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fox23 (튜티) 날 짜 (Date): 2000년 4월 15일 토요일 오후 04시 55분 21초 제 목(Title): 반야심경 강의 The Heart Sutra http://zen.co.kr 그대 내면의 붓다. 고귀하고 성스러운 지혜의 완성자에게 귀의합니다. 거룩한 분이며 보시사트바인 관세음(觀世音)께서는 피안에 이른 지혜의 깊은 과정 속에서 움직이고 계셨다. 그가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오온(五蘊)이 있을 뿐이었으며, 그 오온(五蘊)의 자성(自性)이 공(空)하다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대 안의 붓다에게 절한다. 그대는 미처 모르고 있겠지만,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겠지만 그대는 붓다이다. 아무도 붓다 이외의 다른 존재가 될 수 없다. 불성(佛性)은 그대 존재의 본질적 핵심이다. 이것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이다. 그대는 불성으로부터 나왔다. 불성은 원천인 동시에 목적이다. 우리는 불성으로부터 와서 불성으로 되돌아간다. 이 '불성'이라는 하나의 낱말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불성은 삶이라는 원(圓)을 완결짓는다. 불성은 알파(alpha)에서 오메가(omega)까지 일체를 포괄한다. 그러나 지금 그대는 깊이 잠들어 있다. 그대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른다. 그대가 붓다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대자신이 이미 붓다라는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 그대자신의 원천으로 되돌아가면 그뿐이다. 그대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기만 하면 된다. 자신의 본래면목과 직면하면 불성이 드러날 것이다. 그대가 자신의 본래 면목을 보게 되는 날, 온 우주 전체가 깨달음을 얻는다. 특정한 한 개인이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한 개인이 깨달을 수 있겠는가? 특정한 '한 사람'이라는 개념자체가 깨닫지 못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나'가 깨닫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을 얻기에 앞서 '나'가 떨어져 나가야 한다. 그러니 어떻게 '나'가 깨달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내가 깨닫는 날 우주 전체가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의 순간 이후로 나는 붓다 이외의 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수 많은 형태와 이름을 갖고 있으며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그들 모두가 붓다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우주삼라만상이 붓다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 안의 붓다에게 경의를 표한다. 여기 이렇게 많은 붓다가 한 자리에 모인 것을 보니 참으로 기쁘다. 그대가 내가 있는 이 곳으로 왔다는 사실 자체가 그대자신의 불성을 깨닫는 출발점이다. 그대의 가슴 속의 자리잡은 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그대자신의 불성에 대한 사랑과 존경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나에 대한 신뢰는 그대 외부의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곧 그대자신에 대한 신뢰이다. 나를 신뢰함으로써 그대는 자신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나에게 가까이 옴으로써 그대는 그대자신과 가까워질 것이다. 이미 있는 것을 인식하기만 하면 된다. 다이아몬드는 이미 거기에 있다. 다만 그대가 잊고있을 뿐이다. 또는 애초부터 그 다이아몬드에 대해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여기 에머슨(Emerson)의 유명한 말이 있다. "인간은 몰락한 신이다." 나는 한편으로는 이 말에 동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통찰력에는 어떤 진리가 담겨 있다. 그것은 인간이 본래 제 모습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이다. 이 말에는 분명히 통찰력이 깃들어 있다. 하지만 다소 전도(顚倒)되어 있다. 인간은 몰락한 신이 아니라, 만들어지고 있는 신이다. 인간은 움트고있는 붓다이다. 싹은 진작부터 존재했으며, 이 싹은 언제라도 꽃으로 피어날 수 있다. 다만 얼마간의 노력, 약간의 도움만 있으면......이 도움이 애초에 없었던 것을 새로이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거기에 있다! 그대의 노력은 다만 그것을 드러내는 일에 불과하다. 이미 거기 감춰져 있던 것을 밝혀낼 뿐이다. 이것은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 진리는 이미 거기에 있다. 진리는 영원한다. 이 경문(經文)들을 주의깊게 들어라. 이 경문들이야말로 불교 문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이 경문들은 심경(心經;The Heart Sutra)이라고 불려진다. 이 경전은 불교의 가르침 중에 심장부인 것이다. 나는 아주 처음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이 지점에서부터 출발해야 불교가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대 자신이 붓다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새겨라. 어쩌면 이 말이 뻔뻔하게 들리거나 허무맹랑한 가설(假說)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대는 이 말을 전적으로 믿기가 힘들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그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그대가 붓다라는 이 사실을 하나의 씨앗으로 그냥 놔두어라. 이 사실을 둘러싸고 많은 일이 일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이 사실을 중심으로 삼아야만 비로소 그대는 이 경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전에 실린 경문들은 말할 수 없이 강력하다. 아주 간결하고 함축적이지만 씨앗과 같은 잠재력을 간직하고 있다. 그대가 붓다라는 사실을, 싹트고있는 붓다라는 사실을 하나의 토양으로 삼아라. 그대가 생성되어가는 존재로서 어머어마한 잠재력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새겨라. 아무 것도 결여된 것이 없다. 이미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 그대가 해야 할 일은 다만 이치에 맞게 정리하는 것 뿐이다. 조금 더 많은 각성과 의식이 필요할 뿐이다......보물은 이미 거기에 있다. 그대는 내면의 집 안에 작은 등불 하나만 밝혀놓으면 된다. 일단 어둠이 사라지면 그대는 더 이상 거지가 아니다. 그대는 붓다가 된다. 그대는 위대한 황제가 된다. 왕국 전체가 그대의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선언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자신을 거지로 믿는다면 이런 선언은 불가능하다. 자신을 거지로 생각하는 한 이 선언은 꿈조차 꿀 수 없다. 유사 이래 수 많은 성직자들이 "너는 거지이다. 너는 무지하다. 너는 죄인이다."라는 관념을 주입시켜 왔다. 그대는 깊은 최면에 걸려버렸다. 이 최면 상태에서 깨어나야 한다. 이 최면 상태를 파괴하기 위해 나는 "그대 안의 붓다에게 절한다."는 말로 시작하는 것이다. 내게는 그대들 모두가 붓다이다. 이 기본적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깨달음을 얻으려는 그대의 모든 노력은 허사이다. 그대는 이미 '그것'이다! 이런 이해를 묵시(默示)적으로 전제해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출발점이다. 그렇지않으면 그대는 길을 잃을 것이다. 이것이 올바른 출발점이다. 이런 관점으로부터 출발하라. 이런 관점이 "나는 붓다이다."라는 일종의 에고를 만들어낼까봐 염려하지 말라. 그런 걱정은 필요없다. 이 반야심경의 모든 구절이 에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줄 것이다. 오직 에고만이 실재(實在)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것은 실재한다. 세상은 환상이며 영혼만이 실재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 오직 '나' 만이 진실이며 다른 모든 것은 환상이고 마야(maya)일 뿐이라고 설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붓다는 정반대로 말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나'만이 허위이며 다른 모든 것은 실재이다. 나는 붓다의 관점에 동의한다. 붓다의 통찰력은 매우 예리하다. 가장 깊이 꿰뚫어보는 안목이 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붓다의 통찰력을 능가하지 못했다. 그만큼 깊고 높은 차원을 꿰뚫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대는 붓다이다. 이런 관점에서 시작하라. 그대 몸의 세포 하나하나, 마음 속의 모든 상념들이 이 사실을 선언하게 하라. "나는 붓다이다!"라는 이 선언이 그대 존재의 구석구석까지 파고들게 하라. 그리고 '나'라는 에고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라......이 문제는 저절로 사라지게 되어 있다. '나'와 불성(佛性)은 공존할 수 없다. 불성이 드러나면 '나'는 자취를 감춘다. 불을 밝히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반야심경의 경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약간의 구조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고대의 불교 경전은 일곱 가지의 사원에 대해 말한다. 