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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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valley (이 상 제)
날 짜 (Date): 1999년 5월 11일 화요일 오후 08시 23분 18초
제 목(Title): 한국의 선사들



천리안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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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3. 제목 : [선문답]1.혜암선사 (전 해인총림 방장)   <1998/10/15 20: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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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가 요구하는 혁명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과감한 발상의 전환과 
기존 사유체계의 파격적인 개조가 앞서야 한다.

선 (禪) 은 종교의 세계를 뛰어넘어, 개혁을 견인할 발상의 전환에 충분한 
자양분을 공급할 만한 보고 (寶庫) 다.

선은 이미 1천5백년전 21세기 정보화시대가 필요로하는 직관력과 창의성을 역설, 
기존의 이분법적이고 분석적인 분별심을 과감히 버리라고 촉구했다.

선문답속에는 때론 막힌 가슴을 후련하게 뚫어주는 통쾌함이, 때론 모독적인 
욕설과 모순을 극한 역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인간의 정신세계를 죽이고 살리는 
살인검.활인검 (活人劍) 이 섬광처럼 번뜩인다.

한국불교 선종 (조계종) 의 노숙 (老宿) 들을 찾아 화두라는 옛거울 (古鏡) 을 
오늘에 새삼 닦아 비춰보는 선문답을 펼쳐 격주로 연재, 시대가 요구하는 발상의 
전환에 보탬이 되고자 한다.

문 : 빈손으로 왔습니다.

답 : 아래에다 내려 놓아라 (放下着) . 문 : 아무것도 가진게 없는데 무얼 내려 
놓으라 하십니까.  답 : 그럼 가지고 가거라. (진정한 절대자유를 누리기 위해 
아무것도 갖지 않는 무소유의 삶을 살려면 빈손만으론 충분치 않다.

빈손이라는 생각까지를 버림으로써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버리는 '방하착' 
을 해야 선의 경지에 도달한다.

참으로 일체의 분별심을 버린 무심의 경지라면 물건을 가졌다, 안가졌다 하는 
분별이 생길리 없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부처를 포기해야 한다.

이것이 선의 진리에 이르는 길이다.

혜암선사는 기자와의 '방하착' 선문답 말미에 김대중대통령을 만나면 "즉각 모든 
사유재산을 버리라" 고 말하겠다고 했다.)  문 : 부처도 초월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답 : 저 아랫 마을에서 밭갈이를 하고 있는 농부다.

  (부처도 뛰어넘는 향상인 (向上人) 이란 과장법적인 표현이고 실제로는 부처와 
동등한 깨침의 경지를 이룬 사람을 말한다.

농부가 소를 몰고 밭갈이할 때 소와 사람이 완전한 혼연일체를 이룬다.

이른바 삼매경 (三昧境) 이다.

소가 반듯이 가지 않고 제멋대로 날뛰면 밭갈이가 되겠는가.

소를 몰아 밭갈이하는 농부야말로 어떠한 잡생각도 없이 밭갈이에만 몰두하는 
무심과 무분별의 경계인 부처라 할만하다. )  문 : 세속에는 정치판을 비롯 
각계에 사정한파가 세차게 몰아치고 있습니다.

이럴때 날씨가 추운겁니까, 사람이 추운겁니까.  답 : 모든 사람이 다 그 속에 
있다.

(우주 대자연의 질서로서 전개되고 있는 날씨 자체에는 춥다, 덥다는 구별이 없다.

인간들이 공연스레이 온도계를 만들어 놓고 춥다, 덥다를 분별하며 수다를 떨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이처럼 덕지덕지한 분별지 (分別智) 때문에 번뇌.망상을 일으키게 된다.

어쨋거나 더워도 추워도 인간은 그 날씨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날씨에 지배받는 피동형이 아니라 날씨를 이용하는 능동형의 주체적인 
인간으로 사는 길만이 참된 삶이다.

모든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서 떨어진 이래 세속 먼지를 덕지덕지하게 뒤집어 
쓰면서 살아온 터다.

털어서 먼지 안날 사람 없는 중생일진대 사정한파는 추운 날씨처럼 피할길이 
없는게 아닌가. 혜암선사는 그래서 "모든 사람이 그속에 있다" 고 하는지도 
모른다. )  문 : 나라가 IMF 관리체제로 들어간 이후 살기가 어려워져서인지 강도.
절도가 부쩍 늘고 있습니다.

