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onvex (4ever 0~) 날 짜 (Date): 1995년06월23일(금) 05시55분59초 KDT 제 목(Title): 프랑스에서의 하녀(From Hitel) 알기쉬운 교리 (방장 : 한승규) () 제목 : 프랑스에서의 하녀 #843/873 보낸이:이철수 (12357 ) 04/13 10:41 조회:23 1/10 성철스님 법어집 영원한 자유 부록 2. 한번 이상 사는가 제 3 장 에반스 여사의 세 가지 전생 3. 프랑스에서의 하녀 세번째 이야기에서 제인 에반스는 프랑스 르와르 계곡에 있는 브르스 시에서 자신이 살았다고 기억했다. 그녀는 브르스시에 한번도 가본 적 이 없었지만 그 도시에 있는 집과, 그녀가 살았다는 집의 정원과 건축 양식, 긴 복도들이 있는 벽과 실내를 장식한 그림들, 그곳에 살았던 사 람들에 대해 정확하게 진술했다. 제인 에반스는 프랑스의 대부호였던 꿰르 씨의 저택에 대해 한번도 들어본 일이 없었고, 꿰르 씨에 대한 책 이 영어로 발간된 일도 없었다. 전생기억에서 그녀는 꿰르의 하녀인 십대 소녀 아리종이 된다. 꿰르 는 당시 프랑스 왕 샤를르 7세의 재정담당 고문으로 굉장한 부자였다. 그의 인생 절정기에는 프랑스에서 왕을 제의 한다면 가장 유력한 인물 이었다. 그러나 그의 몰락은 상당히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왕의 정부(情婦)를 독살했다는 부당한 고발을 당했던 것이다. 아리종은 여기 에 얽힌 이야기들을 했다. 꿰르는 왕과 귀족들에게 많은 돈을 빌려 주었다. 그가 살인을 했다는 무고로 사실심리를 받지만, 판결문의 요지는 "왕이 그의 재산을 몰수한 다는 것과 꿰르의 채권자로서의 권리가 모두 무효화된다는 것"이었다. 꿰르의 재산 그리고 왕궁 인물들과의 관계, 왕의 정부 아녜스에 대한 꿰르의 애정 등 아리종이 말한 것이 사실이었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쉽 지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조사한 사람들은 웨일즈 지방의 가정부인 인 에반스 여사가 중세기 불란서 역사에 관하여 전문가도 놀랄 만큼의 사실을 많이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전생기 억들이 모두 그랬듯이 이번에도 그녀의 말이 역사적 사실의 단순한 나 열이 아니었다. 꿰르가 체포됨으로써 그녀는 자살을 하게 되는데, 그녀 는 비교적 과묵하고 순진한 처녀였다. 아마도 꿰르가 들려주었음직한 당시의 궁중생활에 대해서도 아리종은 언급하고 있다. 역사가들은 그녀 가 진술한 대부분이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했다. 아리종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다가 꿰르의 하녀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꿰르는 알렉산드리아, 베이루트, 카이로 등의 항구도시들과 통상 거래 를 했는데 그의 이름과 선박은 아랍권의 여러나라에 알려져 있었다. 그 는 교황으로부터 아랍권의 이교도들과 무역할 수 있는 특허를 얻어 막 대한 재산을 모았다. 꿰르는 주로 그의 고향인 브르스에서 살았다. 브 르스에는 그의 집이 서너 채 있었는데 그는 그곳에 쏘오세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저택도 지었다. 아리종은 꿰르가 많은 저택을 소유했으나 브르스에 살았다고 하며 장 날마다 리옹에 가서 그의 옷감들을 팔았다고도 한다. 사실 꿰르는 리옹 에서 열리는 장을 부활시킨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그녀는 주인 꿰르가 왕의 정부(情婦) 아녜스에게 다이아몬드를 선물 한 사실도 말했다. 꿰르는 아녜스에게 다이아몬드를 주며 그것이 불란 서에서 최초로 가공한 다이아몬드라고 말했다고 아리종은 진술했다. 어 떤 역사가는 꿰르가 프랑스에서 다이아몬드를 일정한 모양으로 자르게 한 최초의 사람이며, 아녜스가 프랑스에서 다이아몬드를 몸에 치장한 최초의 여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녜스가 꿰르를 찾아간 것은 왕에게 필요한 돈을 빌리기위해서였다 고 아리종은 말했다. 프랑스 역사가들은 샤를르 7세가 군인들 봉급을 성을 증축하는 데 다 써버리고 그의 정부를 시켜 꿰르에게 돈을 빌어오 게 한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한다. 꿰르와 아녜스는 아주 가까운 사이였으므로 아녜스가 꿰르를 방문했다는 것은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 들이 연인관계라는 소문도 있지만 그녀는 분명히 꿰르의 절친한 친구였 으며 궁중에서 그의 편이 되어주는 동조자였다. 