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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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5년07월22일(토) 10시42분50초 KDT
제 목(Title): 반야심경 2



2. 관자재보살

진실생명을 찾아가는 구도자

1) 자재는 스스로 있음

자재는 "스스로 있음"을 말합니다. 스스로 있다는 것은 만들어져서 존재한다는
말의 반대말입니다. 규정되어서 존재됨의 반대말입니다.
 "스스로 있음"은 그렇게 만들어진 "나"가 아니라
 본래부터 태어남이 없이 또한 죽지도 않는 그런 존재입니다. 이것을
"스스로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들이 "나"라고 알고 있는 그런 나의 영역은
만들어져서 존재하는 "나"입니다. 즉 우리가 "나"라고 말할 때의 그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나"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규정된 "나"입니다.
언제나 소유격에 의하여 규정되는 "나"입니다.
소유격에 의하여 존재된다는 것은 "나의 육체","나의 정신","나의 부모",
"나의 자식","나의 친척","나의 국가","나의 자동차","나의 명예",
"나의 종교","나의 철학","나의 하나님","나의 부처님" 등등의
소유물에 의하여 거꾸로 규정되어서 밖에는 인식되지 않는
"나" 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렇게 우리가 소유한 것에 의하여 규정된 "나"를 "나"로
생각합니다. 소유에 의하여 거꾸로 인지되는 "나"는 소유와 함께만
존재합니다. 소유가 사라지면 이 "나"도 사라지거나 또는 다른 소유물과
함께 변신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나"는 참으로 허망한 "나"일 수 밖에
없습니다.

백화점에 진열된 옷을 보고서 옷이 맘에 들어서 이 옷을 사면
참으로 기분이 좋겠다. 그런 생각으로 백화점의 점원에게
옷의 가격을 물어보았더니 생각보다 너무 비싼 것 같아서
갑자기 좋은 기분이 마음이 상합니다. 이럴 때, 처음에 옷이라는
소유물을 통해서 "나는 기분이 좋다"라고 말할 때의 나와
가격을 말한 점원으로 인하여 "나는 기분이 상했다"라고 말할 때의
나, 우리는 "나"라는 것을 항상 그런 수준에서 인지를 합니다.
그러니 언제나 그렇게만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그 나는 "허망"하기가
참으로 그지 없는 것입니다. 사실은 스스로 소유물을 통해서 자신을
구속하고서는 그 "나"에 속고 사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생활입니다.

그런데 소유한다는 것은 또한 소유하기 전에 무엇인가가
있어서 소유를 하게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게 소유한 것에
의하여 규정된 "나"가 아니라 즉 소유에 의하여 노예의 모습으로 있는 나가
아닌 소유 이전에 소유를 하려는 주인으로서의
"나"를 찾으려고 합니다. 어째서 그것을 찾으려고 하는 가 하면
지금 내가 "나"라고 인지하는 그 수준의 "나"는 온통 부자유하고
불안하고 상황이 어떻게 변할 지 몰라서
공포에 사로집히는(비록 그 공포를 즐거움과 쾌락으로 가려도)
"나"이기에 도저히 그 상태에서의
인생살이는 무엇인가 문제가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입니다.

소유와 함께 사라지거나 생기거나 하는 "나"가
아닌 소유의 주인으로서의 내가 있다면
그 나는 허망하지 않고 참으로 존재하는 "진실된 나"이고
스스로 존재하는 "자재"일 것이기 때문에 진실생명을 찾습니다.




2) 관자재보살은 진실생명을 찾아감

그러므로 허망한 "나"가 아니라 소유의 주인으로서의 스스로 존재하는
"나"를 보아야 하는데 그렇게 스스로 존재하는 나를 본다는 것은
또한 스스로 존재하는 나를 찾아간다는 말이됩니다. 따라서
"관자재"라고 합니다. 보살이라는 말은 소유에 의하여 규정된
자신을 부정하고 그 자신의 한계선상에서 또 다른 소유에 의한 보여지는
허망한 자신이 아닌 원래의 스스로 있는 존재에 의하여
삶을 살아보겠다는 사람을 말합니다. 아직 자신의 모습을 확연히 보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참다운 진실생명을 찾기 위하여 현재의 자기 자신의
한계성을 인정한 사람입니다. 즉 소유에 의하여 거꾸로 규정된 것이
"나" 였구나 라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여기가 출발점입니다.
이를 구도자라고 말합니다.

3) 관자재보살은 관세음보살

관자재보살은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세상의 소리들
세상의 모든 생명에 의하여 살려지고 있음을 인지한 그러므로 자신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세상소리에 응답하여 이 세상을 살리는데
큰 마음을 내신 분을 말합니다. 이러한 관세음보살님을 "진실생명"을 끝없이
추구하는 구도자라는 뜻에서는 "관자재보살"이라고 말합니다.

4) 관자재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

보살은 "나"라고 지금까지 여기고 있던 것이 소유에 의하여
보여진 "허망한 나"를 인지하고 스스로 있는 "참으로 진실된 나"를
찾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반야심경은 관자재보살이 사리불 존자에게 설한 경전이라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경전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관자재보살이 김 아무개.. 이 아무개 처럼 따로 있는
존재가 아니라 부처님 자신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인생의 괴로움과 자신의 부자유함을 느끼고
출가를 하셨습니다. 출가란 것은 머리깎고 승복을 입는 것을 뜻하기도
하겠지만 진정한 의미는 바로 "소유에 의하여 불안에 휩싸인 존재"에
대한 극복을 시도함을 말합니다. 자신의 부자유함에 대한 인식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소유 또는 한계성의 파괴를 시도함을
출가라고 하는 것이지 괴로움 속세를 피해서 잡음없는 편안함을
택함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소유에 의하여 규정된 불안한 나에서 탈피하여 스스로 있는
진실생명을 찾아가서 찾아내신 분이기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곧 관자재보살인 것입니다.

5) 스님을 공경함의 의미

출가의 의미가 소유에 의하여
인식된 자아로 부터의 부자유함과 그 한계성의 파괴가 출가임에도
불구하고 삭발을 하고 법복을 입은 스님을 공경하여야 하는 것은
바로 스님들이 입고 있는 법복이 출가의 의미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절에 있는 불상에 절을 하는 것이 불상이라는 형식성에
절하는 것이 아니라 불상이 상징하는 진리인 불법에
절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님이라는 형식성에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스님이 출가의 정신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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