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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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onvex (4ever 0~)
날 짜 (Date): 1995년06월23일(금) 05시54분19초 KDT
제 목(Title): 로마시대 가정교사의 아내(From Hitel)



 알기쉬운 교리 (방장 : 한승규)  ()
 제목 : 로마시대 가정교사의 아내
 #842/873  보낸이:이철수  (12357   )    04/12 11:56  조회:19  1/8

                          성철스님 법어집
                          영원한 자유
    부록 
  
    2. 한번 이상 사는가
  
  제 3 장 에반스 여사의 세 가지 전생
  
  2. 로마시대 가정교사의 아내 
  
  요크 시는, 제인 에반스 여사가 전생에 유태인으로 태어나 살았던 곳
이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가 로마인의 아내로서 살았던 장소로 바
뀐다. 브록샴 씨의 최면에 의해 12세기 경의 레베카는 리보니아가 되었
다.(곧 요크 시는 제인 에반스 여사가 유태인으로서 산 곳인 동시에 로
마인의 아내로서 산 곳이기도 하다.)
  리보니아는  서기 286년 경 영국에서 일어났던 음모와 반란사건에 대
하여 자신이 본 대로 솔직하게 묘사했다. 서기 3세기경의 이 인생은 제
인 에반스가 살았다고 말하는 여섯 번의  전생들 가운데 최초의 전생이
며 녹음한 전생 기록 가운데 마지막의 것이다. 그녀는 리보니아의 전생
까지를 기억한 후 더 이상 최면에 드는 것을  거절하며 몸이 몹시 피곤
하다고 말했다.
  리보니아는  타이터스의 아내로 그녀의 남편은 그녀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타이터스는 콘스탄티우스라고 불리우는 저명한 로마인의 아들
에게 라틴어와 희랍어,  그리고 시를 가르치는 가정교사였다. 콘스탄티
우스의 가족은 에보라쿰이라는 요크 시 외곽의 저택에 살고 있었다.
  리보니아는 냉대받고 탄압받는  유태인 그룹에 속했던 12세기경의 레
베카와 비교해 볼 때,  훨씬 교양있는 그녀는 더 많은 이름과 사실들을
열거해가며  영국 역사의 격동기 동안에 살았던  자신의 전생을 기억했
다. 그녀가 사람들의 이름을 말할 때는 거의 정확했으나 이야기 가운데
숨길 수 없는 큰 흠이 있었다.  역사책에는 로마의 황제로 커다란 치적
을 남긴 콘스탄티우스가 언급되지만, 어디에도 그가 서기 286년에 로마
집정하의 영국에서 살았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리보니아는
그가 영국의 총독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중대한 역사적 사실을 그릇되게 말했다면 그녀의 전생기억은 전부
거짓말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앞서 말했던 것처럼 리보니아는
역사적으로 있었을 법한 일에 대하여  불가사의하게도  많이 알고 있었
다.  또 이상하게도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리보니아의 설명은 역사책에
기술된 것과는 꽤 달랐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그녀의 설명이 틀렸다
고 논박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리보니아의 말을 엄밀하게 추적해 보았
더니 그 유명했던 여러 인물들이 행방불명이었던 기간에 일어났던 일들
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책에 공백으로 비어 있는 시기를
메꾸어 놓은 그녀의 이야기는 너무나 놀라웠다.
  리보니아는 콘스탄티우스의 부인이 헬레나이며, 자신의 남편타이터스
가 가르치는 소년, 곧, 콘스탄티우스의 아들 이름이 콘스탄틴이라고 말
했다.  리보니아의 말처럼 콘스탄티우스의 부인은 헬레나였으며, 그 아
들은 콘스탄틴이었는데  그가 바로 나중에 콘스탄틴 대체(大帝)로 알려
지고 콘스탄티노를 시를 이루었으며 또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았던
그 유명한 황제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역사책의 어디에도 콘스탄티우스의 가족들
이 서기286년에 영국의 총독으로서 리보니아가 말한 에보라쿰에 살았다
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대 영국사의 대가인 리드대학교
의 브라이언 교수는 그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그는 리
보니아가 진술한 대로  콘스탄티우스가 영국에 총독으로 갔을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기 283년, 콘스탄티우스가 달마
티아의 총독으로 알려졌을 당시부터, 서기 290년, 다시 기록에 의해 나
타날 때까지의 행방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콘스탄틴 대제의 일생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서기 286년 경에
그가 어디 있었는가 하는 것과,  그의 출생 연도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
지 않다. 콘스탄틴 대제의 자서전 작가조차도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 명
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   다만  그의 출생 연도는 서기 272년부터
280년 사이가 아닐까 추정되고 있는데,  오늘날 역사가들은 서기 272년
을 합당한 것이라 보고 있다. 콘스탄틴이 서기 272년에 태어났다면, 에
