야 본래의 부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간결하고 그 
이치는 곧고, 그 도는 높고, 그 행은 고고했다. 사방의 학자들이 산을 바라보고 
모여들어 모습만을 보고 깨달았으니, 왕래한 무리들이 항상 일천여 명이었다.
내가 회창(會昌) 2년에 종릉(鐘陵)을 다스리러 나왔다가 산에서 고을로 모셔서 
용흥사(龍興寺)에 묵으시게 하고 조석으로 도를 물었고, 대중(大中) 2년에는 
완릉(宛陵)을 다스리러 나왔다가 다시 임지로 모셔다가 개원사(開元寺)에 계시게 
하고 조석으로 도를 묻고 돌아와서 적으려 하면 열에서 하나나 둘 정도를 기억해서 
심인(心印)이라 여겼으나 감히 드날리지 못했다.
이제 신기하고 정묘한 뜻이 미래까지 전해지지 못할까 걱정하다가 끝내 끌어내어 
그의 문하의 제자인 태주와 법건에게 주어 옛 산인 광당사(廣唐寺)에 돌아가서 
장로 스님들에게 지난 날에 항상 듣던 법문과 같은지 다른지를 가려 달라 하였다.
당의 대중 11년 10월 8일에 삼가 기록한다.

 

○ 여러 부처님과 온갖 중생은 오직 일심(一心)뿐이요, 딴 법이 없다. 이 마음은 
비롯함이 없는 옛적부터 나지도 멸하지도 않고, 푸르지도 누르지도 않고 형상도 
모습도 없고, 있고 없음에도 속하지 않고 새것과 옛것에도 속하지 않고, 길고 짧고 
크고 작음도 아니어서 온갖 한량과 이름과 자취와 상대를 초월하여 본체 그대로가 
바로 옳다.
생각을 움직이면 곧 어긋나니 마치 허공과 같아서, 밖이 없어 헤아릴 수 없다. 
오직 이 일심이 곧 부처이어서 부처와 중생은 조금도 차이가 없건만 중생들이 
형상에 집착되어 밖으로 구하므로 더욱 잃을 뿐이니, 부처를 가지고 부처를 찾고, 
마음으로 마음을 잡으려 하면 이 겁이 다하여도 얻지 못한다. 망상분별을 쉬면 
부처가 저절로 나타나는 것을 모르는구나.

 

○ 이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중생이요, 중생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마음이니, 중생일 때에도 이 마음이 줄지 않고, 부처일 때에도 이 마음이 늘지 
않는다. 그리하여 육도 만행에 이르기까지 항하사같이 많은 공덕이 본래부터 
구족하여서 닦아 더할 필요가 없다. 인연을 만나면 베풀고 인연이 쉬면 고요하니, 
만일 이 일을 결정적으로 믿지 않고 형상에 집착하여 수행하면서 공용(功用)을 
구하면 모두가 망상이어서 도와는 아주 멀어진다.
이 마음이 곧 부처다. 다시 딴 부처가 없고, 딴 마음도 있지 않다. 이 마음은 맑고 
밝아서 마치 허공과 같으니, 한 점의 형상도 없다. 마음을 일으키거나 생각을 
움직이면 즉시에 법체에 어긋나는 것이어서 형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집착할 형상 없는 것이 부처다.
육도 만행을 닦아서 부처됨을 구하는 것이 순서이기는 하나 비롯함이 없는 
옛적부터 부처에게는 순서가 없다. 오직 일심을 깨달으면 다시 어떤 법도 얻을 
것이 없나니, 이것이 곧 참 부처이다.
부처와 중생은 일심이어서 차이가 없는 것이 마치 허공이 섞이지도 무너지지도 
않는 것 같다. 또 둥근 해가 사천하를 비치는데 비칠 때에는 광명이 천하에 
두루하나 허공은 밝아지지 않고, 해가 저문 뒤엔 어두움이 천하에 두루하나 허공은 
어두워지지 않는다. 밝고 어두운 겉모양은 서로 엇바뀌지만 허공의 성품은 가없어 
변함이 없듯 부처와 중생의 마음도 그렇다.
만일 부처는 청정하고 빛나는 해탈의 모습이라 하고, 중생은 더럽고 어두운 생사의 
모습이라 여기면 그 사람의 그러한 견해로는 항하사 겁을 지나더라도 보리를 얻지 
못하리니, 형상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오직 이 일심뿐이요, 다시는 티끌만큼도 얻을 만한 법이 없어 곧 부처이건만 
요사이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이 마음의 본체를 깨닫지 못하고 마음 위에서 마음을 
내어 밖으로 부처를 구하고, 형상에 집착하여 수행하니 모두가 나쁜 법이요, 
보리의 도는 아니다.