수피(Sufi)들이 일곱 개의 골짜기를 언급하고, 힌두교에서 일곱 개의 차크라(Chakra)를 말하는 것과 같다. 첫번째 사원은 육체의 사원, 두번째는 심리-신체(psycho-somatic)의 사원, 세번째는 심리학적(psychological) 사원, 네번째는 심리-영적(psycho-spiritual)인 차원, 다섯번째는 영적(spiritual)인 사원, 여섯번째는 영성-초월의(spiritual-transcendental)의 사원이다. 그리고 일곱번째로 궁극의 사원, 사원 중의 사원은 초월(transcendental)의 사원이다. 이 반야심경은 일곱번째 사원에 해당한다. 이 경전은 일곱번째 사원에 든 자,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경지에 오른 자의 선언이다. 이것이 '프라즈나 파라미타(prajna-paramita)'라는 산스크리트어(語)의 의미이다. 프라즈나 파라미타, 즉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는 초월의 세계에 대한 지혜, 저 피안(彼岸)의 경지로부터 온 지혜이다. 이 지혜는 모든 종류의 동일시(同一視)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낮은 것이나 높은 것, 이 세상이나 저 세 상을 막론하고 모든 동일시에서 벗어났을 때, 결코 아무 것에도 동일시되지 않을 때 이 지혜가 찾아온다. 각성의 불꽃이 연기조차 없이 순수하게 타오를 때 반야바라밀다라는 지혜가 찾아든다. 이런 까닭에 불교인들이 이 아주 작은 경전을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불교인들이 이 경전을 심경(The Herat Sutra)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때문이다. 이 경전은 종교의 핵심, 종교의 심장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첫번째 육체의 사원은 힌두교에서 말하는 물라다르 차크라(muladhar chakra)에 대응한다. 두번째 심리 신체의 사원은 스바디스탄 차크라(svadisthan chakra), 세번째 심리학적 사원은 마니뿌라 차크라(manipura chakra), 네번째 심리 영적인 사원은 아나하타 차크라(anahatta chakra), 다섯번째 영적인 사원은 비슈드하 차크라(vishudha chakra), 여섯번째 영성 초월의 사원은 아즈나 차크라(ajna chakra), 일곱번째 초월의 사원은 사하스라르 차크라(sahasrar chakra)에 대응한다. '사하스라르'는 일천 장의 꽃잎을 가진 연꽃을 의미한다. 이 연꽃이 궁극적인 개화(開花)의 상징이다. 감추어진 게 아무 것도 없는 상태, 모든 것이 드러나고 현현(顯現)된 상태이다. 일천 장의 꽆잎을 가진 연꽃이 활짝 피어났다. 하늘 전체가 이 꽃의 향기와 아름다움, 그 축복으로 충만하다. 현대 세계는 인간의 가장 내밀(內密)한 핵심을 탐구하는 작업을 이미 시작했다. 이 현대의 노력이 어디까지 진전되었는지 알아보는 게 좋을 것이다. 파블로프(Pavlov)와 스키너(B.F.Skinner)를 비롯한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계속해서 육체적 사원, 즉 물라다르 차크라의 수준에서 맴돌고 있다. 그들은 "인간은 육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첫번째 육체의 사원에 얽매여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오직 물질적 육체를 통해서만 인간을 설명하려고 한다. 이런 태도는 올바른 이해를 가로막는 장애가 된다. 그들은 좀더 고차원적인 영역에 대해 열려있지 않다. 애초부터 육체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단정해 버리면 탐구의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이런 태도는 편견으로 굳어진다. 공산주의자, 막시스트(Marxist), 행동주의 심리학자, 무신론자들은 "인간은 육체일 뿐."이라고 믿는다. 이런 믿음 자체가 더 고차원적인 영역으로 가는 문을 닫아 버리고, 마침내 그들은 장님이 되고 만다. 물론, 물질은 분명히 존재한다. 물질은 가장 명백한 현상이므로 굳이 증명할 필요도 없다. 물질적 육체는 분명히 존재하므로 증명하려고 애쓸 필요조차 없다. 그리고 증명할 필요도 없는 이유로 해서 육체만이 유일한 실체로 인정된다. 이것은 완전히 넌센스(nonsense)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모든 존엄성을 상실한다. 성장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성장해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면 삶에는 어떠한 존엄성도 있을 수 없다. 인간은 하나의 사물로 전락한다. 이때 그대는 가능성을 향해 열려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대에게는 육체 이상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육체에 불과하다. 그대는 먹고, 배설하고, 섹스하고, 아기를 낳을 것이다. 이런 일을 되풀이 하다가 어느 날엔가 덧없이 죽을 것이다. 세속적이고 하찮은 일이 기계적으로 반복될 뿐이다. 그러니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떻게 시(詩)와 춤이 있을 수 있겠는가? 스키너는 [자유와 존엄을 넘어서:Beyond Freedom and Dignity]라는 책을 썼다. 그러나 이 책은 '넘어서'라는 말대신 [자유와 존엄성의 아래로:Below Freedom and Dignity]라고 불려져야 옳다. 이 책은 자유와 존엄성 이하의 관점을 나타내고 있다. 인간에 대해 가장 저차원적이고 추악한 관점을 표방하고 있다. 이것을 명심하라. 육체에는 아무 것도 잘못된 게 없다. 나는 육체에 반대하지 않는다. 육체는 아름다운 사원이다. 다만 육체를 전부라고 여기는 그 생각이 추한 것이다. 인간은 일곱 개의 칸을 가진 사다리에 비유될 수 있다. 그런데 그대는 첫번째 칸에 동일시된다. 이렇게 되면 아무데로도 나아가지 못한다. 사다리는 이 세상과 피안(彼岸)의 세계를 이어준다. 이 사다리는 물질과 신을 연결시킨다. 그러므로 사다리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사용되기만 한다면 첫번째 칸이라고 해도 전혀 문제될 게 없다. 만일 이 첫번째 칸을 딛고 올라갈 디딤돌로 여긴다면 이것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일이다. 이때 그대는 육체에 감사를 표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다리의 나머지 여섯 부분을 잊고 오로지 첫번째 칸을 숭배하기 시작한다면, 사다리 전체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첫번째 단계에 갇혀 버린다면, 이때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이때 그 칸은 더 이상 하나의 단계가 아니다. 하나의 단계는 다른 단계와 이어질 때에 한해서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의 칸은 사다리 전체의 일부일 때에 한해서 칸이 될 수 있다. 만일 그것이 더 이상 칸이 아니라면 그대는 거기에서 막혀 버린다. 물질적인 사람들은 항상 경직되고 고착되어 있다. 그들은 항상 무엇인가 결여되었다고 느낀다. 그들은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지 못한다. 그들은 원을 그리고 돌고있을 뿐이며 매번 같은 곳으로 되돌아온다. 그래서 그들은 지치고 권태를 느낀 나머지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그들의 뭔가 자극적인 것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뭔가 새롭고 신선한 일이 일어나기를 고대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삶에 무슨 새로운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열중하고 있는 모든 것은 장난감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다음과 같은 프랭크 쉬드(Frank Sheed)의 말을 음미해 보라. "인간의 영혼은 삶의 목적과 의미를 희구하며 절규하고 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여기 전화기가 있다.', '봐라, 여기 텔레비젼이 있다!'하고 말한다. 이것은 엄마를 그리워하며 울고있는 어린 아기에게 사탕을 주거나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달래는 것과 같다. 급격한 발명의 물결이 우리의 정신을 빼앗아갔다. 그래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잊게 만들었다." 현대 세계가 그대에게 제공한 모든 것은 사탕이나 장난감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사실, 그대는 엄마를 그리워하며, 사랑을 그리워하며 울고 있었다. 그대는 깨어있는 의식을 희구했으며 삶의 의미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세상은 "봐라, 여기 전화기가 있고 텔레비젼이 있다! 우리는 너를 위해 이렇게 멋진 것들을 많이 가지고 왔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대는 잠시 그것들을 가지고 노는데 정신을 쏟는다. 하지만 곧 그대는 싫증이 나고 따분해져서 다시 새로운 장난감을 찾기 시작한다. 이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다. 어떻게 우리가 이런 식으로 계속 살아가는지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우리는 첫번째 칸에 갇혀버린 것이다. 이것을 명심하라. 그대는 육체 안에 있지만 육체가 그대는 아니다. 그대는 육체가 아니다. 이것을 끊임없이 자각하라. 그대는 육체 안에서 살아간다. 육체는 아름다운 거처이다. 지금 나는 육체를 반대하는 사람이 되라고 부추키는 게 아니다. 유사 이래 소위 유심론자(spiritualist)라는 자들이 그래왔듯이 그대의 육체를 부정하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단 한순간도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유물론자들은 육체가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른 극단에 서있는 사람들은 육체가 환상일 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육체를 부숴라! 그래야 환상이 깨지고 그대가 실재(實在)가 될 수 있다." 이렇게 극단적인 입장은 반작용에 불과하다. 