살인강도를 만났을때 죽이면 불살생 (不殺生) 이라는 부처님 가르침을 어기고 
그냥 내버려 두면 국법 (國法) 을 어기게 되는데 스님의 뜻은 어떠하십니까. 답 : 
법으로는 바늘도 용납되지 않으나 사사로이는 거마 (巨馬) 도 통한다.

  (불법이나 교회법은 세속법과 상충될 때가 적지 않다.

불법적으로는 강도가 도저히 찾을수 없는 천정속 깊숙히 감추어 둔 돈까지를 꺼내 
주면서 타일러 참회시켜야 한다.

그러나 세속법적으로는 격투를 벌여서라도 강도를 붙잡든지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

그렇지만 세속 실정법도 최종의 목표는 죄인을 개과천선시켜 새사람을 만들고자 
하는데 있다.

따라서 국법과 불법이 지향하는 최후의 도달점은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다만 공적 차원의 국법은 엄격하고 사적 차원의 불법은 너그럽다는 방법상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  문 : 옛날 조사스님들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 (祖 師) 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누누히 강조했습니다.

부모를 죽인 죄는 부처 앞에 참회하면 면죄부를 받을 수 있지만 살불살조 
(殺佛殺祖) 의 죄는 어디다 참회를 해야 합니까.  답 : 드러내라 (露) . (부처와 
훌륭한 인격자를 뜻하는 조사를 우리는 흔히 '절대자' 라는 개념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절대자는 인간이 개념화한 우주 만법 (萬法) 중의 하나다.

선에서는 이처럼 만법의 하나일뿐인 절대자까지도 마음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무심의 경지가 돼야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절대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친다.

물론 이럴때의 '살불살조' 는 육체적인 살인이 아니라 한오라기의 번뇌.
망상까지도 베어 없애는 정신적 살인, 곧 마음의 청정성 회복을 상징한다.

진정 살불살조를 한 사람이라면 견성 도인이고 해탈인이다.

이런 도인이라면 불도 (佛道) 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일 밖에 더 할일이 없다.

'살불살조' 의 참회처를 묻는 질문에 "드러내라" 는 대답은 이래서 기막힌 역설의 
진리를 담고 있는 화두가 된다. )  문 : 먼 후일 어떤 사람이 '혜암의 철학 (宗旨)
' 은 무엇이었느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을 하면 되겠습니까.  답 : 밥 먹고 
잠잤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는 우리의 일상생활은 가장 본원적인 우리 
마음의 씀씀이다.

밥 먹을때는 밥먹는 일에만 온 정신을 쏟아야 한다.

딴전 부리면 밥을 흘린다.

그때 그때의 생활에 열심이면 도리어 자유로워지고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진리는 먼데 있는게 아니라 이처럼 밥 먹고 잠자는 일상의 평범한 당연지사를 
어김없이 행하는 순리적인 삶속에 내재한다.

추우면 옷을 껴입고 더우면 바지가랑이를 걷어 올려 바람을 쐬는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마음을 이른바 '평상심' 이라 한다.

혜암선사는 자신의 삶이 언제나 변함 없는 평상심으로 충실하게 살고 있음을 
자부하고 있다.

불교 주요 경전인 금강경도 부처가 설법을 할 때마다 맨먼저 밥을 먹고 발우를 
씻어 정돈한 다음 법상에 올라 법문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밥먹고 그릇 씻는 일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귀중한 경전에다 일일히 기록을 
했겠는가.

부처의 설법에서도 밥먹는 일이 최우선임은 인간의 실존을 지탱해 주는 평상심 
이야말로 그만큼 중요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  문 : 눈 멀고 (盲) , 귀 먹고 (聾)
, 말 못하는 (啞) 세가지 장애를 동시에 가진 사람이 와서 법문을 청하면 어떻게 
교화하시겠습니까.  답 : 그래, 어디 그 일을 한번 의논해 볼까.  문 : 안녕히 
계십시오. 이만 갑니다.

답 : 그게 아니다. 그게 아냐.

(맹.농.아 삼종병자 (三種病者) 는 번뇌를 털어내는 불자 (拂子) 를 세워도 
보이지 않고, 설법을 해주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물어봐도 자기뜻을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런 중생을 제대로 교화할 수 없다면 불법의 영험은 전혀 쓸모 없는게 
아닌가.

'삼종병자' 라는 화두는 자기를 절대 부정해 육체적 자아를 버린 후 보는 일 없이 
보고, 듣는 일 없이 듣는데 까지 도달한 해탈의 경지를 상징한다.

그래서 혜암선사는 그같은 경지라면 한번 따져보자고 옥조인 것이다.