 

○ 시방에 계신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 무심도인 한 사람께 공양한 것만 
못하나니, 그런 분을 가히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무심이라는 것은 온갖 마음이 
없다는 뜻이니, 여여(如如)한 본체는 안팎이 목석과 같아서 요동치 않으며, 안팎이 
허공과 같아서 막히지도 걸리지도 않고 능동과 피동도 없고, 방위도 모습도 
득실(得失)도 없다. 서두르는 자는 감히 이 법에 들어오지 못하고 공에 떨어져 
머무를 곳이 없게 되어 아득히 여기어 물러날까 두렵다.
문수는 이치에 해당하고 보현은 행에 해당하는데, 이치란 참으로 공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요, 행이란 형상을 여의어 다함이 없는 것이다. 관음은 대자(大慈)에 
해당하고, 세지는 대지(大智)에 해당한다. 유마(維摩)는 정명(淨名)이라 번역하니, 
정은 맑다는 뜻으로서 성품이요, 명은 이름으로서 형상인데 성품과 형상이 다르지 
않으므로 정명이라 한다.
모든 보살이 표하는 것은 사람들이 다 갖추고 있다. 일심을 여의지 않고 깨달으면 
바로 이것이다. 요즈음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서 깨달으려 하지 않고 
마음 밖에서 형상에 집착하여 경계를 취하니, 모두가 도와는 멀다.
부처님께서는 "항하의 모래는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제석천과 바라문들이 밟고 
지나더라도 기뻐하지 않고, 소·양·벌레·개미가 밟고 지나가도 성내지 않고, 
진기한 보배, 향기로운 향기가 있어도 탐내지 않고, 똥·쓰레기 따위 더러운 것이 
와도 싫어하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셨다.

 