유물론 자체가 유심론이라는 반동(反動)을 잉태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똑같은 사업을 벌이는 동업자이다. 육체는 아름답다. 육체는 실재한다. 육체는 삶의 권리가 있으며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육체는 신의 선물이다. 그러니 단 한순간이라도 육체에 반대하지 말라. 또한 "나는 육체일 뿐."이라고도 생각하지 말라. 그대는 육체보다 훨씬 거대한 존재이다. 육체를 하나의 도약대로 이용하라. 두번째로 심리-신체의 사원, 스바디스탄 차크라의 세계이다. 프로이드 류(流)의 정신분석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것은 스키너와 파블로프보다 다소 높은 단계이다. 프로이드는 심리학의 신비 안으로 좀더 깊이 들어갔다. 그는 단순히 행동주의 심리학자가 아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꿈 이상을 넘어가지 못했다. 그는 시종일관 꿈을 분석하는데 그쳤다. 꿈은 그대 안에 환상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꿈은 암시적이고 상징적이다. 꿈은 의식 세계로 폭로되는 무의식 세계의 메시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꿈에 집착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꿈을 이용하되 꿈과 동일시되지는 말라. 그대는 꿈이 아니다. 프로이드파(派)처럼 꿈에 관해 요란을 떨 필요가 없다. 프로이드파(派)는 꿈의 세계에 전념하는 것 처럼 보인다. 꿈에 주목하라. 꿈에 대해 분명한 관점을 갖고 꿈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이해하라. 그러면 그대의 꿈을 분석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찾아갈 필요가 없다. 만일 그대가 자신의 꿈을 분석하지 못한다면 어느 누구도 그대의 꿈을 분석해낼 수 없다. 그대의 꿈은 그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꿈은 철저하게 개인적이다. 어느 누구도 그대와 같은 꿈을 꿀 수 없다. 지금까지 그대와 같은 식으로 꿈꾼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대의 꿈을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일 누군가 그대의 꿈을 해석한다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해석일 뿐이다. 오직 그대만이 그대자신의 꿈을 들여다볼 수 있다. 실제로는 꿈을 분석할 필요도 없다. 꿈을 전체적으로 관찰하라. 분명한 눈으로, 주의깊은 의식으로 보라. 그러면 꿈이 전하는 메시지를 들을 것이다. 꿈은 아주 큰 소리로 외치고 있다! 3년, 4년, 5년, 7년 동안 정신분석을 받으러 다닐 필요가 없다. 밤마다 꿈을 꾸고 낮에는 그 꿈을 분석하기 위해 정신분석가를 찾아가는 사람은 서서히 꿈의 세계에 포위당한다. 첫번째 단계가 물라다라 차크라, 즉 육체적 차원에 사로잡혀 있듯이, 두번째 단계는 성욕에 사로잡히고 만다......두번째의 심리-신체적 단계는 다름아닌 성(性)이기 때문이다. 두번째 단계는 모든 것을 성(性)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하기 시작한다. 프로이드파(派)에게 가보라. 그들은 그대가 무엇을 하건 모든 것을 성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릴 것이다. 그들에게 성보다 높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진흙 속에서 살아갈 뿐, 연꽃을 믿지 않는다. 그들에게 연꽃을 갖고 가보라. 그들은 연꽃을 보는 즉시 그것을 진흙으로 환원시켜버릴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것은 더러운 진흙일 뿐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것은 더러운 진흙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것은 진흙일 뿐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이렇게 그들은 모든 것을 근원으로 환원시키고 그것만이 실재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세상의 모든 시(詩)도 성(性)으로 전락한다. 아름다운 모든 것들이 섹스와 성도착증, 그리고 성적인 강박관념으로 환원된다. 미켈란젤로가 위대한 예술가라고? 프로이드파(派)의 눈으로 보면 미켈란젤로의 예술은 성욕의 표출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 프로이드파 사람들은 어처구니없는 결론으로 치달린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미켈란젤로, 괴테,바이런같은 인물이 인류에게 커다란 기쁨을 안겨주는 위대한 작품들을 남겼다해도 그 모두가 억압된 성욕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어쩌면 괴테는 자위행위(自慰行爲)를 하려다가 제지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위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지만 그들이 괴테가 되지는 않는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말이다. 프로이드는 화장실 세계의 거장(巨匠)이다. 그는 화장실에 산다. 화장실이 그의 사원이다. 그의 눈으로 보면 모든 예술이 정신질환의 일종이다. 아름다운 시(詩)도 정신병이다. 모든 것이 성도착증(性倒錯症)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프로이드식의 정신분석이 득세한다면 세상에는 칼리다스(Kalidas)도, 셰익스피어도, 미켈란젤로도, 모짜르트도, 바그너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비정상이다. 프로이드의 관점에서 보면 이 사람들은 정신병 환자이다. 가장 위대한 사람들조차 가장 낮은 차원으로 전락한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붓다도 정신병 환자에 불과하다. 붓다의 모든 말이 억압된 성욕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런 접근방식은 인간의 위대성을 추악함으로 전락시켰다. 이것을 경계하라. 붓다는 결코 환자가 아니다. 사실, 진짜 환자는 프로이드 자신이다. 붓다의 침묵, 붓다의 기쁨, 붓다의 지복은 병이 아니다. 그것은 최고로 건강한 상태이다. 노래하고 춤추지 못하는 사람들, 축제를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 기도하지도 못하고 명상하지도 못하는 사람들, 창조적인 일이라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 프로이드에게는 이런 사람들만이 정상인이다. 직장에 나가고, 집으로 퇴근하고, 먹고, 마시고, 잠자고, 그러다가 창조적인 흔적이라곤 조금도 남기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사람들만이 정상인이다. 이런 정상인들은 아주 평범하고 둔하고 시체처럼 보인다. 어쩌면 프로이드 자신이 비창조적인 인간이었기 때문에 창조성을 정신질환으로 비난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심이 든다. 그는 평범한 인간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그자신이 너무나 평범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위대한 사람들에 의해 감정적인 상처를 받았던 것이다. 세번째는 심리학적인 단계이다. 아들러(Adler)는 심리학의 세계에 산다. 권력에의 의지가 그의 세계이다. 뭔가 있어보이기는 한다. 에고 중심적이기는 하지만 그럴듯한 일면이 있다. 프로이드보다는 다소 열려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프로이드가 모든 것을 성(性)으로 환원시켰듯이 아들러는 모든 것을 열등 컴플렉스(inferiority complex)로 돌려버린다. 아들러의 눈으로 보면, 사람들이 위대한 인물이 되고자 하는 것은 열등감 때문이다. 깨닫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는 권력 투쟁(trip of power)을 하는 중이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틀린 시각이다. 우리는 붓다, 그리스도, 크리슈나 같은 사람들을 보아왔다. 그들은 철저하게 자신을 내맡기고 머리를 숙였다. 그들의 태도를 권력 투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명의 붓다가 피어날 때 그에게는 우월감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다. 그는 존재계 전체에 엎드려 절한다. 그에게는 "나는 너보다 성스럽다."는 생각이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성스럽다. 티끌 한점까지 신성하다. 그는 자신을 우월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부터 우월해지기를 열망하지도 않았다. 붓다는 결코 열등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왕자로 태어났다. 따라서 열등감의 문제는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위치에 있었다. 열등감을 느낄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나라에서 가장 부유하고 막강한 사람이었다. 더 이상 얻을 권력도 없었고, 더 이상 달성할 부(富)도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이 지상에 태어난 최고 미남자(美男子) 중의 한명이었다. 그리고 최고로 아름다운 미녀를 곁에 두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들러는 어떻게 해서든지 열등감을 찾아내려고 애쓸 것이다. 그는 인간이 에고 이외의 다른 목적을 가질 수 있다고는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프로이드보다 다소 높은 단계이다. 에고는 성(性)보다 높은 차원이다. 많이 높지는 않지만 다소 높은 차원이다. 네번째 단계는 심리 영적인 차원이다. 가슴의 센터인 아나하타 차크라가 여기에 속한다. 융(Jung)과 아싸기올리(Assagioli)를 비롯한 사람들이 이 영역까지 뚫고 들어갔다. 그들은 파블로프, 프로이드, 아들러보다 높은 차원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더 많은 가능성의 문을 열었다. 