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5년07월24일(월) 13시00분42초 KDT 제 목(Title): 반야심경 4 4. 조견오온개공 물질과 정신작용이 모두 부처님의 절대력이 드러난 모습임이 부처님 광명에 의하여 드러나니...... 1) 오온은 "나"를 규정하는 것.. 오온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말하는 것으로 물질과 느낌, 생각, 행위, 분별심을 말합니다. "색"은 물질이라기 보다는 "육체"라고 아는 것이 더욱 불교적입니다. 왜냐하면 불법은 "나"의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르침이지 우주의 섭리나 또는 정신이라는 대상을 따지고 파헤치는 물리학, 철학, 심리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자연과학도 아니고 사회과학은 더욱 아닙니다. 오온은 곧 우리들이 "나"라고 주장하는 것을 규정하는 모든 것입니다. 사실은 이것은 우리가 소유한 것이지만 거꾸로 소유한 것에 의하여 우리가 규정되어서 스스로 지칭하는 "나"의 모든 것입니다. 우리들이 "나"라고 말하는 것의 범주는 오온의 범주를 넘지 못합니다. 언제나 이 오온의 범주내에서 규정된 한계적인 어떤 것을 "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분별심(識) 오온의 마지막인 "식"은 흔히 의식이라고 설명하지만 의식이라기 보다는 분별이 일어나는 가치척도 또는 가치기준이 되는 분별심으로 아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흔히 분별과 분별심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언어의 혼동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좋은 것이다","이것은 나쁜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분별입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는 것을 판단하게 되는 근본적인 척도가 분별심입니다. 이 분별심을 다르게 말하면 곧 "알음알이"입니다. 또는 "습"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흔히 불법을 공부하다보면 "분별"하지 말라고 말하거나 "집착"하지 말라고 말하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이 분별과 집착이 나오는 근원점이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분별"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려니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근원점인 분별의 척도는 손대지 않고 내버려두고서 분별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살아도 산 사람같지 않은 도인, 활짝 꽃 피지 못하고 어딘지 차거운 모습과 비겁함을 위장하는 허세의 불교도가 되기 쉽습니다. 분별과 집착은 열심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분별과 집착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삶" 그 자체를 만끽하는 원래 우리의 생명특징 입니다. 그렇지만 분별과 집착이 장애를 만나게 되기도 하고 좌절감을 줍니다. 그러한 좌절과 장애는 동일 차원에서 분별과 집착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밑변에 있는 분별심 즉 근원점을 해결해서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이 불법이고 이것을 해결하는 것이 반야바라밀다입니다. 분별이 나오는 척도인 분별심 이것만 해결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을 단지 "식"이라는 것만에 집중해서 공부하는 "유식학"이라는 학파가 나오기도 합니다. 2) 오온개공은 오온의 주인이 절대생명이라는 것.. 우리는 오온인 육체와 정신작용을 "나"라고 규정하고서 오온으로 규정된 "나"라는 틀속에서 삽니다. 그리고 그 "나"가 노력해서 성불한다고 생각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6년 고행은 모두 이렇게 오온과 대상과 소유에 의하여 스스로를 제약한 풍전등화 같은 한계상황속의 "나"를 가지고 노력한 수행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해도 한계상황속에서의 확장일 뿐입니다. 조금씩 진척되어 나가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지만 결국은 그 울타리내에서 밀도만 높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울타리안에서 머물면 좋겠는데 울타리를 점점 좁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투자한 시간과 노력에 대하여는 보상받으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나"가 하겠다는 수행을 중단하는 순간에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즉시에 안 것이 오온이 오온이라는 고정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있는 절대생명이 피어나는 모습 이었다는 것입니다. 절대생명은 "너와 나"가 없는 것이고 "주관과 객관"이 없는 것이고 "시간과 공간 제약"이 없는 스스로 있는 우리의 본생명입니다. 즉 "너와 나","주관과 객관","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에 의하여 구속되기 전에 있는 "나" 입니다. 3) 조견오온개공 어떻게 해서 오온이 고정되어 실제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인가 하면 조견을 했기 때문입니다. 조견은 곧 무량광명을 비춘다는 것입니다. 무량광명을 비춘다고 하지만 밖에서 무량광명을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무량광명은 원래가 무량하기에 끝없이 비춰지고 있습니다. 단지 우리 스스로 울타리를 치고 있는 것이기에 스스로 어둠속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울타리를 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소유와 대상에 의하여 규정된 것을 "나"라고 하고 있고 그 "나"가 오온의 주인이라고 우기는 것을 울타리를 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만 포기하면 빛은 원래로 무량하게 비추어지고 있는 것이기에 오온의 실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울타리를 내버려두고 오온이 아무리 비어 있다고 해 보아도 소용이 없고 울타리를 내버려두고 아무리 고행을 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4) 대승 대승불교는 바로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반야바라밀다를 말합니다. 대승의 모든 수행은 반야바라밀다를 기반으로 합니다. 이것만이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수행의 포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나"라고 말하는 그 "나"는 유한적인 한계선상에서의 나를 지칭하고들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나"가 무엇을 해보았자 언제나 한계선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승불교는 한계성이 없습니다. 형식성이 없습니다. 삶의 근원점만 바꾸는 것이기에 이미 되지 않는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고행을 할 필요 없고 호흡을 세고 있거나 또는 사념을 쳐다볼 필요도 없이 바로 절대무한의 "나"를 긍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상대유한의 "나"를 포기하면 됩니다. 즉 상대유한의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절대무한인 부처님이 사는 삶이 되도록 하면 되는 것이기에 사는 것은 그대로 내버려 두던지 아님 더욱 힘을 내서 살던지 하고 삶의 배경인 주인공 즉 분별의 근원지만 "한계적 상황으로 규정한 나"에서 "절대무한 부처님"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절대무한 부처님으로 삶의 근원지를 바꾸는 것을 상대유한적인 내가 할래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래 스스로 있는 나의 본래 부처님 능력의 힘으로 하는 것이 대승수행인 염불과 기도와 참선이고 이 수행의 원천은 절대적인 의심없는 믿음입니다. 무엇을 믿냐면 중생으로 규정된 나의 힘으로는 성불할 수 없다는 것을 믿고 본래 부처인 절대적 생명으로서의 나는 이미 스스로 존재하여 성불되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만일 부처님이 안된다고 말한 절차를 일일이 확인하면서 하겠다고 한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이 6년간 한 수행은 말세중생이라고 규정한 우리가 할려면 평생해도 다 할수 없는 양일 겁니다. 그리고 기약없는 다음생을 기다리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