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5년07월04일(화) 17시29분20초 KDT 제 목(Title): [응무소주이생기심] 응무소주이생기심 마땅히 머무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무위법) 이 말만 알아들으면 올라가는 공부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육조혜능이 이 말 한마디에 깨치고 들어갔지 따로 참선이란 형태를 취한적이 없습니다. 그럼 이 응무소주이생기심이란 말이 도데체 무슨 말인지를 알아보겠습니다. 이 말이 마음을 내지 말라는 말은 틀림없이 아닙니다. 마음을 내라고 했지 마음을 내지 말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번뇌","망상" 등등의 말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들 모두가 마음을 낸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낸것이 번뇌요 망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응무소주이생기심이라고 할 때 그 말이 번뇌와 망상을 끊으라는 말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번뇌망상을 끊는 것이 불법이라면 이생기심(마음을 내라)이란 말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기에 빠진다거나 편공에 떨어지는 것은 이생기심이라는 것은 보지도 않고 응무소주만 따지기에 생기는 병입니다. 그렇다고 번뇌망상 그대로가 다 불법이라고 내버려 두는 것도 잘못입니다. 그것은 이생기심은 해도 응무소주는 못하는 것이고 중생심(중생이라고 우기는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 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생기심은 우리들 모두 다 지금도 잘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번뇌라고 하건 망상이라고 하건에 관계없이 모두 잘 하고 있는 것이 이생기심입니다. 지금 잘하고 있는 이것은 절대로 손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화두를 의심하되 번뇌망상은 내버려두라고 하는 것이고 염불을 하되 번뇌망상은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이생기심은 그대로 내버려두고 응무소주를 하여야 하는데 이 응무소주란 것은 마음이 나오는 근본자리가 무엇이냐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이라는 인생관속에서 나오면 응무소주가 아닙니다. 나에 머물렀고, 너에 머물렀고, 중생이라는 세계에 머물렀고, 너 잘나고 나 잘났다는 곳에 머물렀기 때문에 응무소주가 아닙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마음을 내되 부처라는 절대적인 세계속에서 마음을 내라는 것입니다.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중생도 없고, 잘나고 못남도 없는 절대의 세계에서 마음을 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내는 것이 무위법이지 번뇌라고 억제하고 망상이라고 틀어막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중생이라는 것만 부정하고 나는 본래 부처라는 것만 긍정하면 번뇌나 망상 따위에는 신경쓸 것 없이 응무소주이생기심의 무위법을 할 수 있지만 언제나 밑바탕에서 기초조건이 "나는 중생이요" 하면서 화두를 천년 의심해도 소용없고 염불을 백년해도 아무런 소용없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지나가다가 한마디 알아듣고 무위법에 들어가고 조금 둔한 이는 나무아미타불 열번 하고 무위법에 들어가고 아주 둔한 이는 몇년을 수행한 후에 무위법에 들어가도 다 똑같이 돈오로서 무위법에 들어가지 차츰차츰 닦아서 무위법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차츰차츰이란 것은 응무소주가 아니기에 영원히 미혹속에서 헤메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대승의 정법이란 끝없이 중생인 나를 부정하고 부처인 나를 긍정하는 수행법입니다. 그것도 주체가 중생이 아니라 부처가 해야 되는 것입니다. 부처가 본래 부처였음을 깨닫기에 돈오인 것이지 중생이 부처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인 나를 부정한다고 하는 것과 부처인 나를 긍정하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둘다 할 필요도 없고 중생인 나를 절대부정만 하면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 부처이기에 부처가 드러나는 것이고 부처인 나를 절대긍정만 하면 밝음에 의하여 어두움이 사라지기에 중생은 저절로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줄줄이 이야기를 해도 줄이면 "나무아미타불"입니다. 팔만장경이 다 이것 하나를 줄줄이 설명할 뿐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조사스님들이 법문하는 중간중간에 "나무아미타불"을 노래한 것입니다. 응무소주이생기심이나 나무아미타불이나 팔만대장경이나 다 같은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