그들은 비합리적인 세계, 무의식의 세계를 받아들였다. 말하자면, 그들은 이성적인 세계에 국한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비이성적인 세계까지 받아들였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더 이성적인 사람들이다. 비합리적인 세계가 거부되지 않고 수용되었다. 여기가 현대심리학의 종점이다. 사다리의 네번째 칸인 것이다. 사다리 전체를 놓고 보면 네번째 칸은 정 중간 단계이다. 아래쪽으로 세 칸이 있고 위쪽으로도 세 칸이 있다. 현대 심리학은 아직 완전한 학문이 아니다. 중간 단계에 매달려있을 뿐이다. 따라서 현대 심리학은 아주 불안정하다.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다. 현대심리학은 경험적이라기 보다는 가설체계(假說體系)에 가깝다. 그래서 지금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다섯번째는 영적인 단계이다. 이슬람교, 기독교, 힌두교 등의 거대한 조직 종교가 이 다섯번째 단계에 고착되어 있다. 그들은 영성(靈性) 이상을 넘어가지 못한다. 모든 조직 종교가 이 차원에 머물러 있다. 여섯번째는 영성 초월의 단계이다. 요가를 비롯한 여타 방편들이 여기에 속한다. 조직 종교와는 거리가 먼 방편들, 교리적이기 보다는 경험적인 방편들이 여러 시대에 걸쳐 많이 개발되어 왔다. 이 단계에서 그대는 몸과 마음을 갖고 무엇인가 해야 한다. 그대의 내면에 어떤 조화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래야 이 조화의 구름을 타고 일상적인 세계를 벗어날 수 있다. 요가는 이런 모든 방편을 포괄한다. 이것이 여섯번째 단계이다. 일곱번째는 초월의 단계이다. 탄트라, 도가(道家), 선(禪)이 여기에 해당한다. 붓다의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는 일곱번째 차원에 속한다. 반야바라밀다는 초월의 지혜를 의미한다. 그대가 모든 단계를 통과하고 순수한 각성 자체가 되었을 때, 순수한 주시자, 순수한 주체성(subjectivity)만이 남았을 때 비로소 이런 지혜가 찾아든다. 초월적 차원에 도달하지 않는 한 인간은 장난감과 사탕을 필요로 한다. 거짓된 의미들이 제공되어야 할 것이다. 며칠 전 나는 미제 자동차의 광고를 보았다. 멋진 자동차 위에 '믿을만한 물건'이라는 글귀가 씌여 있었다. 지금까지 인간이 이토록 저급한 차원으로 추락한 적이 없었다. 믿을만한 물건! 그대는 자동차를 믿는가? 그렇다, 사람들은 물질을 믿는다. 사람들은 집을 믿고, 자동차를 믿고, 은행 통장을 믿는다. 주위를 둘러보면 그대는 깜짝 놀랄 것이다. 신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에 캐딜락이나 링컨(Lincoln)이 버티고 있다! 진짜 신은 사라졌지만 인간은 새로운 신을 만들었다. 영화 배우들이 신으로 군림한다. 역사상 인간의 의식이 이토록 낮은 차원으로 굴러떨어진 것은 처음있는 일이다. 설령 그대가 간혹 신을 기억한다해도 그것은 공허한 단어에 불과하다. 그대는 괴롭거나 절망을 느끼는 경우에만 신을 사용한다. 마치 아픈 사람이 아스피린을 찾듯이 말이다. 소위 종교라고 불리는 것들이 그대에게 이런 식의 믿음을 심어주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루에 세번씩 신을 복용하라. 그러면 아무 고통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고통을 느낄 때마다 신을 떠올린다. 그러나 신은 아스피린이 아니다. 신은 진통제가 아니다. 습관적으로 신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직업적으로 신을 상기한다. 성직자들이 그런 부류이다. 성직자는 직업적으로 신을 떠올린다. 사실, 그는 신과 아무런 관련도 없다. 그저 이것을 생계수단으로 삼고있을 뿐이다. 그는 신을 떠올리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이렇듯 습관적으로 또는 직업적으로 신을 상기하는 사람들은 있어도 깊은 사랑으로 신을 떠올리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은 불행에 빠져 있을 때 신의 이름을 부른다. 기쁨과 행복에 충만할 때에는 아무도 신을 떠올리지 않는다. 사실은 이런 때가 신을 기억하기에 가장 적당한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즐거워할 때, 엄청난 즐거움으로 충만할 때 그대는 비로소 신과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불행할 때 그대는 신과 멀리 떨어져 있다. 불행할 때 그대는 닫혀있다. 그러나 행복할 때 그대는 활짝 열려서 사방으로 흘러넘친다. 이때 그대는 신과 손을 맞잡을 수 있다. 그대는 습관적으로 신을 기억한다. 아주 어린시절부터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담배처럼 일종의 습관이 되었다. 그대는 담배를 피우면서도 별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무엇인가 허전함을 느낀다. 아침 저녁으로 신을 기억한다해도 그대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그것은 가슴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는 입으로만 신의 이름을 부른다. 이것은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심리 현상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을 떠올리지 않으면 그대는 무엇인가 빠졌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그것은 의례적인 절차가 되었다. 신을 의례적인 형식으로 만들지 않도록 주의하라. 신에 관해 전문가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명성이 자자한 요기(yogi)가 있었다. 그는 왕과 한가지 약속을 했다. 그가 깊은 삼매경(三昧境)에 들어 1년동안 땅 속에 묻혀있을 수 있다면 왕이 그 나라에서 최고 훌륭한 말을 주기로 했던 것이다. 왕은 그가 말 이야기만 나오면 사족을 못쓸만큼 지독한 애마가(愛馬家)라는 알고 있었다. 요기는 왕의 제안에 동의하고 1년동안 생매장당해 있기로 했다. 그런데 요기가 묻혀있는 동안 왕국이 망해버렸다. 요기를 파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10여 년이 지난 후, 누군가 문득 요기를 기억해냈다. "그 요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왕이 즉시 사람들을 보내 요기가 묻혔던 자리를 파보도록 했다. 요기는 여전히 깊은 몰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예전에 약속했던 만트라(mantra)를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이자 그가 깨어났다. 그가 눈을 뜨자마자 내뱉은 첫 마디는 이 말이었다. "내 말은 어디 있는가?" 10여 년을 땅 속에 묻혀 침묵으로 지냈지만 요기의 마음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가 내뱉은 첫마디는 "내 말은 어디 있는가?"하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정녕 무아지경에 빠져있었던 것일까? 그가 진정 삼매경에 들어있었던 것인가? 그가 신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을까? 아니다, 그는 줄곧 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아주 숙련된 전문가에 불과하다. 그는 숨을 멈추고 가사(假死) 상태로 들어가는 법을 배웠다. 그것은 기술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10년동안 그렇게 깊은 침묵 속에 있었지만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10년 동안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만일 그대가 기술적으로 신을 기억한다면, 직업적으로 신을 생각한다면, 습관적이고 기계적으로 신을 생각한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일이 가능하다. 하지만 일체의 가능성은 가슴을 통해 일어난다. 그래서 이 경전을 '가슴의 경전(The Heart Sutra)'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하든 깊은 사랑과 몰입 그리고 진지함을 갖고 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존재 전체를 거기에 쏟아붓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종교는 일종의 의족(義足)과 다를 바 없다. 의족에는 온기(溫氣)도 없고 생명도 없다. 의족은 그들이 기우뚱거리며 걷는데는 도움이 되지만 결코 그들의 일부가 되지는 않는다. 그들은 날마다 의족을 몸에 부착해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 그대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의족을 만들지 마라. 진짜 다리가 그대 안에서 자라나도록 하라. 그래야만 그대의 삶이 따스함과 즐거움을 가질 수 있다. 입가에 맴도는 거짓 미소가 아니라, 행복한 척 하는 허세와 가면이 아니라, 진짜 즐거움이 일어날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여러가지 허위의 옷을 착용한다.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어떤 사람은 자비스러운 얼굴 표정을 만들어낸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랑이 넘치는 인격을 내보인다. 이것은 모두 의복에 불과하다. 깊은 곳에서 그들은 변함없이 똑같은 인물이다. 이 반야심경은 거대한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 가장 최초로 떠오르는 질문은 언제나 "나는 누구인가?"하는 물음이다. 이 물음을 계속 밀고 나가야 한다. 그대가 최초로 "나는 누구인가?"하고 물으면 물라다르 차크라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무슨 잠꼬대같은 소리인가? 너는 육체이다! 물으나마나 한 소리이다. 너도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그 다음에 두번째 단계는 "너는 성욕이다."하고 대답할 것이며, 세번째 단계는 "너는 파워 트립(power-trip)이다. 너는 에고이다."하고 말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대답이 이어진다. 이것을 잊지 말라. 아무 대답도 나오지 않을 때까지 질문을 계속하라. 그 전에 멈추면 안된다. 