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5년06월30일(금) 10시01분32초 KDT 제 목(Title): 행주좌와어묵동정 2 행주좌와어묵동정이 다 선이라고 하지만 행주좌와어묵동정외에 다른 선이 있다고 하는 마음이 좀처럼 없어지지를 않는데 그러므로 행주좌와어묵동정이 선이 아니게 됩니다. 즉 선 아닌게 하나도 없지만 다른 선이 있다고 고집을 부리기에 또한 분명히 행주좌와어묵동정이 선이 아닙니다. 이렇게 다른 선이 있다고 고집을 부리는 한에 있어서는 수 십년을 좌선을 하겠다고 앉아서 아무리 사념을 쳐다보아도 선하는 것이 아니고 아무리 화두를 들고있어도 선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째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를 따져 보겠습니다. 부처님의 근본설법인 무아설은 "나"라고 주장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라고 주장하는 것은 실제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아설입니다. 그럼 부처님의 무아설이 거짓말이라고 생각된다면 참선이란 것 역시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아설이 진짜라는 것을 믿는다면 부처님의 깨달음이란 곧 싯달타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이름을 붙일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래 실제하지 않는 싯달타가 자신을 싯달타라고 알고 있었다면 이것은 실제하지 않는데 실제한다고 착각을 한 것입니다. 실제한다고 착각한 그 상태가 싯달타입니다. 싯달타 태자가 그렇다면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도 실제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착각하고 있는 그 자체가 곧 "나"입니다. 그런데 착각하고 있는 "나"가 어떤 수행을 한다고 할 때 과연 그것이 수행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착각상태에서 아무리 해보았자 계속적인 착각이요 꿈일 뿐입니다. 요사이 유행하는 말로 지켜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념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본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것을 지켜보는 것은 누구입니까? 착각상태에 있는 나인 것입니다. 착각상태에 있는 내가 지켜본다는 것도 역시 꿈속의 꿈일 뿐입니다. 간화선을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두를 내가 의심해서 그 화두를 타파하겠다고 하면 이것도 꿈일뿐 입니다. 이 모두가 참선이 아닌 것입니다. 참선이라는 것은 명상법도 아니고 더구나 정신집중법은 더욱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저 생각이 흘러나오는 것을 있는데로 지켜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냐하면 내가 무엇인가 따로 할 수행이 있다고 주장하는 "나"라는 착각과 "내가 하는 수행"이라는 착각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참선을 할 때는 내가 참선한다는 건방진 생각이 있는 한에 있어서는 계속 꿈속을 해매일 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가 하면 "나"라고 착각한 그 자리에 부처님이 들어오셔야 하고 "나"라고 착각한 그 자리에 일체 모든 중생이 들어오도록 하여 "나"가 인정되지 않은 곳이기에 행주좌와어묵동정이 본래 모두 선인 참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참선하도록 해야하고, 일체모든 중생이 참선하도록 해야 합니다. 부처님이 참선하고 일체 모든 중생이 참선하도록 하면 행주좌와어묵동정 그대로가 참선인 그 참선이 되는 것이고 부처님이 참선하고 일체 모든 중생이 참선하도록 할려면 부처님 앞에 끝없이 절을 올려서 "나"라는 착각 자리에 부처님이 들어오셔야 하고, 일체 중생을 모두 평등하게 부처님 보듯이 하여 "나"의 자리에 일체중생이 들어오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부처님이 참선을 하기에 행주좌와어묵동정이 참선이 되고 일체 중생이 참선을 하는 것이기에 불국토가 청정해 집니다. 그렇게 부처님을 모셔야 되고 일체 중생을 부처님처럼 모셔야 되는 참선이기에 불교신자가 아닌 사람이 참선을 해서 견성한 경우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화두를 의심하고 일체중생이 화두를 의심하는 대승의 참선이 내가 무엇인가를 지켜보거나 내가 무엇을 집중하거나 내가 화두를 의심하는 꿈속의 수행법과는 뚜렷이 구분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