○ 이 마음은 곧 무심인 마음이니 온갖 형상을 여의었다. 부처님들과 중생이 
조금도 다르지 않으니, 무심하면 그대로가 구경(究竟)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당장에 무심이 되지 못하면 여러 겁을 수행하여도 도를 이루지 못하고 삼승의 
수행에 끄달리어 해탈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마음을 증득하는 데는 더디고 빠름의 차이가 있으니, 어떤 이는 법을 
들으면 한 생각에 무심을 얻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십신(十信)·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에 이르러 무심을 얻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십지(十地)에 이르러 무심을 얻는 이도 있다.
긴 시간에나 짧은 시간에 무심을 얻어서 그대로 머무르면 다시는 닦을 것이 없고, 
다시 증득할 것도 없다. 진실하여 허망치 않으니, 한 생각에 얻은 이와, 십지에서 
얻은 이의 공덕은 같아서 조금도 깊고 얕음이 없건만, 여러 겁이 지나도록 
헛수고를 할 뿐이다. 악과 선을 짓는 것이 모두가 형상에 집착하는 것이니, 형상에 
집착하여 악을 지으면 수고롭게 헤매이고, 형상에 집착하여 선을 지으면 헛되이 
고통을 받는다. 모두가 한 마디에 근본 법을 스스로가 깨닫는 것만 못하다.
이 법은 곧 마음이니 마음 밖에는 법이 없다. 이 마음은 곧 법이니 법 안에는 
마음이 없다. 마음은 스스로가 무심이요, 무심이라 할 이도 없다. 마음을 가지고 
무심이 되게 하려면 마음은 도리어 있음을 이루게 된다. 묵연히 계합할 뿐이어서 
온갖 생각과 요량이 끊겼기 때문에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으로 생각해 따질 
곳이 없다.
이 마음은 본래부터 근원이 청정한 부처여서 사람마다 모두가 갖고 있기에, 
꿈틀거리는 축생들도 부처님이나 보살들과 동일한 바탕이어서 다르지 않으니, 다만 
망상 분별 때문에 갖가지 업과 과보를 짓거니와 근본 부처 자리에는 진실로 한 
물건도 없다. 비고, 통하고, 고요하고, 밝고, 묘하고, 안락할 뿐이다.
스스로가 깊이 깨달으면 당장 그대로가 이것이어서 원만 구족하여 다시는 모자라는 
바가 없다. 비록 세 아승지 겁을 지나면서 수행하여 온갖 지위를 겪었더라도 한 
생각 깨달을 때엔 다만 원래의 자기 부처를 증득할 뿐이니 구경에 한 물건도 더할 
수 없다.
여러 겁 동안 공부한 일을 돌이켜보건대 모두가 꿈속의 거짓 짓이니,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나는 실제로 위 없는 도를 얻은 바가 없다고 하셨다. 또한 만일 얻은 
바가 있다면 연등 부처님이 나에게 수기(授記)를 주시지 않았으리라고 하셨고,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다고도 하셨다. 이것을 보리라 하니, 이 본래 청정한 
마음은 중생·부처·세계·산·강·형상 있음·형상 없음 따위 시방세계에 
두루하여 온갖 것에 평등하여 너도 없고 나도 없다.
이 본래의 근원인 청정한 마음은 항상 스스로 두렷이 밝고 두루 비추거늘 세상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자기 마음으로 잘못 알기 
때문이니, 보고 듣고 느끼고 앎에 덮여서 정묘하고 밝은 본체를 보지 못한다.
당장에라도 무심하게 되면 근본체가 저절로 나타나니, 마치 둥근 해가 허공에 솟아 
시방의 허공을 비치면 아무것도 장애될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동작으로 알다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비워 버리면 마음 가닥이 끊어져서 들어갈 곳이 없게 
되리라. 다만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자리에서 본래의 마음을 알기만 하면 이러-히 
본래의 마음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에 속하지 않고, 그것을 여의지도 않았다. 
다만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위에서 알음알이를 일으키지 말고, 그것 위에서 
생각을 움직이지 말고, 그것 위에서 마음을 찾지도 말고, 그것을 버리고서 법을 
취하지도 마라. 즉(卽)하지도 말고, 여의지도 말고, 머물지도 말고, 집착하지도 
않아 두루 자재하면 도량 아닌 곳이 없다.

 

○ 세상 사람들이 법문을 들을 때에 모든 부처님들이 마음의 법을 전하셨다고 
하나, 마음 밖에 따로이 증득하고 취할 수 있는 어떤 법이 있다고 여겨 마음으로 
법을 찾게 되면 마음이 곧 법이요, 법이 곧 마음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을 
가지고 다시 마음을 찾지 마라. 천만 겁을 지나도 끝내 얻을 날이 없다.
바로 무심이 되는 것만 못하니 이러-히 본래의 법이니라. 마치 역사(力士)의 이마 
구슬이 이마 속에 숨어 있어서 밖으로 구하여 두루 시방에 다닌다면 끝내 얻지 
못하지만 지혜로운 이가 가르쳐 주면 당장에 구슬이 본래대로 있음을 보게 되는 
것과 같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미혹하여 스스로 본래의 마음을 부처라 여기지 않고, 밖을 
향해 구하면서 공부를 쌓아 차례대로 과위를 증득하려 하면 몇 겁을 지나도록 
부지런히 구하여도 바른 도를 이루지 못한다.
바로 무심이 되는 것만 못하나니, 온갖 법이 본래 없어서, 얻을 바도 없고, 
머무름도 없고, 의지함도 없고, 능동도 없고 피동도 없음을 반드시 알아 망녕되게 
움직이지 않아야 보리를 증득하리라.
도를 증득한다는 것도 다만 본 마음의 부처를 증득할 뿐이니, 여러 겁을 닦았으나 
닦음마저 비었다. 마치 역사가 이마 사이의 구슬을 얻었을 때에도 본래의 구슬을 
찾았을 뿐이요, 밖을 향해 구하던 공력과는 관계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실제로 얻은 바가 없다." 하시고,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다섯 가지 눈으로 보는 바를 다섯 가지 언어로 
말하여 이끈 것이 진실하여 허망치 않으니 제1의제라 하셨다.