아녜스가 죽은 뒤에 발 견된 유언장에는 꿰르가 유언집행자로 지명되어 있다. 또 아리종은 주인인 꿰르가 금 세공인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대해 프랑스 역사가들에게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그가 모피와 가죽제품을 취급하는 상인의 아들이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금 세공 인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금세공인의 아들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꿰르는 값비싼 금속과 보석들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었으며, 젊은 나이에 브르스시의 조폐국장이 되었을 정도로 이러한 것들에 통달 했었기 때문이다. 아리종은 샤를르 7세의 다리가 길쭉하고 가늘어서 학의 다리와 같으 며 바르와 왕가의 특징인 긴 코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샤를 르 왕은 그러한 외모를 가졌다고 한다. 지금 전해지는 그의 초상을 보 면 코가 아주 커다랗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왕이 몸에 달라붙는 의복 을 입었을 경우 다리가 너무 가늘어서 아주 우스워보였으며, 당시 프랑 스 사람들은 그의 다리를 학의 다리와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리종은 샤를르 7세가 어떻게 해서든 프랑스를 구하려는 열의를 보이지 않았으 며, 또, 사람들이 말하기를, 오를레앙의 처녀 쟌 다크를 영국인에게 넘 겨준 장본인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샤를르 7세가 쟌 다크를 영국인에게 넘겨 주었는지의 여부는 아직도 역사가들에게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1431년 쟌 다크가 화형당할 당시 왕은 그녀를 구해내려 하거나, 그녀의 몸값을 치르고 적에게서 그녀를 되찾아 보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여 론은 그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왕에게로 돌렸다. 아리종은 아녜스가 죽자 주인 꿰르가 몹시 상심하고 있으며 그녀는 독살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런데 꿰르의 반대파에서는 그 가 아녜스를 독살했다는 소문을 퍼뜨려 아리종이 몹시 상심하였다는 것 이다. 그녀의 말은 여기서도 맞다. 현대의 역사가들은 여지껏 아녜스가 독 살당한 것인지의 여부를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녀가 딸을 낳고 산후 병으로 죽었다고 보는 역사가들도 있다. 그러나 15세기 연대기 편자들 은, 아리종처럼, 루이 황태자가 아녜스를 독살했다는 사실을 의심하고 있다. 그러나 아리종이 꿰르의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 한 것은 사실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꿰르가 아녜스를 독살했다는 소문 이 궁정에 펴졌고 그가 그녀의 죽음에 관여琴다는 허위증언이 왕에게 제출되었기 때문이다. 1451년 아리종의 주인 꿰르는 샤를르 7세의 정부 인 아녜스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인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꿰르의 몰락과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아리종은 말하고 있다. 사를 르 7세는 꿰르의 재산을 모두 몰수해 그를 파산시켜버렸다. 그런 와중 에서 꿰르는 군대가 들이닥쳐 아리종이 다칠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그 는 차라리 아리종이 도망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아리종은 도망 가지 않았다. 그 후 아리종은 꿰르가 준 물약을 마시고 자살을 했다. 꿰르도 물약을 마셨는가 하고 브록샴이 묻자, 아리종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꿰르는 아리종을 음독케 하고 왜 자신은 음독하지 않았을까? 