만일 "너는 이것이다. 너는 저것이다."하는 대답이 나온다면 특정한 센터(center)가 답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여섯 개의 센터를 통과하고 그들이 내놓은 모든 대답이 지워진 다음에는 "나는 누구인가?"하고 물어도 아무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전적인 침묵이 있을 뿐이다. 질문 자체가 그대 안에서 메아리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침묵이 있을 뿐이다. 어디에서도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 순간에 그대는 절대적으로 현존(現存)한다. 절대적으로 침묵한다. 조금의 파문도 일지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 그저 침묵이 있을 뿐이다. 이때 기적이 일어난다. 질문을 던지는 것조차 불가능해 지는 것이다. 이제까지 얻은 모든 대답이 터무니없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물음을 던지는 일까지 터무니없게 된다. 먼저 대답이 사라지고 그 다음에는 질문 또한 사라진다. 질문과 대답은 공존(共存)을 통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질문과 답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동전의 한쪽 면이 사라지면 다른 쪽 면도 존재할 수 없다. 먼저 대답이 사라지고 그 다음에는 질문이 사라진다. 이렇게 물음과 답이 사라질 때 그대는 진정한 이해에 도달한다. 이것이 초월의 차원이다. 이제 그대는 안다. 하지만 그것을 말로 할 수는 없다. 그대는 분명히 알지만 그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 이제 그대는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 그대의 존재 깊은 곳으로부터 그것을 안다. 그러나 이것을 언어로 옮기기란 불가능하다. 그것은 실존적인 앎이다. 경전에서 얻은 지식이 아니다. 남에게서 빌려온 것이 아니다. 그대 안에서 솟아오른 앎이다. 이런 앎이 솟아날 때 그대는 붓다가 된다. 이때 그대는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자신이 애초부터 붓다였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언제나 붓다였다. 다만 그대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을 뿐이다. 그대는 외곽을 배회하고 있었을 뿐, 자신의 존재라는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철학자인 아더 쇼펜하우어가 홀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는 생각에 골몰해 걸음을 옮기다가 다른 보행자와 크게 부딪쳤다. 충격에 놀란 보행자는 쇼펜하우어가 너무나 무심한 얼굴을 하고있자 화가 나서 소리쳤다. "당신이 뭔데 이 따위로 행동하는 거요?" 쇼펜하우어가 여전히 생각에 잠겨 말했다. "내가 무엇이냐고? 나도 그것을 알면 좋으련만!" 아무도 모른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라. 이것이 여행의 시작이다. 자, 첫번째 경문을 보자. 고귀하고 성스러운 지혜의 완성자에게 귀의합니다. 이것은 발원문(發願文)이다. 인도의 모든 경전은 발원문으로 시작된다. 이것은 다른 나라와 다른 언어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그리스에는 없는 현상이다. 인도는 우리 인간을 텅빈 대나무로 이해한다. 영원(永遠)이 우리를 통해 흘러간다. 이 무한성(無限性)이 발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저 그 무한성의 도구일 따름이다. 우리는 그 무한성을 발원하고, 그것이 우리를 통해 흘러가도록 염원한다. 이 반야심경을 누가 썼는지 아무도 모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집필자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이 반야심경을 쓴 사람은 자신이 이 경전의 저자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속기사(速記士)같은 존재였다. 저 너머로부터 어떤 메시지가 전해지고 그는 이 구술(口述)을 충실하게 받아 적었다. 그는 저자(author)가 아니다. 기껏해야 필자(writer) 정도인 것이다. 고귀하고 성스러운 지혜의 완성자에게 귀의합니다. 이것은 발원문이다. 불과 몇 마디에 불과하지만 단어 하나하나가 아주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지혜의 완성자에게 귀의합니다! '지혜의 완성'이란 말은 '프라즈나파라미타(prajnaparamita)'의 번역어이다. '프라즈나(般若)'는 지혜를 의미한다. 명심하라, 이 말은 지식을 뜻하지 않는다. 지식은 마음을 통해 온다. 지식은 외부로부터 온 것이다. 지식은 결코 독창적(original)이지 않다! 지식의 본성 자체로 볼 때 독창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지식은 다른데서 빌려온 것이다. 그러나 지혜는 그대의 독창적인 비전(vision)이다. 지혜는 외부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그대 안에서 성장한 것이다. 그것은 시장에서 살 수 있는 플라스틱 꽃이 아니다. 그것은 나무 위에 피어나는 진짜 장미꽃이다. 이 꽃은 나무의 노래이다. 이 지혜의 꽃은 내면의 가장 깊은 중심으로부터 피어난 것이다. '프라즈나(般若)'는 지혜를 의미한다. 그러나 지혜를 지칭하는 영어 단어 'wisdom'은 사뭇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영어에서 지식은 경험이 없는 앎을 의미한다. 대학에 가면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반면 영어의 지혜(wisdom)는 삶에서 직접 경험을 통해 얻은 앎을 말한다. 따라서 젊은 사람은 유식해질 수는 있지만 지혜로울 수는 없다. 지혜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젊은이는 학위를 얻을 수 있다. 철학 박사나 문학 박사 학위를 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지혜로울 수 있는 것은 오직 늙은 사람만이 가능하다. 지혜는 직접 경험을 통해서 얻은 지식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전히 외부에서 온 것이다. '반야(般若)'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식이나 지혜가 아니다. 반야는 내면으로부터 피어나는 꽃이다. 이 반야화(般若花)는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삶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면의 철저한 침묵 안으로 들어감에 의해,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이 현현(顯現)되도록 허용함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다. 그대는 내면에 반야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다. 다만 이 씨앗이 싹틀 수 있도록 적당한 토양이 필요할 뿐이다. 반야는 항상 독창적이다. 그것은 언제나 그대의 것이며, 오직 그대만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시 명심해야 할 사실이 있다. "그대의 것"이라는 이 말은 거기에 어떤 에고가 개입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반야는 그대의 자성(自性:self-nature)에서 솟아난다. 그런 의미에서 반야를 "그대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반야에는 에고가 설 자리가 없다. 왜냐하면 에고는 침묵의 일부가 아니라 마음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파라미타(波羅蜜多)'는 '저 너머에 속한', '저 너머로부터 온',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이라는 뜻이다. 바라밀다의 차원에서 그대는 시간이 사라진 상태로 들어간다. 그대는 공간이 사라진 내면으로 들어간다. 자신이 언제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다. 시간은 그대의 외부에 있다. 공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대의 내면에는 시간이 사라지는 교차점이 있다. 어떤 사람이 예수에게 물었다. "하느님의 왕국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 곳에는 무슨 특별한 일이 있습니까?" 예수는 "그 곳에는 더 이상 시간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거기에는 영원이 있다. 시간없는 순간만이 있다. 공간없는 공간과 시간없는 순간, 이것이 저 너머 피안(彼岸)의 세계이다. 그 곳에서 그대는 시간과 공간에 한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대가 어디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나를 보라. 나는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또한 저기에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인도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중국에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지구에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고가 사라지면 전체와 하나가 된다. 이때 그대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동시에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독립된 별개의 실체로 존재하지 읺는다. 그대는 전체 안에서 녹아 없어진다. 보라! 아침 나절, 푸른 나뭇잎 위에 이슬방울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 거기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이윽고 이슬방울은 나뭇잎에서 미끌어져 바다로 들어간다. 이슬방울이 나뭇잎 위에 있을 때에는 시간과 공간이 있었다. 