 

○ 도를 배우는 사람은 사대(四大)로 몸을 삼으나 사대는 나라는 것이 없고, 나 
또한 주인이 없다는 것을 의심하지 마라. 그러므로 이 몸은 '나'도 없고 주인도 
없으며, 오음(五陰) 역시 '나'도 없고 주인도 없다. 따라서 이 마음에 '나'가 없고 
주인도 없음을 알아라. 육근·육진·육식이 화합해서 생멸하는 것도 이와 같으니 
이렇게 열여덟 가지 경계[十八界]가 이미 공해서 온갖 것이 모두 공하면, 오직 본 
마음만이 가없이 이러-히 청정하다.
의식으로 먹는 이가 있고 지혜로 먹는 이가 있는데, 사대로 된 몸은 주림과 
시장함이 걱정이므로 형편 따라 보양하되 탐욕을 내지 않는 것을 지혜로 먹는다 
하고, 방자하게 맛을 취하여 망녕되게 분별을 일으키고, 입에 맞는 것만을 찾아 
싫어할 줄 모르는 것을 의식으로 먹는다 한다.
성문(聲聞)이란 것은 소리로 인하여 깨닫는 것을 성문이라 하니, 자기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음성의 가르침 위에 알음알이를 일으키고 신통이나 상서로운 
모습이나 언어나 움직임에 의해서 보리 열반이 있다 하여 세 아승지 겁을 지나도록 
닦아야 불도를 이루리라는 말을 따르면 모두가 성문의 도에 속하나니, 그들을 
성문이라 한다.
부처님만이 오직 바로 자기의 마음을 단박에 깨달은 본래 부처이어서 한 법도 
얻음이 없고, 한 행도 닦은 것이 없으니, 이것이 위 없는 도이며, 이것이 진여의 
부처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한 생각이라도 있으면 도와는 간격이 생기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 생각 생각이 형상이 없고, 생각 생각이 함이 없으면 그것이 부처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부처가 되고자 하면 온갖 불법은 아무것도 배울 것도 없고 
구할 것도 없으니 집착할 것 없다는 것만을 배우라. 구함이 없으면 마음이 나지 
않고, 집착이 없으면 마음에 물들지 않나니, 나지 않고 물들지 않으면 그것이 
부처이다.
팔만 사천 법문은 팔만 사천 번뇌에 대하여 교화하고 이끄는 문이나 본래는 한 
법도 없다. 그것을 여의면 법이요, 여읜 줄을 아는 것은 부처이니, 온갖 번뇌를 
여의기만 하면 얻을 법이 없다.

 

○ 도를 배우는 사람이 요긴한 비결을 알고자 하면 마음 위에다 한 물건도 붙이지 
마라. 불법의 몸이 마치 허공과 같다고 하는 것은 법신이 곧 허공이요, 허공이 곧 
법신임을 비유한 것이건만, 항상 사람들이 법신이 허공에 두루하였다거나 허공 
속에 법신을 머금었다고 여겨 법신이 곧 허공이요, 허공이 곧 법신임은 모른다.
만일 반드시 허공이 있다고 말하면 허공은 법신이 아니요, 반드시 법신이 있다고 
말하면 법신은 허공이 아닐 것이니 다만 허공이란 견해를 짓지 마라. 허공이 곧 
법신이다. 법신이란 견해를 짓지 마라. 법신이 곧 허공이다.
법신과 허공은 다른 형상이 없으니 부처와 중생도 다른 형상이 없고, 생사와 
열반도 다른 형상이 없으며, 번뇌와 보리도 다른 형상이 없다. 온갖 형상을 여읜 
것이 부처이니 범부는 경계를 취하고 도인은 마음을 취한다지만, 마음과 경계를 둘 
다 잊어야 참된 법이다. 그러나 경계를 잊기는 쉬워도 마음을 잊기는 지극히 
어렵다.
사람들이 마음을 잊지 못하고 공에 떨어져 잡을 곳이 없을 것을 걱정하나, 공이란 
본래 공이 아니어서 오직 하나의 참 법계임을 몰라서일 뿐이다.

