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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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5년07월26일(수) 18시06분45초 KDT
제 목(Title): 반야심경 5



5. 도일체고액

모든 괴로움과 액난을 벗어났음이라...

1) 고액

인생의 괴로움을 해결하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생노병사라는 현상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생노병사와 기타 인생살이속에서 나타나는 괴로움에서의 해탈이 불교가 
추구하는 전부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목적이 불교에는 없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가를 한 것은 이 이유였고 또한 도업을 이루시어 밝혀주신 것도 해탈의 
길이었습니다. 우리는 괴로움에 휩싸여서 지내지만 그 괴로움이 때에 따라서 저절로 
없어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실 괴로움을 해결해서 없어진 것이 아니라 주로 
피하면서 괴로움의 현상적 모습을 바꾸고 있을 뿐입니다. 즉 끝없는 자기 합리화와 
자기 변호로 한 순간 한 순간을 모면하면서 살고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러한 것은 면죄부와 동일한 것입니다. 나는 그래도 이만큼은 했으니까 
이쯤에서 인정받을 것은 받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 때, 그 때 벌어지는 
인생살이의 문제들에서 옆으로 비껴나가고 싶어하고 우리가 설정한 어떤 보호막에 
의하여 안전함을 보장받고 싶어 합니다. 그렇지만 풍전등화같은 우리가 설정한 
보호막이 그것을 제공해 준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그렇게 괴로움을 대하고 
인생의 문제를 대합니다. 이렇게 괴로움에서 피해다니는 것, 그래서 끝없이 
괴로움이 꼬리를 물고 모습만 바꿀 뿐 영 해결이 안되는 상태를 "액난"이라고 
합니다.

2) 도일체고액

앞서 말한 괴로움을 피하는 자세는 한 괴로움을 해결하였다고 착각하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해서는 사실 아무런 해결이 된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한 괴로움, 한 
괴로움을 피하면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모든 괴로움과 액난이라는 
인생살이의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야되고 석가모니 부처님은 반야바라밀다를 
통하여 한꺼번에 해결하셨습니다. 즉 오온의 주인공으로 설정한 "나"라는 울타리를 
포기하고 부처님의 무한광명을 비추어보니까 오온은 부처님의 절대생명이 피어난 
모습이었기에 절대속에는 나와 너가 없고 주관과 객관이 없었기에 모든 괴로움과 
액난이라는 인생문제를 해결하십니다. 괴로움이나 인생의 제반문제는 모두 상대적 
인생관에서 나타납니다. 나와 너가 따로 따로이기에 거기에서는 나의 이익이 너의 
이익에 반대되고 너의 이익으로 인하여 나에게 괴로움이 생기고 가져야 할 것이 
나와 상대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못가져서 괴롭습니다. 즉 오온으로 대표되는 
생명활동의 근원지가 상대적 존재로서의 "나"라고 하는한 괴로움의 꼬리는 
계속됩니다. 내가 있는한에 있어서는 나는 그 괴로움에서 피해야 하고 피하는 한에 
있어서는 끝없이 따라다니는 것이 액난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오온의 
주인공으로서 울타리를 배경한 "나"를 포기하고 울타리 걷어버리니까 원래의 
무한한 
광명이 쏟아져 들어오고 광명에 의하여 비추어진 오온의 실상은 절대적인 생명의 
분출이었기에 거기에서 괴로움이 소유격에 의해서 착각된 나의 괴로움이 아니라 
부처님의 절대적인 생명의 움직임이었음을 알게 되기에 괴로움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3) 괴로움을 대하는 대승의 자세

괴로움을 흔히들 회피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병을 
이야기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렇지만 죽음이라는 현상은 필히 만나게 되고 
우리의 육신은 병고에 시달리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당장 지금은 우선 그런것을 
잊어 버리고 즐겁고 문제거리 없는 상태로 서로 서로 좋은 이야기나 하면서 희희덕 
거리면서 지내보자. 가끔 절에 가서 부처님께 절하고 기도하니까 그것으로 그 때 
되면 어떻게 잘 되겠지 그러면서 삽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을 생각지 아니하고는 
이 삶에 충실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죽음을 생각지 않으면서 
회피하고 인생을 살 때에 거기에서 남는 것은 나태함과 게으름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억지로 죽음의 공포를 가져다가 인생을 구속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죽음의 공포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있는 병의 두려움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분명한 
육체의 늙음으로 부터의 괴로움 마주 대하자는 것입니다. 없는 것처럼 피하면서 
인생문제 다 해결된 것처럼 위장하고 지내면서 남의 인생 평론이나 하는 
평론가적인 
삶에서 부처님께서 인생의 괴로움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승에서는 괴로움을 피하고 없애야 할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괴로움이라는 
현상을 
오히려 반기는 것이 대승입니다. 그 괴로움의 현실을 직시하는 태도에서 소유한 
것에 의하여 거꾸로 규정된 자신의 부자유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부자유성을 느끼는 정도에 따라서 자유를 향한 발걸음을 옮길 수 있고 그럴 때에 
비로소 부처님의 절대광명앞에 울타리를 제거하게 되고 그때 우리의 원래 
완전생명을 확인하게 되는 뚜렷한 인과가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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