꿰르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감안해보면 그의 무정한 행동에 대해서도 합당한 설명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시 기독교적인 프랑스에서는 이단자에 대한 증오심이 대단했다. 꿰르가 보호하지 않았다면 아랍인들은 살기가 몹시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후일을 기약할 수 없는 다급한 상황에 서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약물을 먹여 그나마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도 록 한것은 꿰르의 배려였을 것이다. 꿰르는, 결국, 지하 감옥에 투옥되고 그의 재산과 소유물은 몰수당했 다. 그가 아녜스를 독살했다는 고소는 중도에 취하되었고 다른 죄목들 은 근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공판정에 올랐다. 꿰르는 변호사도 증인도 부를 수 없는 가운데 심문을 받고 고문을 당한 끝에 유죄 판결 을 받았다. 그는 공중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 목숨 을 보존했다. 그러나 모든 관공서의 출입이 금지되고 재산을 압수당했 으며 출옥을 할 수도 없었다. 체포된 지 삼년이 지나 꿰르는 감옥을 탈출하는 데 성공하여 프랑스 국토를 가로질러 도주했지만, 로오느 강 가까이의 국경에서 잡혀 수녀 원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꿰르는 자기를 따르는 약간의 추종자들에 게 편지를 보내는 데 성공했다. 그 때 편지를 받은 그의 추종자 가운데 는 과거에 선장이었던 사람도 있었다. 드디어 이십여 명의 무장을 한 사람이 한밤중에 그를 구출해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로오느 강을 건너 서 도주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후 꿰르는 로마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교황의 도움으로 터어키를 토벌하는 십자군 함대의 사령관이 되었 다. 그는 이 원정에 나가 소아시아의 해안에서 싸우다가 1456년 부상을 입고 예순살의 나이로 전사했으리라고 추정된다. 아리종의 이야기는 참으로 인상깊은 전생담이다. 그녀의 폭넓은 지식 은 15세기 당시 프랑스의 많은 분야를 두루 섭렵하고 있었다. 그 당시 의 의복 형태와 복장에 대한 충분한 설명과, 15세기 화가들에 대한 많 은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또 브르스에 있는 꿰르의 저택 안팎을 묘사 해 줄 수 있었고, 꿰르가 소유했던 물건들과 그가 수집한 물건들에 정 통했다. 역사가인 미레 씨는 그의 저서에서 "꿰르의 집과 인생은 신비로 가득 차 있다"고 적고 있다. 아리종의 이야기 역시 그를 더 신비롭게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아리종이 15세기 프랑스인인 꿰르에 대하여 보통 사람들이 알 수 없는 희귀한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아리종은 초상화와 그림들이 걸려 있는 긴 복도끝의 방에 귀한 황금 사과가 있다고 말했다. 터어키의 군주가 꿰르에게 황금사과를 주었다는 것이다. 르와르 계곡에 사는 역사가나 박물관장 가운데도 이 황금사과 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꿰르의 집 현관 입구에 돌 로 조각한 밀감나무가 있었다. 이 밀감나무는 그가 중동지역과 교역 관 계를 가녔던 것을 상징하는 뜻으로 조각한 것이다. 그리고 15세기 프랑 스 사람들은 밀감을 황금사과라고 불렀다. 아리종이 말한 황금사과에 대해서 사람들은 아무런 해명도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역사학 교수인 베일리 교수는 황금사과의 정체를 찾아 내었다. 그는 공문서 보 관소에서 [꿰르로부터 왕실 재무성이 압수한 물품의 목록]을 뒤져 보다 가 황금석류나무 열매라는 품목을 발견한 것이다. 석류나무 열매는 크기와 모양이 사과와 아주 비슷하다. 아마도 그 황 금열매는 그 후 누가 녹여서 썼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어쨌든 꿰르가 황금사과를 소유했었다는 사실은 밝혀졌다. 이 황금사과의 발견은 요크 시에서 '성모마리아 성당'의 지하실 발견 만큼 흥미로운 것이었다. 지하실이 발견됨으로써 유태인 레베카가 학살 당했다는 전생기억이 거짓이나 허구가 아니라는 구체적인 반증이 이루 어졌던 것이다. 성철스님 법어집 "영원한 자유"의 다음이야기는 <<제 4 장 최면술과 윤회에 대한 역사적 연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