 

○ 이 신령스런 깨달음의 성품은 비롯함이 없는 옛적부터 허공과 수명을 같이하니, 
있지도 없지도 않고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고, 떠들지도 조용하지도 않고, 젊지도 
늙지도 않고, 방향도 안팎도 없고, 수량도 형상도 없고, 빛과 소리도 없다. 찾을 
수도 구할 수도 없고, 지식으로 알거나 말로 할 수도 없고, 물건으로 이해할 수도 
없고, 공력으로 이르를 수도 없다.
부처님과 보살들과 온갖 꿈틀거리는 중생이 모두가 동일한 큰 열반의 성품이니, 
성품은 곧 마음이요, 마음은 곧 부처요, 부처는 곧 법이다.
한 생각이 참다움을 떠나면 모두가 망상이니, 마음으로써 다시 마음을 구하지 
말고, 부처로써 다시 부처를 구하지 말고, 법으로써 다시 법을 구하지 마라. 
그러므로 도를 닦는 사람이 무심이 되면 묵연히 계합하거니와 마음으로 망설이면 
곧 어긋난다.
마음으로 마음을 전하는 것이 바른 견해이니, 행여 밖을 향해 경계를 쫓는 것을 
마음이라 여기지 마라. 이것은 도적을 잘못 알고 아들로 여기는 것이다.
탐냄·성냄·어리석음이 있으므로 계율·선정·지혜를 세웠거니와 본래 번뇌가 
없거늘 어찌 보리가 있으랴. 그러므로 조사께서 "부처님이 온갖 법을 말씀하신 
것은 온갖 마음을 없애기 위한 것인데 나는 온갖 마음이 없거니 온갖 법을 무엇에 
쓰리오." 라고 하셨다.
본래 청정한 부처 위에는 한 물건도 붙일 수 없나니, 비유컨대 허공에 한량없는 
값진 보배를 장엄해도 제자리에 머물지 못하는 것 같아 불성도 허공과 같아서 
아무리 한량없는 지혜와 공적으로 장엄하여도 끝내 머무름이 없으니 매했다 하는 
것은 거짓이어서 본래 성품에는 바뀜이 없다.

 

○ 이른바 심지법문(心地法門)이란 만법이 모두가 이 마음에 의하여 세워진 것임을 
말한다. 경계를 만나면 있고, 경계가 없으면 없는 것이어서 깨끗한 성품에는 
경계라는 생각마저 없다.
정혜(定慧)라는 거울을 쓴다고 하고 역력(歷歷)하여 적적성성(寂寂惺惺)하다 
말하지만,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은 모두가 경계 위에서 견해를 일으키는 
것이다. 잠깐 중근기와 하근기를 위하여 말한 것이니, 만약 친히 증득하고자 하면 
이와 같은 생각도 짓지 마라. 모두가 경계에 얽히리라.
법에 빠지면 있음의 경지에 빠지는 것이다. 다만 온갖 법에 대하여 있다는 소견을 
짓지 않으면 곧 법을 보는 것이다.

 

○ 달마 대사가 중국에 오신 뒤로 오직 한 성품만을 말하고, 오직 한 법만을 
전하였으니, 부처로써 부처를 전하였을 뿐 다른 부처를 말하지 않았고, 법으로써 
법을 전하였을 뿐 다른 법을 말하지 않았다. 법은 말할 수 없는 법이요, 부처는 
취할 수 없는 부처이니, 그것은 근본 청정한 마음이다. 오직 이 한 가지 일만이 
진실하고, 나머지 둘은 진실치 않나니, 반야를 지혜라 하는데 이 지혜는 곧 형상 
없음의 근본이다.

 

○ 범부는 도를 취하지 않고 오직 여섯 감정을 제멋대로 부려 여섯 길로 가나니, 
그는 도를 배운 뒤에 한 생각에 생사를 따져 온갖 마의 길에 떨어지고 한 생각에 
온갖 소견을 일으켜 외도에 빠지고, 나는 것은 사라짐으로 변한다고 보아 성문의 
도에 떨어지고, 나는 것은 보지 않고 사라짐만을 보아 연각(緣覺)의 도에 빠진다. 
법은 본래부터 나지 않고 이제 사라지지도 않나니, 두 소견을 일으키지 말고, 
싫어하거나 기뻐하는 생각을 내지 마라. 온갖 법은 오직 일심뿐이니, 그러한 
뒤에야 불승(佛乘)에 이르른다.