보라쿰의 정원에서 리보니아의 남편에게서  무기를 쓰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던 당시의 나이를 열네살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에 비추어, 리보니아의 전생기억을, 공백으로 남겨져 있는 역
사상의 시기를 토대로 꾸며낸 단순한 허구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녀는
콘스탄티우스가 역사상으로 행방불명이었던 기간에 대한 자신의 진술과
완전히 부합되는, 실증이 가능한 사실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콘스탄티우스의 저택에서 연회가 있을 때면 쓰여지곤 했던 육류
와 과일들이며 은잔에 담긴 사이프러스산 포도주 등  그 시대에 애용됐
던 연회용 준비물의 이름들을 자세하게 열거할 때,  오늘날의 사학도들
은 논박할 여지를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리보니아는 콘스탄티우스에게 로마로 돌아오라는 황제의 칙명을 가지
고 온 알렉터스라는 사람과 그 후의 정변에 대해서도 말했다. 서기 286
년에 콘스탄티우스와 그의 가족들이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해 역사에 기
록된 것이 없다 할지라도, 알렉터스가 이 무렵 영국에 체류하면서 권력
을 잡으려고 계획했다는 것은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다.  알렉터스는 해
군대장 카라시우스와 함께 영국 내의 로마인 정권을 전복시키려고 하였
다.   카라시우스는 당시 게소리아쿰에 있는 로마함대의 책임자였는데,
그들은 로마인 정권의 전복에 성공하여 몇 년 동안 정권을 잡았다.  그
런 까닭으로 그들의 얼굴이 오늘날 자주 독립을 기념하는  영국 주화의
표면에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리보니아는 서기 286년에 있었던
불명료한 이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카라
시우스와 알렉터스가 로마로부터 독립하여 다스린 9년 동안과  그 다음
또 다시 9년이 지나기까지, 다른 사람 아닌 콘스탄티우스가 로마로부터
돌아와 다시 영국을 정복하기까지, 리보니아와 헬레나의 가족들은 숨어
살았다.
  콘스탄티우스는  알렉터스의 세력들을  몰아낸 후  10년이 지난 서기
306년에 에보라쿰에서 죽었는데 헬레나가 아닌,  정략결혼한 황제의 딸
데오도라와의 사이에서 아들 셋과 딸 셋 등  모두 여섯 명의 자식을 두
었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죽은 뒤에 영국에 주둔한 로마군에
의해 황제로 추앙받아 후일 로마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사람은  헬
레나의 아들인 콘스탄틴이었다.
  리보니아는 남편 타이터스와 함께 숨어 사는 기간 동안 앨바너스라는
사람을 통해 기독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또 콘스탄티우스와 헤어진 헬
레나와 아들 콘스탄틴도 앨바너스에게 소개되었다. 그 중에서도 리보니
아의 남편인 타이터스는 가장 열렬한 기독교 귀의자였다.  학살을 영국
에서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한 콘스탄티우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리보
니아와 남편 타이터스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리보니아가 말하는 앨바너스는  오늘날 성자 앨반으로 알려진 사람인
듯하다. 현재, 리보니아가 숨어 살다가 앨바너스를 만나 기독교에 귀의
했다는 베룰람 시는  '성 앨반스 시'로 명명되어 불리고 있다. 또한 성
자 앨반이 베룰람에서 순교했다는 기록이 있다. 앨바너스가 곧 성자 앨
반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당시의 기독교가 헬레나의 가족과 하인
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분명하다.  헬레나와 아들 콘스탄틴
이 기독교에 귀의하게 된 경위는 역사에 나타나 있지 않지만,   그들은
고금을 통하여 가장 널리 알려진 기독교인이다.  헬레나는 대단히 믿음
이 깊은 기독교인이라 후일 성자로 추앙되어 '성(聖) 헬레나'로 추존되
어 지금까지 전해진다.
  콘스탄틴 대제가 로마에서 이교도의 신을 몰아내고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최초의 황제라는 사실은 너무나 유명한 일이다.  콘스탄틴은 그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가 죽은 후 최초의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그는 모든 부하들의 방패에  기독교를 상징하는 도안을 그려 넣
었으며,  그 자신도 똑같은 방패를 들고 전투에 참가했다. 도안에는 창
살을 포개어 만든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이름 가운데  첫번째 글자를 새
겨 넣었다고 한다.   그 후 이 도안은 로마의 국기에 그대로 보이게 된
다.  현재의 사가들은 콘스탄틴이 종교 고문이었던 스페인 대주교 오씨
우스에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풀이한다. 오씨우스는 리보니아의 이
야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리보니아의 남편이 죽는 날 방에 "그를
신부로 만들기 위해 베룰람에 온 사람이 바로 오씨우스"라고 그녀는 말
했다. 그리고 오씨우스는 영국 출신이 아니라고도 했다. 리보니아의 전
생기억을 들은 역사가들은 그녀의 말이 대체로 믿을 만하며 역사적으로
밝혀진 사실들과 일치한다고 말했다.

성철스님 법어집 "영원한 자유"의 다음이야기는
                                      <<프랑스에서의 하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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