이슬방울은 한정되어 있었으며 자신의 개별성(個別性)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바다 안으로 떨어져 내리면 어디에서도 이슬방울을 찾을 수 없다. 이슬방울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다. 이제 이슬방울은 없는 곳 없이 무소부재(無所不在)한다. 그래서 어디에서도 이슬방울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특정한 위치를 지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다 전체가 이슬방울의 거처가 되었다. 이제 이슬방울은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전체와 분리되어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때 반야바라밀다가 솟아오른다. 완벽한 지혜, 저 너머로부터 오는 지혜가 찾아든다. 고귀하고 성스러운 지혜의 완성자에게 귀의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발원(發願)이다......이 발원문은 말한다. "저 너머의 세계로 들어갔을 때 찾아드는 지혜에 대해 경의를 표하옵니다." 이 지혜의 완성자는 고귀하고 성스럽다. 전체와 하나가 되었으므로 성스러우며, 온갖 추악함을 일으키던 에고가 사라졌으므로 고귀하다. 사트얌, 쉬밤, 순데람(Satyam, Shivam, Sunderam).- 그것은 진(眞)이고 선(善)이며 미(美)이다. 이 진선미가 세가지 속성이다. 지혜의 완성자에게 귀의합니다. 진리......지혜의 완성이 진리이다. 진리는 고귀하고 아름답다. 성스럽고 선하다. 왜 그것을 성스럽다고 하는가? 모든 붓다들이 그로부터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붓다를 탄생시키는 자궁이다. 이 지혜의 완성에 드는 순간 그대는 붓다가 된다. 이슬방울이 바다 안으로 사라져 개별성을 잃었을 때, 더 이상 전체와 맞서 싸우지 않고 복종할 때, 전체와 더불어 존재할 때, 이럴 때 그대는 붓다가 된다. 그러므로 나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라고 강조한다. 결코 자연에 맞서지 말라. 자연을 극복하거나 정복하려고 하지 말라. 자연을 이기려고 하지 말라. 자연을 이기려고 한다면 그대는 운명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다. 부분이 전체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이같은 시도를 하고 있다. 세상이 이토록 절망과 좌절에 빠져있는 것은 그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실패자인 것처럼 보인다. 모든 사람이 전체를 정복하려 하고, 강물의 흐름을 거스르면서 밀어내려고 한다. 당연히 그대는 어느 날엔가 힘이 빠져서 기진맥진할 것이다. 강은 끝없이 흐르는데 그대의 에너지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엔가 강물이 그대를 압도할 것이고, 그대는 항복하고 말 것이다. 크나큰 절망감을 느끼면서. 그러나 기꺼이 항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귀의(歸依:surrender)가 된다. 이때 더 이상의 패배는 없다. 이것은 승리이다. 그대는 신과 더불어 조화를 이룰 때에만 승리한다. 신에 대항해서는 결코 이길 수 없다. 그리고 신은 그대를 패배시키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대의 패배는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그대는 맞서서 싸우기 때문에 패배한다. 만일 패배하기를 원한다면 맞서서 싸워라. 그러나 이기기를 원한다면 복종하고 귀의하라. 이것은 역설적인 현상이다. 기꺼이 무릎꿇는 자만이 승리자가 된다. 이 게임에서는 패자만이 진정한 승자가 된다. 이기려고 애쓰면 그대의 패배는 불을 보듯 뻔하다. 그대의 패배는 시간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 패하든 분명히 패하고 만다. 이 지혜의 완성은 성스럽다. 전체와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이때 그대는 전체와 더불어 고동치고, 전체와 더불어 춤춘다. 전체와 함께 노래한다. 그대는 바람에 나부끼는 나무 잎사귀와 같다. 나뭇잎은 바람에 몸을 맡기고 춤춘다. 나뭇잎은 자기의 의지가 없다. 이렇게 자기의 의지를 버리고 전적으로 내맡기는 것을 나는 '산야스(sannyas)'라고 부른다. 이것을 이 경전에서는 성스럽다고 말한다. 성스럽다(holy)는 말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語)는 '바가바티(bhagavati)'이다. 이 '바가바티'라는 말은 'holy'라는 단어보다 훨씬 더 의미심장하다. 이 말을 이해해야 한다. 'holy'라는 단어에는 어딘지 모르게 기독교의 냄새가 풍긴다. 그러나 '바가바티'는...... '바가바티'는 '바가반(bhagavan)'이라는 단어의 여성형이다. 이 경문에서는 '바가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바가바티'라는 여성형 단어를 사용한다. 왜냐하면 만물의 근원은 남성적인 것이 아니라 여성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음(陰)이지 양(陽)이 아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이다. '하나님 아버지'라는 기독교의 개념은 별로 아름답지 않다. 이것은 남성들의 에고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남성적인 에고는 신이 '그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남성적인 에고는 신이 '그'로 존재하기를 원한다. 기독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를 보라.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와 성령(聖靈), 이 셋 모두가 남성이다. 여기에 여성은 포함되어있지 않다. 마치 남성 전용 클럽과 같다! 그러나 삶에 있어서 여성은 남성보다 훨씬 더 근원적이라는 것을 명심하라. 여성은 자궁이 있기 때문이다. 오직 여성만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다. 여성을 통해 생명이 태어난다. 왜 생명은 여성을 통해 태어나는 것일까?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오직 여성만이 생명의 탄생을 허용할 수 있다. 여성은 수용적이기 때문이다. 남성은 공격적이지만 여성은 수용적이다. 그래서 여성은 흡수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하나의 통로가 될 수 있다. 이 반야심경은 '바가반'이 아니라 '바가바티'라고 말한다. 여기엔 지극히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다. 모든 붓다를 탄생시키는 완전한 지혜는 여성적인 성질을 띄고 있다. 이 지혜는 어머니이다. 자궁은 어머니가 될 수 밖에 없다. 신을 아버지로 생각한다면 그대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는 하나의 부자연스러운 제도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에 부성(父性:fatherhood)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성의 역사는 기껏해야 몇 천년에 불과하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 어머니는 자연적이다. 아버지의 존재는 사유 재산 제도로 인해 생겨났다. 아버지라는 개념은 자연이 아니라 경제의 일부이다. 일단 사유재산이 사라지면, 만일 이런 제도가 영원히 사라진다면 아버지 또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언제나 남아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머니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아버지가 없는 세상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아버지라는 개념 자체가 매우 공격적이다. 이런 현상을 관찰해 보았는가? 오직 독일인들만이 그들의 나라를 '부국(父國:fatherland)'이라고 부른다. 다른 나라들은 모두 '모국(母國)'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나라를 '부국'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들은 위험하다! '모국'이라고 부르는 것은 괜찮다. 그러나 자기가 속한 나라를 '부국'이라고 부를 때 그대는 무엇인가 위험한 일을 꾸미는 것이다. 머지않아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부국'이라는 명칭 자체가 전쟁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다. 신을 아버지로 생각하는 모든 종교는 공격적이다. 기독교는 공격적이다. 이슬람교도 그렇다. 유태인들의 하나님이 오만하고 분노에 차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유태인들의 신은 이렇게 선언한다. "만일 나를 섬기지 않는다면 너는 나를 반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너를 파괴시키고 말리라. 나는 질투하는 신이다. 그러니 오로지 나만을 섬겨라!" 반면, 신을 어머니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비폭력적이다. 불교는 종교라는 미명 하에 전쟁을 일으킨 적이 단 한번도 없다. 그들은 단 한사람도 강압에 의해 개종시킨 적이 없다. 모하메드교인들은 칼로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사람들의 의지와 본심이 무엇인지, 그들이 어떤 의식을 갖고 있는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기독교인들 또한 온갖 방법으로 사람들을 회유했다. 때로는 무력으로, 때로는 빵으로, 때로는 여타의 다른 수단으로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불교는 사람들의 본심에 반해 개종을 강요하지 않은 유일한 종교이다. 오직 불교만이 비폭력인 종교이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궁극적 실체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여성적이기 때문이다. 고귀하고 성스러운 지혜의 완성자에게 귀의합니다. 또한 진리는 아름답다는 것을 명심하라. 진리는 더없는 은총이므로 아름답다. 진리는 추악해질 수 없다. 그리고 추악한 것은 진짜가 될 수 없다. 