 

○ 대개 사람은 모두가 경계를 따라 마음을 내서 그 마음이 싫어함과 기뻐함을 
따르나니, 만일 경계를 없애려 하면 마음을 잊으라. 마음을 잊으면 경계가 공하고, 
경계가 공하면 마음이 사라진다. 마음을 잊지 않고 경계를 제거하려 하면 경계를 
제거할 수 없고, 어지러움만을 더할 뿐이다. 그러므로 만법이 오직 마음이라 
하노니, 마음도 얻을 수 없거늘 무엇을 구하리오.

 

○ 반야의 법을 배우는 사람은 한 법도 얻을 수 있다고 보지 말아야 하고, 
삼승에는 뜻을 두지 않아야 한다. 오직 하나뿐인 진실은 증득할 수 없거늘 '내가 
증득했다.' 하면 모두가 뛰어난 체하는 사람이다. 법화회상에서 옷자락을 떨치고 
물러간 무리들이 모두가 이러한 무리들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내가 보리의 
법에서 실제로 얻은 것이 없다."고 하셨으니, 그저 묵연히 계합할 뿐이다.

 

○ 대개 사람이 닦아 증득하고자 할 때 다만 오온이 모두가 공한 것을 관조하면 
사대가 '나' 없으니, 참 마음은 형상이 없어서 가지도 오지도 않으며, 날 때 
성품이 오는 것도 아니요, 죽을 때 성품이 가는 것도 아니니 가없어 이러-하고 
두렷이 고요해서 마음과 경계가 한결같다. 다만 이와 같이 바로 단박에 깨달으면 
삼세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초월한 사람이 되리라. 털끝만치도 향해 나아가려는 
생각을 내지 마라. 만일 좋은 형상으로서 부처님들이 마중을 나오시거나 갖가지 
일이 나타나더라도 따라가려는 마음을 내지 말고, 나쁜 형상으로서 갖가지가 
나타나더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을 내지 마라. 자신의 망녕된 마음이 거짓임을 알아 
법계와 같아지면 문득 자재하게 된다.

 

○ 대개 화성(化城)이라는 것은 2승(소승)과 십지 내지 등각(等覺)이나 
묘각(妙覺)에 이르기까지 방편으로 설정하여 이끌기 위한 것이니, 모두가 
화성이다. 보배 있는 곳이라고 말하는 것은 참 마음이며, 본 부처이며, 제 성품인 
보배이니, 이 보배는 뜻으로 헤아리는 데 속하는 것이 아니요, 세울 수 없고 
부처도 중생도 없고, 능동과 피동도 없거니 어디에 화성이 있으랴.
만일 이미 이 화성이라면 어디가 보배 있는 곳이냐고 물을 때에는 보배 있는 
곳이란 가리킬 수 없고, 가리킬 수 있다면 진실한 장소가 아니므로 말하기를 
가까운 곳에 있을 뿐이라 하였다.
가까운 곳에 있다 하나 정하여 헤아려 말할 수 없는 것이니, 다만 본체를 계합해 
알면 그대로가 이것이다.
천제(闡提)라는 것은 믿음을 갖추지 못한 무리이다. 온갖 육도의 중생과 
2승들까지도 부처의 과위가 있음을 믿지 않나니, 이들을 모두가 선근이 끊어진 
천제라 한다.
보살들은 불법을 깊이 믿어 대승과 소승이 있음을 보지 않고, 부처와 중생이 한 
법성으로 동일하다고 하니, 이들은 선근이 있는 천제라 한다.
대체로 교법에 의하여 깨닫는 이를 성문(聲聞)이라 하고, 인연을 관해서 깨닫는 
이를 연각(緣覺)이라 한다. 만일 제 마음 속에서 깨닫지 못하면 부처를 이루었다 
하여도 역시 성문이라 한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법에서만 깨닫고, 마음 위에서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여러 겁을 지나도록 수행하더라도 끝내 근본 부처는 아니다. 
만일 마음으로는 깨닫지 못하고, 법에서만 깨달으면 법은 중히 여기나 마음은 
가벼이 여기는 것이어서 끝내는 헛된 것만 쫓고, 근본 마음은 잊은 것이다. 
그러므로 다만 근본 마음에 계합하면 법을 구할 필요가 없나니, 마음이 곧 법이다.

