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5년07월04일(화) 17시28분11초 KDT 제 목(Title): 글쎄요.. 수행을 열심히 하겠다는 것은 좋습니다. 그렇지만 바닷물을 퍼다가 아무리 부어도 쪽박에는 쪽박 만큼만 들어가는 법입니다. 아함경이 불교의 근본경전이라고들 요새 말많은 식자층에서 말들하지만 대승불교권에서는 읽혀지지 않은 경전입니다. 그건 아함경이 잘못된 경전이라서가 아니라 아함경이 돈오법을 말하고 있지만 돈오법을 말하기 위한 준비단계가 너무 많아서 읽는 사람들이 돈오는 보지를 못하고 돈오를 말하기 위한 예비설법만 보기 때문에 갈 수록 깨달음과 멀어질 위험이 많기 때문에 대승불교권에서는 대장경속에 있었어도 보지 않은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때문에 혼란스러운 모양이신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중생심이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불법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리로 돌아오는 가르침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도가 눈앞에 현현하지만 무언가 해야 한다고 아우성치면서 도에서 눈이 멀어집니다. 그것을 무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그 아우성치는 무명 또는 미혹을 제거하는데 계속 아우성치는 방법으로 되겠습니까? 원래 있던 그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기에 돈오라고 합니다. 원래 처음부터 존재하였던 것을 발견하기에 돈오이지 없는 것을 만들어내거나 가짜의 아우성 세계를 계속 만들어 나가면 발견이 아니라 조작 아니겠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싫으면 중생이 하지 않고 부처가 하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임을 아시면 될 것 같습니다. 수행4과는 부처님이 어떤 단계나 형상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당시에 이미 있었던 수행4과라는 틀을 부정하시기 위하여 수행4과를 거론하실 뿐입니다. 화엄의 십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지보살을 1 단계 보살위에 2 단계 보살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 수십억년을 윤회해도 좋은 결과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화엄경을 정말 읽으신 분인지 아니면 다이제스트판의 화엄철학서를 읽으신 분인줄 모르나 화엄경 십지품을 읽어보십시요. 단 경전을 읽을 때는 다음을 주의하십시요. 경전에서 부처님이 하시고자 하는 말은 명사에 있지 않습니다. 수식어와 동사에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인생이 고정되지 않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개념어는 이미 부처님 당시에 있던 것들이고 부처님은 그 개념어라는 고정틀을 깨기 위하여 개념어를 이용할 뿐입니다. 일례로 중생이 끝이 없으나 모두 건지겠습니다. 라는 말에서 중생이라는 개념어만 보고 끝이 없다는 것과 모두를 건진다는 말의 의미를 보지 못하면 경전을 보아도 본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화두선을 하면서 아함을 들먹거리는 것은 선을 완전히 잘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새 들어서 아함이 비교적 자기가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경하면 아함이고 선하면 화두선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식자층에 많은데 아함과 화두선 조화이루기 어려운 것입니다. 아함은 경안이 밝아지고 화두가 무르익어갈 때 보면 그렇게 기가막힌 경전이 없지만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보면 뭔가 그럴 뜻은 한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경전은 경전을 읽어야 하고 가능하면 독송을 해야 하는 것이지 요약서 같은 것을 읽으면 아무런 도움 되지 않습니다. 경전의 마음은 모든 문맥을 통해서 흐르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이 자기 취향대로 쓴 요약서 보지 마십시요. 내가 이해하기 좋은 경전, 나의 성향에 많는 불법을 스스로 만들어 가면서 수행하면 아무런 득이 없는 것이 불법입니다. 미세번뇌라는 것은 유식에서는 아뢰야식의 번뇌라고 말하는데 법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불법이 있다. 모든 것은 인연이야 모든 것은 공이야 그런 말에 집착하는 것을 미세번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 역시 아우성치는 세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