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5년07월24일(월) 12시59분17초 KDT 제 목(Title): 반야심경 3 3. 행심반야바라밀다시 대립과 상대가 없는 부처님의 무한하고 절대적인 광명에서 비롯되는 삶으로 전환될 때에... 1) 반야 반야는 우리들의 지혜가 아니라 부처님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우리들의 마음밖에 어디 다른 곳에 계시는 분은 아닙니다. 부처님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계십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나의 마음이라고 할 때의 그 마음이 곧 부처님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할 때의 그 마음은 언제나 대상과 함께만 인식되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아프다" 그럴 때의 마음은 아픔을 동반한 상대와 함께 동작되는 마음입니다. 아무 이유없이 마음이 스스로 아프지 않습니다. "마음이 즐겁다" 그럴 때의 마음도 괜히 저절로 즐겁지 않습니다. 그렇게 어떤 대상이나 어떤 사건에 의하여 우리는 마음이 즐겁다.. 마음이 괴롭다.. 그렇게 말하고 즐겁다.. 괴롭다.. 라는 작용이 있을 때에만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고요하다라는 것도 똑 같습니다. 고요함이라는 것을 통하여 인지되는 마음은 역시 괴로움이나 즐거움이나 분노등을 통하여 우리가 마음이라고 말한 그것과 하등의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어제의 마음과 오늘의 마음이 다르고 또한 1분전의 마음과 1분후의 마음이 다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이것을 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이런 마음이 부처님인 것이 아닙니다. 마음속에 부처님께서 계시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하루에도 무량번 종횡무진 바뀌는 그것을 부처님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자재라는 것을 이야기할 때에 스스로 있음과 인위적으로 존재하는 "나"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이것과 똑 같이 우리의 종횡무진 대상을 취하고 버리고 하면서 발생하는 내 마음이라고 부르는 물거품같은 그 마음 이전에 취하고 버리는 주인공이 있는데 그 마음을 일러서 부처님 마음이라고 합니다. 2) 바라밀다 그 부처님 마음의 특징이 무량광.무량수입니다. 무량광은 광명이 한량이 없다는 것이고 무량수는 수명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이가 곧 "자재(스스로 있음)"의 다른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마음은 대립이 없는 마음이고 상대가 없는 마음인 절대무한이기 때문에 거기에 나와 너가 없고 시간과 공간도 없는 마음입니다. 오직 끝 없는 생명의 힘이 분출되는 마음이지만 우리가 "내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나와 너","시간과 공간"이라는 대상에 의하여 거품처럼 일어나는 그 것으로는 주인공인 부처님 마음을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착각을 "나"라고 하고 있는 상태를 내 버려둔채로 아무리 수행을 해도 소용없는 것이고 아무리 수 많은 경전을 섭렵하여도 "스스로 존재"하는 참다운 나의 모습을 알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무한히 분출되어 나오는 무한절대의 부처님 광명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데 이 부처님 광명에 의지하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내가 "내 마음"이라고 알고 있던 거품같은 마음을 나의 참마음으로 착각하고 그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해 보겠다는 인생살이에 대한 관점이 뿌리채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라밀다입니다. 이 바라밀다가 곧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무한광명이 내 마음밖에 따로 있다면 그 부처님의 무한광명은 무한광명이 아니라 내 마음과 상대되는 유한광명에 불과한 것이기에 특정 대상적 신의 광명에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3) 시 시란 것은 순간을 말합니다. 아주 짧은 순간인 찰나입니다. 바라밀다로 전환된 순간을 말합니다. 이 바라밀다로 전환되는 순간을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성도를 통하여 느낄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인생살이의 부자유함을 느끼고 부귀영화를 버리고 출가를 단행합니다. 이 때의 출가란 것이 현실도피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당대의 종교적인 최고 지도자들을 모두 찾아다니면서 고행도 하고 또 정신세계에 대한 학습도 당대 최상으로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하시기 이전에도 이미 인도에는 싯달타 이상의 종교적인 식견을 갖춘 사람이 없었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은 진실함으로 자신을 돌아봅니다. 비록 그만하면 세계에서 최상의 식견과 최상의 수행을 했다고 할 수 있지만 자기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는 아직도 인생의 문제인 생사가 해결이 되지 않았음을 솔직히 인정할 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절망에 빠지십니다. 6년간 살을 여미고 뼈를 깍는 고행을 했지만 어떤 것도 해결된 것이 없었고 싯달타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고행을 했고 가장 높은 수행단계에 들어갔다는 허명만이 있을 뿐이 었습니다. 그 때에 부처님께서 완전한 절망에 빠지십니다. "아!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구나" 지금까지 내가 나의 마음이란 것, 나의 육신이란 이것으로 해볼려고 했는데 남은 것은 지친 몸과 황폐해진 거짓된 마음과 투여한 시간과 노력에 대한 보상심리가 움틀 뿐이라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면서 절망상태로 "내가 하는 수행" 을 포기하실 때에 비로서 스스로 있었던 부처님의 무한광명이 마음을 꽤뚫고 드러나면서 그 순간에 샛별이 떠 올른 것이고 무한광명이 드러나기에 샛별과 싯달타가 상대존재가 아니라는 진실함에 들어가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라밀다시 입니다. 여기에서 보니까 6년간 고행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구나를 인정하게 되는 겁니다. 6년간 고행은 아무리 하여도 그 거품같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아무리 해도 거품이나 만들고 그 거품에 속는 것의 되풀이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4) 행심반야바라밀다시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내가 하는 수행"을 포기하는 그 때를 일러서 행심반야바라밀다시라고 합니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는 상대유한의 싯달타왕자가 하는 고행에서 절대무한의 부처님 삶으로 전환되는 순간입니다. 삶의 배경이 싯달타라는 거품에서 스스로 있는 "관자재"로 바뀌는 것입니다. 여기에 고행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고행을 포기하기 위하여 고행을 하여야 할 필요없이 처음부터 "내가 하는 수행"을 하지 않고 부처님의 무량광명이 드러나는 삶을 살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가 우리에게서는 처음부터 고행을 통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절대존재가 나의 마음속에 있고 나는 그 마음속에 있는 절대존재에 대한 믿음으로 삶의 배경을 절대와 무한에 두면 곧 바라밀다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새삼 이미 부처님께서 밝혀놓은 것을 부정하고 처음부터 새로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5) 믿음이란 마음속의 절대무한이 참나임을 믿는 것 불교의 믿음이란 것은 참다운 나는 절대무한임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깨닫건 깨닫지 못하건 상관없이 부처님께서 진리를 깨닫고 알려준 나의 참다운 존재는 절대존재로서 스스로 존재함을 믿는 것이 불교의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 깨달음의 복밭이 되는 것입니다. 나 밖에 또 다른 어떤 존재가 있어서 나에게 복을 준다거나 그런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물거품 같은 것을 가지고 나라고 착각하고 있으면서 그것을 그 나가 그대로 부처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