 

○ 대개 사람들은 흔히 경계가 마음에 장애된다 하고, 현실[事]이 이치[理]에 
장애된다 하여, 항상 경계를 피하여 마음을 편히 하려 하고, 현실을 막아서 이치에 
안정하려 하는데 마음이라는 것이 막는 경계이고 이치라는 것이 막는 현실임을 
모른다. 다만 마음을 공하게 하면 경계는 저절로 공하고, 이치를 고요하게 하면 
현실은 저절로 고요해진다. 뒤바뀌지 마라.

 

○ 대개 사람들이 흔히 마음을 비우지 못하는 것은 자기의 마음이 본래 공한 것을 
알지 못하고 공에 떨어질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현실만을 
제거하고 마음을 제거하지 않지만 지혜로운 이는 마음을 제거하고 현실은 제거하지 
않는다.
보살은 마음이 허공과 같아서 온갖 것을 모두 버렸으므로 지은 복덕에 전혀 탐내지 
않는다. 그러나 버림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안팎의 몸과 마음을 온통 다 버리어 
마치 허공과 같이 취할 바가 없게 된 후에 곳에 따라 사물에 응하되 능동과 피동을 
모두 잊으면 이것은 큰 버림[大捨]이라 하고, 만일 한쪽으로는 도를 행하여 덕을 
펴고, 한쪽으로는 두루 버리어 희망하는 마음이 없으면 이것을 중간 
버림[中捨]이라 하고, 뭇 선행을 두루 닦으나 희망하는 생각이 있다가 법을 듣고는 
공을 알아 끝내 집착하지 않게 되면 이것을 작은 버림[小捨]이라 한다.
큰 버림이란 촛불이 앞에 있는 것 같아서 아무런 미혹도 깨달음도 없고, 중간 
버림이란 촛불이 옆에 있는 것 같아서 밝은 듯 어두운 듯하고, 작은 버림은 촛불이 
뒤에 있는 것 같아서 앞 길의 구덩이와 함정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살은 마음이 허공과 같아서 온갖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 과거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은 과거가 없음이요, 현재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은 현재가 
없음이요, 미래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은 미래가 없음이니, 이른바 세 세상이 모두 
없다는 것이다.
여래께서 가섭에게 법을 전하신 뒤에 마음으로 마음을 인가하시니,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않다. 허공에다 도장을 찍으면 문채가 이루어지지 않고, 물건에다 도장을 
찍으면 도장은 법을 이루지 못한다. 마음으로 마음을 인가하면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않다 하나 도장 찍는 이와 찍는 바가 계합해 맞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얻는 
이가 적다. 그러나 마음은 곧 마음 없음이요, 얻음은 곧 얻음 없음이다.

 

○ 부처님은 세 가지 몸[三身]이 있으니, 법신은 제 성품의 영통(靈通)한 법을 
말한 것이요, 보신은 온갖 청정한 법을 말한 것이요, 화신은 육도만행의 법을 말한 
것이다.
법신은 설법을 할 때에 언어와 음성과 형상과 문자로써 하지 않으니 말할 바와 
증득할 바가 없어서 제 성품이 영통할 뿐이다. 그러므로 설법할 법이 없는 것을 
설법이라 한다 하셨다. 보신과 화신은 모두가 근기에 따라서 설법하는 형상을 
나타내며, 또 근기에 따라 거두니 모두가 참된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보신과 
화신은 참 부처가 아니요 설법하는 이도 아니라 하였다.

 