추악함은 환상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추하게 보인다면 그 추함에 속지 말라. 조금 더 깊이 들여다 보라. 그러면 그 안에 아름다운 사람이 숨어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추함에 속지 말라. 추함은 그대의 해석일 뿐이다. 삶은 아름답다. 진리는 아름답다. 존재계는 아름답다. 그것은 추함을 모른다. 완전한 지혜는 고귀하다. 그것은 여성적이며 성스럽다. 그러나 이 '성스럽다'는 말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식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라. 여기에서 말하는 성스러움은 '저 세상'을 지향하지 않는다.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것에 비해 성스럽다는 말이 아니다. 결코 그런 뜻이 아니다. 모든 것이 성스럽다. 현세적이거나 속되다고 칭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일체가 성스럽다. 모든 것이 불성(佛性)이라는 하나의 본질로 충만하다. 오로지 붓다와 붓다가 있을 뿐이다! 나무 붓다, 개 붓다, 새 붓다, 남자 붓다, 여자 붓다......일체가 붓다이다. 모든 것이 붓다를 향해 가고 있다. 인간은 몰락한 신이 아니다. 인간은 신으로 가는 길 위에 있다. 인간은 신이 되어가는 중이다. 두번째 경문: 거룩한 분이시며 보디사트바인 관세음(觀世音:avalokita)께서는 피안에 이른 지혜의 깊은 과정 속에서 움직이고 계셨다. 그가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오온(五蘊)이 있을 뿐이었으며, 그 오온(五蘊)의 자성(自性)이 공(空)하다는 것을 보았다. '아발로기따(avalokita)'는 붓다의 다른 이름이다. 문자 그대로 볼 때 아발로기따는 저 위에서 보는 자를 의미한다. 일곱번째 사하스라르(sahasrar) 차크라에 이른 자, 초월의 경지에 서서 보는 자가 아발로기따이다. 그대가 보는 모든 것은 당연히 그대의 관점에 따라 채색된다. 그대가 어떤 위치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사다리의 첫번째 칸, 즉 물질적 육체의 차원에 사는 자는 모든 것을 그런 관점에서 본다. 육체의 차원에 사는 자는 그대를 볼 때 육체를 본다. 그는 육체 이상을 보지 못한다. 어느 위치에서 보느냐에 따라 시각이 달라진다. 성적인 환상에 빠져있는 자는 오직 성적인 관점에서만 본다. 배고픈 사람도 자신의 관점을 통해서만 본다. 그대 자신을 관찰해 보라. 하나의 사물을 볼 때마다 달라진다. 그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아침에는 저녁때보다 세상이 더 아름답게 보인다. 이른 아침 그대는 신선하다. 아주 깊은 잠, 꿈도 없는 깊은 잠을 자고 깨어난다. 이 잠을 통해 그대는 무의식적이나마 초월적인 그 무엇을 맛보았다. 그러므로 아침에는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인다. 아침에는 사람들이 더 자비롭고 사랑에 넘친다. 더 순수하고 깨끗하다. 그러나 저녁 때가 되면 똑같은 사람이 더 불순하고 교활해진다. 더 추하고, 폭력적이고, 위선적이 된다. 똑같은 사람이 그렇게 변하는 것이다. 아침에 그는 초월의 차원에 근접해 있었다. 그런데 저녁 때가 되면 지나치게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에 살고 있다. 그런 차원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지혜의 완성자는 일곱 개의 차크라를 통해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다. 그는 자유인이다. 어느 한 지점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는 라디오의 다이얼(dial)과 같다. 어떤 시각(vision)에도 다이얼을 맞출 수 있다. 이것이 '묵타(mukta)'라고 불려지는 사람의 경지이다. 그는 진실로 자유롭다. 그는 모든 차원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으면서도 그 차원에 물들지 않는다. 그의 순수성은 오염되지 않는다. 그의 순수성은 언제나 초월의 경지에 남아 있다. 붓다는 그대의 육체를 만지고 치료할 수 있다. 그는 육체가 될 수 있다. 이것은 그의 자유이다. 또한 그는 마음이 되어 그대에게 말하고 설명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마음이 아니다. 그는 마음 뒤에 서서 마음을 이용한다. 이것은 그대가 차를 운전하면서 결코 차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는 사다리의 모든 칸을 이용한다. 그는 사다리 전체이다. 그러나 그의 궁극적인 관점은 언제나 초월의 차원을 향한다. 이것이 그의 본성이다. '아발로기따'는 저 너머 피안의 세계로부터 이 세상을 보는 자를 의미한다. 거룩한 분이며 보시사트바인 관세음(관세음:avalokita)께서는 피안에 이른 지혜의 깊은 과정 속에서 움직이고 계셨다. 이 경문은 초월의 경지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의 움직임이며 과정이다. 강물같은 흐름이다. 그것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이 초월의 경지는 끝없이 전개되어 나간다. 이런 까닭에 힌두교인들은 그것을 '일천 장의 꽃잎을 가진 연꽃'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천(千)이라는 숫자는 무한(無限)을 의미한다. 이 숫자는 무한함의 상징이다. 꽃잎 위에 꽃잎이 피고, 또 꽃잎이 피고, 그렇게 끝도없이 피어난다. 이 여행에는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다. 이것은 영원한 순례의 길이다. 거룩한 분이며 보시사트바인 관세음(관세음:avalokita)께서는 피안에 이른 지혜의 깊은 과정 속에서 움직이고 계셨다. 그는 저 너머 피안의 세계에서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는 거룩한 분이며 보디사트바(菩薩)라고 불려진다. 다시 여기서 산스크리트어(語)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거룩한 분(holy lord)'이라는 번역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는 '이스와라(iswara)'이다. '이스와라'는 자신의 풍요함에 의해 절대적인 풍요의 경지에 이른 자, 풍요함이 그의 본성 자체가 된 자를 뜻한다. 아무도 그의 풍요로움을 빼앗거나 훔쳐갈 수 없다. 이 풍요로움은 상실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가진 모든 재산은 상실되고 훔쳐질 수 있다. 어느 날엔가 죽음이 찾아와 모든 것을 앗아갈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그의 고유한 본질인 내면의 다이아몬드를 발견하면 죽음조차 그것을 앗아가지 못한다. 죽음은 이 다이아몬드를 건드리지 못한다. 그것은 훔쳐내거나 잃어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때 그는 '이스와라'가 된다. 거룩한 분이 된다. 이때 그는 바가반(bhagavan)이 된다. '바가반'이란 단어는 '축복받은 자'를 의미한다. 이때 그는 축복받은 자가 된다. 이제 그의 축복은 영원히 그의 것이다. 이 축복은 아무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이 축복은 자발적이다. 어떤 것에 의해 촉발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축복을 앗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축복은 어떤 원인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본질 자체가 축복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는 보디사트바(菩薩:bodhisattva)로 불려진다. 이 말은 매우 아름다운 불교 용어이다. 보디사트바는 이미 붓다가 되었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이 세상에 머무는 자를 뜻한다. 보디사트바는 기본적으로 이미 붓다가 된 자를 말한다. 그는 언제라도 사라질 준비가 되어 있다. 니르바나(涅槃)의 세계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 이제 그에게는 해결할 문제가 남아있지 않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더 이상 이 세상에 머물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세상에 머문다. 그는 육체와 마음이라는 형상 안에 자신을 보존한다. 그는 사다리 전체의 차원을 유지한다. 그는 이미 저 너머의 세계에 이른 자이면서도 사다리 전체의 차원을 보존하고 있다. 순전히 남을 도우려는 자비심으로. 이런 이야기가 있다. 붓다가 궁극적인 니르바나(涅槃)의 문 앞에 도달했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으며, 천사들이 그를 영접하기 위해 춤추며 노래하고 있었다. 한 인간이 붓다가 되는 것은 수백만년에 한번 일어날까 말까 할 정도로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르바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활짝 열렸으며, 그 날은 당연히 커다란 축제의 날이었다. 고대의 모든 붓다들이 한 자리에 모였으며, 그를 환영하는 꽃이 뿌려지고 음악이 연주되었다. 그리고 사방이 아름답게 장식되었다. 보기 드문 축하의 날이었다. 그러나 붓다는 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고대의 붓다들이 모두 합장을 하고 인사를 건네며 "왜 밖에 서 계시오? 어서 안으로 들어오시오."하고 청했다. 그러나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내 뒤에 오는 사람들 모두가 들어가기 전에는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나는 밖에 남겠습니다. 일단 들어가면 사라져 버리고 말테니까요. 그렇게 되면 저 사람들을 도울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수 많은 사람들이 어둠 속을 헤매며 비틀거리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나 또한 수 많은 생동안 그런 식으로 헤맸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고 싶습니다. 그러니 문을 닫으십시오. 저들 모두가 도착하면 문을 두드릴 것이니 그때 가서 나를 영접하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이야기이다......