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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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onvex (4ever 0~)
날 짜 (Date): 1995년06월23일(금) 05시52분11초 KDT
제 목(Title): 요크 시에서의 유태인의 아내(From Hitel)



 알기쉬운 교리 (방장 : 한승규)  ()
 제목 : 요크 시에서의 유태인의 아내
 #835/873  보낸이:이철수  (12357   )    04/11 11:48  조회:10  1/5

                          성철스님 법어집
                          영원한 자유
    부록 
  
    2. 한번 이상 사는가
  
  제 3 장 에반스 여사의 세 가지 전생
  
  1. 요크 시에서의 유태인의 아내
  
  제인 에반스는 최면 상태에 들어서 레베카라는 이름의 유태여인이 되
었다. 레베카는 요크대성당의 외부를 설명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
작했다.
  서기 1189년 유태인인 레베카는 과일과 채소를 사느라고 인근 시장에
서 장을 보고 있었다.  남편의 이름은 죠셉으로 돈많은 고리대금업자이
며, 나이가 사십대인 이들 부부에게는 열여덟살 난 아들 죠셉과 열한살
난 딸 레이첼이 있었다. 레베카의 가족은 커다란 돌집에 살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유태인 부호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거주하는 요크 시의 북쪽이
었다고 한다. 이 무렵의 역사적인 기록으로는 그러한 것에 대한 확실한
사실을 알 수 없다.  다만 유태인 공동체에 속했다는 소수의 유태인 이
름이 전해질 뿐이다.
  레베카는 할아버지가 지중해에 위치한 사이프러스 섬  출신이고 나머
지 가족들은 영국에서 출생했지만 영국인은 아니었으며  사회에서 버림
받은 계급이었다고 자기의 혈통을 설명했다.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당시 체스터, 링컨, 런던 등지에서 유태인을 반대하는 폭동
이 일어나자 불안한 나날이 시작되었다.   레베카는 플란타지니트 왕가
출신인 헨리 왕과 유태인의 관계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다.
유태인들은 법정에서 재판 받을 때 헨리 왕으로부터  보호를 받았고 왕
은 그 보답으로 돈을 지불받았다.   그러나 레베카는 왕이 서거한 해에
일어난 사건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유태인을 이단자로 몰아 위협하는
기독교인들에 관한 레베카의 진술은 제3차  십자군 원정을 초래한 사건
을 사실상 설명하고 있다.   반회교 감정은 물론 반유태인 감정이 한창
고조 되고 있던 그 무렵의 불란서와 영국에서는  군중들이 이단자로 몰
린 유태인을 향해서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켰다.   그 결과 많은 살인과
폭동이 뒤따르게 되었고 유태인은 '그리스도의 적'으로 간주되었다.
  레베카는 남편인 죠셉에게서 돈을 빌려간  메베리제와의 재판이후 몹
시 두려움을 느꼈다. 문 단속을 철저히 하는 것은 물론이고, 밤에 돈을
받으러 갈 때에는 유태인이란 표지를 위해 달게 되어 있는 노란 뱃지를
떼고 나가기도 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레베카가 말한 메베리제라
는 사람이다.  레베카는 당시 연대기 편자가 '유태인 학살의 주모자'라
고 기록한 메레비제라는 사람에 대해 언급하는 것 같다.  '메레비제'와
'메베리제'는 서로 거의 비슷한 이름이다. 이 사람은 후일 유태인 학살
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벌금을 물고 유형에 처해졌다고 전해진다.  메
레비제라고 불리는 요크 시의 이 미미한 귀족은  유태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었으므로, 그 돈을 갚지 않으려고 그들을 살해함으로써 빚을 청
산하려 했다는 것이다. 위급한 상태가 계속 되자 레베카의 가족들은 성
을 빠져나와 성당에 피난처를 마련하여,  성당 밑바닥에 있는 지하실로
내려갔다고 한다. 레베카의 가족들이 숨은 곳은 요크성 성문 밖에 위치
한 조그만 성당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그곳에서 레베카는 딸 레이첼을
빼앗겼다. 그리고 레베카 역시 성당 안의 지하실에서 살해당했다.
  레베카의 말을 담은 테이프를 욕크대학교의 역사학 교수인 도브슨 박
사가 들었는데,  그는 '1190년의 유태인 대학살'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한 사람이다. 도브슨 교수는 레베카가 사용한 언어는 중세영어라기보다
는 12세기에 쓰던 영어라고 밝혔다.  또 레베카의 얘기는 그 사건이 일
어난 당시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일치한다고 했다.   도브슨
교수는 레베카가  성에서 성당으로 도망했다는 설명을 듣고  그 성당이
어느 성당인지 찾아내고자 했다. (그 도시에는  약 40개가 넘는 성당이
있었는데 지금도 약 반수 가량이 형태가 조금씩 달라진 채로 남아 있다
고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도브슨 교수는 성모마리아 성당이 레베카가
최후를 맞았던 곳이라고 짐작하게 되었는데,  그 성당은 레베카가 말한
것처럼 성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놓여 있다고 한다.  그런데 틀린 점
이 있다면 대성당 하나를 제외하고는  어느 성당도 지하실을 가지고 있
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1975년 9월, 성모마리아 성당을 수리하던 한
일꾼이 이 성당에서  예배실처럼 보이는 지하실을 발견했다. 일꾼은 석
굴과 둥근 천정 등을 보았다고 말했다.  또 이 건물이 로마풍의 건축양
식으로 지어졌는데 그것은 서기 1190년 이전에 유행했던 양식이라고 한
다.
  레베카는 말하던 도중에  군중들이 이단자라고 유태인을 몰아 세우며
위협을 하던 광경을 생생하게 떠올리듯, 두렵다는 말을 반복했다. 유태
인들은 자기의 자식이 남의 손에 살해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스스
로 죽이기도 했다고 레베카는 말했다. 이는 '자비살인'이라고 표현되고
있는데,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요크대학살 당시 일어났던 일 중에서 가
장 가슴아픈 일이었다.    

성철스님 법어집 "영원한 자유"의 다음이야기는
                               <<로마시대 가정교사의 아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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