○ 모두가 하나의 정명(精明)이 나뉘어 여섯 가지 화합이 되었다 하였는데 하나의 
정명이란 일심이요, 여섯 가지 화합이란 여섯 감관이 제각기 경계와 화합된 
것이니, 눈이 빛과 화합하고, 귀가 소리와 화합하고, 코가 향기와 화합하고, 혀가 
맛과 화합하고, 몸이 닿음과 화합하고, 뜻이 법과 화합하여 중간에 여섯 가지 
의식이 생기어 열여덟 가지 경계가 된다. 만일 열여덟 가지 경계가 공하여 
아무것도 없음을 알면 여섯 화합(눈·귀·코·혀·몸·뜻)이 하나의 정명임을 알 
수 있나니, 하나의 정명이란 곧 마음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모두가 이를 알면서도 하나의 정명이 여섯 가지 화합이 
되었다는 생각을 면치 못하여 마침내 법에 얽매여 근본 마음을 깨닫지 못한다.
여래께서 세상에 나오셔서 일승의 진실한 법을 말씀하셨으나 중생들이 믿지 않고 
비방하다가 고통 바다에 빠졌다. 만일 말씀하시지 않으면 부처님을 인색하다 할 
것이니 어찌 중생들을 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묘한 법을 널리 베풀어 방편으로 
삼승(성문·연각·보살)을 말씀하신 것이다.
법에는 대승과 소승이 있고 얻음에는 깊음과 얕음이 있는데 모두가 근본 법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일승의 도만이 진실하고 나머지 둘은 참되지 않다 하셨다. 
그렇건만 끝내 일심의 법을 나타내지 못했으므로 가섭을 불러 한자리에 앉아 
따로이 일심을 전해주시니, 말을 떠난 설법이다. 이 한 가지 법이 세상에 특별히 
행(行)해졌으니, 이에 계합해서 깨달으면 그대로 부처 경지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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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용(功用) : 몸·입·뜻의 동작. 씀이 없이 써야 진정한 공용이다.
* 십신(十信) : 보살의 수행 단계 52위 중 처음 제1위∼10위. 부처의 가르침을 
믿어 의심이 없는 지위.
* 십주(十住) : 제11위∼20위. 마음이 진제의 이치에 안주하는 위치에 이른 지위.
* 십행(十行) : 제21위∼30위. 묘각에 이르는 계위로 중생제도에 노력하는 지위.
* 십회향(十廻向) : 제31위∼40위. 여태껏의 수행을 중생에게 돌려주고 오경에 
도달하려는 지위.
* 십지(十地) : 제41위∼50위까지 온갖 중생을 교화하여 이롭게 하는 지위.
* 연각(緣覺) : 12인연을 홀로 관하여 깨닫는 것. 벽지불 또는 독각.
* 화성(化城) : 반야경 이전의 경은 불 속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설한 방편임을 
나타내는 비유.
* 천제(闡提) : 선근(善根)이 끊어져 영원히 성불하지 못하는 사람. 성불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단선천제(斷善闡提)와 대비천제(大悲闡提)가 있다. 단선천제는 
대사견(大邪見)을 일으켜 일체의 선근이 끊어진 것이고, 대비천제는 대비심으로 
일체 중생을 모두 제도한 뒤에 성불하려 하는데 중생은 끝이 없으므로 성불할 
기회가 없는 것이다.

 

 

상국(相國) 배휴(裵休)의 전심게(傳心偈)

 

내가 완릉과 종릉에서 모두 황벽 희운 선사의 전심법요를 얻었으므로 나도 
전심게를 지어본다.

 

마음은 전할 수 없으나 계합하는 것으로 전한다 여기고, 마음은 볼 수 없으나 
없음으로써 보는 것으로 여긴다. 계합하는 것은 계합이 아니요 없음도 없음이 
아니니, 화성에 머물지 마라. 미혹한 이의 이마에 구슬은 그대로 있다. 구슬이란 
억지로 붙인 이름이니, 화성인들 형상이 있으랴. 마음이 그대로가 부처이니, 
부처는 곧 남이 없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니, 구하거나 만들려 하지도 마라. 
부처로써 부처를 찾으면 노자를 곱이나 쓰게 되고 법을 따라 소견을 내면 마의 
경계에 빠진다. 범부와 성인을 분별하지 않아야 보고 들음을 여의나니, 마음 
없음이 거울 같으면 물건과 다투지 않게 되고 생각 없음이 허공 같으면 포용하지 
못할 물건이 없다. 삼승을 벗어난 법은 여러 겁을 지나도 만나기 어려우니 만약 
이러할 수 있다면 참으로 세상을 초월한 장부이다.
일찍이 듣건대 하동 대사(河東大士)가 고안 도사(高安導師)의 전심법요를 만나 
보고, 그 해에 게송을 지어서 후학들에게 보이니, 벙어리와 소경이 열리어 단청을 
보는 것같이 환하였다. 내가 그 나머지가 없어진 것을 애석히 생각하여 이 기록의 
끝에다 꿰매둔다.  
경력(慶歷) 무자(戊子)에 남종(南宗)의 천진(天眞)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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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 대사(河東大士) : 배휴를 가리킴.
* 고안 도사(高安導師) : 황벽 희운 선사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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