이것이 보디사트바의 경지이다. 언제라도 사라질 준비가 되어 있으면서도 여전히 육체와 마음 안에 남아 있는 자, 시간과 공간이라는 이 세상 안에 남아 있는 자가 보디사트바이다. 순전히 남을 돕기 위하여. 붓다는 말한다. "그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명상 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거기엔 뭔가 빠져 있다. 자비가 빠져있는 것이다." 거기에 자비 또한 있게 되면 그대는 다른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울 수 있다. 붓다는 명상을 순수한 황금이라고 말한다. 황금은 그 자체로 완벽하다. 그러나 거기에 자비가 보태지면 황금은 향기를 지니게 된다. 이때 더 높은 완성, 전혀 새로운 종류의 완성이 이루어진다. 향기를 지닌 황금이 탄생하는 것이다. 명상이라는 황금은 그 자체로 충분히 값지다. 하지만 거기에 자비가 보태지면 명상은 향기를 갖게 된다. 자비는 붓다를 보디사트바의 경계선에 머물게 한다. 며칠 또는 몇 년동안은 그 경계선에 머물 수 있다. 그러나 오래 가지는 못한다. 서서히 모든 것이 저절로 사라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육체에 대한 집착이 없을 때 그대는 서서히 육체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다. 간혹 노력을 통해 육체로 돌아올 수는 있다. 노력에 의해 육체를 사용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대는 더 이상 육체 안에 자리잡고 있지 않다. 더 이상 마음 속에 거주하지 않을 때에도 가끔씩은 마음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은 예전처럼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더 이상 마음의 흐름 안에 있지 않다. 그대가 마음을 사용하지 않을 때 마음은 그냥 그 자리에 누워있다. 그것은 하나의 기계장치이다. 사용하지 않는 기계는 녹슬기 시작한다. 일곱 번째 단계에 도달한 사람은 얼마동안 아래의 여섯 단계들을 이용할 수 있다. 그는 다시 돌아와 그것들을 이용한다. 그러나 서서히 그 단계들이 부서지고 죽어가기 시작한다. 보디사트바는 오직 단 한번의 생동안 이 세상에 머믈 수 있다. 기껏해야 한번의 생이다. 그 다음에는 사라져야 한다. 이 세상에 머물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장비들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완성의 경지에 이른 모든 이들은 몸과 마음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려고 노력해왔다. 몸과 마음 속에 사는 사람들, 몸과 마음의 언어 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제자들을 돕기 위해서 그들은 최대한으로 노력해왔다. 거룩한 분이며 보시사트바인 관세음(관세음:avalokita)께서는 피안에 이른 지혜의 깊은 과정 속에서 움직이고 계셨다. 그가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오온(五蘊)이 있을 뿐이었으며, 그 오온(五蘊)의 자성(自性)이 공(空)하다는 것을 보았다. 그 지점에서 내려다보면......예를 들어, 나는 "그대 안의 붓다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저 너머의 차원에서 본 하나의 시각이다. 나는 그대를 잠재적인 붓다로 본다. 다른 하나의 시각은 내가 그대를 텅빈 껍데기로 본다는 것이다. 그대가 "나는 이러저러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텅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남자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공허한 관념이다. 내면 깊은 곳의 의식(consciousness)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아름다운 육체를 지녔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을 멋있고 강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이것 또한 공허한 관념이다. 에고의 속임수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유식하다고 생각한다. 이것도 무의미한 생각이다. 그를 구성하는 메카니즘(mechanism)이 보유한 기억들에 의해 그는 속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 모두가 공허하다. 초월의 차원에서 볼 때, 나는 한편으로는 그대를 싹트고 있는 붓다로 본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허한 껍질로 본다. 붓다는 인간이 다섯 개의 요소, 즉 오온(五蘊)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텅빈 다섯 개의 '스칸다(skandha)'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 요소의 결합에 의해 '에고(ego)'라고 불리는 부산물이 생성된다. 이것은 계속해서 째깍거리는 시계와 같다. 분명히 째깍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시계를 뜯고 모든 부품을 분해해서 이 소리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아 보라. 어디에 그 소리가 있는가? 아무데서도 찾지 못할 것이다. 째깍거리는 소리는 부산물이다. 그 소리는 부품들의 결합에 불과했다. 각 부품이 함께 작동하면서 째깍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대의 '나'라고 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다섯 가지 요소가 함께 작용하면서 '나'라고 불리는 째깍 소리를 내고있는 것이다. 이 '나'는 텅비어있다. 거기엔 아무 것도 없다. 거기서 어떤 실체를 찾으려고 한다면 그대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 붓다의 가장 심오한 직관(直觀)과 통찰력 중의 하나가 있다.-삶은 공허하다. 우리가 삶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공허하기 짝이 없다. 삶은 또한 충만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 충만함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그대는 이 공허함으로부터 충만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이 충만함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지금과 같은 상태에서 보면 이 충만함마저 공허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그대의 충만함이 공허해 보인다. 왕이 거지로 보이는 것과 같다. 지혜로운 자가 어리석고 무지해 보인다. 짧은 이야기 한 토막: 어떤 성자가 제자를 받아들이고 그에게 말했다. "네가 종교적인 삶에 관해 이해한 바를 적어 보아라. 그리고 왜 그런 사상을 갖게 되었는지도 적어보아라." 제자가 물러가서 쓰기 시작했다. 1년 후 제자가 돌아와 스승에게 말했다. "아직 완성되려면 멀었지만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어쨌든 제가 그동안 애쓴 핵심 부분은 여기에 다 들어 있습니다." 스승이 장문의 글을 읽어보고 제자에게 말했다. "참으로 논리적이고 분명하구나. 하지만 너무 긴듯 하니 좀더 줄여 보도록 해라." 그래서 제자는 5년 동안 열심히 애쓴 끝에 백 장으로 줄여서 다시 가지고 왔다. 스승이 미소를 지으면서 제자를 맞았다. 그가 제자의 글을 읽어보고는 말했다. "이젠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고 있구나. 너의 사상에는 명료함과 힘이 있다. 하지만 여전히 긴듯 하니 다시 압축해 가지고 오너라." 핵심에 도달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던 제자는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하고 물러갔다. 1년 후 다시 돌아온 그가 스승에게 엎드려 절하고는 다섯 장의 기록을 내밀었다. "이것이 제 신앙의 핵심이며 제 삶의 중심입니다. 여기까지 이른 저를 축복해 주십시오." 스승이 세밀하게 그것을 읽어보고 말했다. "이 간결함과 아름다움이 참으로 놀랍구나! 그러나 아직 완전하지는 않다. 가서 마지막으로 한번 더 다듬어 보거라." 스승이 임종을 맞을 무렵, 제자가 다시 돌아와 엎드려 절하고는 한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그러나 그 종이는 아무 것도 씌여있지 않았다. 이 종이를 보고 스승이 제자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축복해주며 말했다. "이제......이젠 너도 깨우쳤구나." 초월적인 시각에서 보면 그대가 가진 모든 것은 공허하다. 그러나 그대의 시각, 그대의 신경증적인 시각에서 보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이 공허하다. 그대의 눈으로 보면 붓다는 공허해 보인다. 그저 순수한 공(空)일 뿐이다. 붓다가 공허해 보이는 것은 그대의 관념, 집착, 소유욕 때문이다. 실상을 보면 붓다는 가득 차 있다. 공허한 것은 그대이다. 붓다의 시각은 절대적인 경지에 가 있다. 그러나 그대의 시각은 상대적인 관점에 머문다. 이 경전은 말한다. 거룩한 분이며 보시사트바인 관세음(관세음:avalokita)께서는 피안에 이른 지혜의 깊은 과정 속에서 움직이고 계셨다. 그가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오온(五蘊)이 있을 뿐이었으며, 그 오온(五蘊)의 자성(自性)이 공(空)하다는 것을 보았다. 수냐타(shunyata), 공(空)이 불교의 핵심이다. 반야심경의 깊은 차원으로 들어감에 따라 우리는 이 공(空)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것이다. 반야심경의 이 경문들에 대해 명상하라. 논리와 추론이 아니라 사랑과 몰입을 통해 명상하라. 논리와 추론을 갖고 임하면 그대는 이 경문들의 영혼을 죽이고 말 것이다. 나누고 분석하지 말라. 다만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라. 그대의 마음을 개입시키지 말라. 마음은 장애가 될 뿐이다. 마음을 끌어들이지 않고 이 경전을 볼 수 있다면 분명한 시야가 열릴 것이다. 오늘은 이만. By Osh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