선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자구 (自求) 를 중시하고 밖으로부터 구하는 
자세는 멸시하는 가풍을 가지고 있다.

'자구' 중시의 가풍이라면 의논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해 기자는 작별을 고하고 
떠나려한 것이다.

혜암선사가 "그게 아니다" 라고 한 마지막 말은 깨달음이니 지혜안이니 하는 것도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때부터 가지고 있는 감관을 떠나서 있는게 아니라 6식 
작용에 의지한 자신의 내면 성찰을 통해 본래의 자아를 발견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고자 했으리라. )[혜암선사는]▶법명 : 성관 (性觀) 법호 : 혜암 (慧菴) 
▶1920년 : 전남 장성 출생, 서당서 한학 공부, 17세때 도일 (渡日) , 45년 
귀국▶46년 : 해인사로 출가^47년 : 봉암사서 성철.청담.보문.향곡 등과 4년 결사 
안거▶49년 이후 : 한암.고봉.동산.전강.금오.경봉 등 당대 선지식들을 두루 참방.
해인.범어.송광사 선원과 지리산 칠불암 등서 하루 한끼만 먹으며 장좌불와 등 
참선 안거▶77년 : 해인사 선방 유나 (維那) ▶83년 : 해인총림 선원 수좌▶85년 
: 해인총림 부방장▶93년 : 해인총림 제6대 방장▶94년 :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현재 해인사 원당암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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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17. 제목 : [한국불교의 큰스님]선문답 2.보성 율사   <1998/10/29 20: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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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밤비에 불어난 주암댐 물이 흘러넘칠 듯 둑에 넘실거린다.

아스라한 수면 저 멀리로는 전남 송광사를 슬하 (膝下)에 둔 조계산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지극히 자연스런 이 사실, 이 이치가 바로 지상에 구체화돼 나타나 있는 
삼계무법 (三界無法) 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옛 어른들은 이럴때의 의경 (意境) 을 "시를 짓고 싶은 정감 가을 물처럼 맑고, 
그림을 그리려는 마음 먼 산처럼 밝다 (詩情秋水淨 畵意遠山明)" 고 했던가.

청산녹수 앞에 서면 누구나 시인이 되고 화가가 되는가 보다.

흰 구름 머리 위에 두둥실 떠있고 조계산 푸른 계곡물은 오묘하게 줄 없는 
거문고를 타건만 알아 듣는 이 얼마나 될까. 송광사 조계총림 방장 보성 (菩成.70)
율사를 만나 줄 없는 거문고 소리를 들어 봤다.

[대담=이은윤 종교전문위원]문 : 이 절에 계신 스님들은 모두 송광사 앞 '조계의 
물 한방울씩 (曹溪一滴水)' 은 마셨습니까. 답 : 내 자네가 들어올 때부터 
알아봤다.

문 : 방장스님께서는 조계의 불법 (佛法) 을 얻으셨습니까.  답 : 나는 불법을 
모른다 (不識) .  <승보 (僧寶) 사찰 송광사는 절 앞에 조계라는 계곡물이 늘 
푸르게 흐른다.

송광사가 자리한 산명 (山名) 이며 계곡 이름이기도 한 '조계' 는 동아시아 
선불교 제6대 조사 혜능대사 (638 - 713)가 개창한 선종의 주류인 돈오 남종선 
(南宗禪) 의 불법과 종풍 (宗風) 을 상징한다.

원래 조계는 중국 광동성의 조 (曹) 씨 집 성촌인 동네 이름겸 그 마을 앞의 
시내 이름으로 혜능 (慧能) 조사가 36년동안 머물며 행화 (行化) 를 펼쳤던 
곳이다.

현재 조계종이라는 한국불교의 종단명칭도 혜능의 남종선 법맥을 계승한 선종 
(禪宗) 임을 뜻하고 있다.

  따라서 질문은 그래 조계총림에는 그 이름에 어울릴만큼 천하를 흥건히 적신 
조계 법유 (法乳) 한방울을 마신 깨달은 선승들이 많으냐는 얘기다.

보성방장은 질문의 화살이 나르자 털로 만든 소리 안나는 전박판 (氈拍板) 을 
들어 "그 정도라면 흥분하지 말고 진정하라" 고 응수했다.

  '불식 (不識)' 이라는 말은 의식에 얽매이지 않은채 무엇인가를 표현하고자 할 
때 가장 적합한 말이다.

달리 말한다면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어찌 표현해야 좋을지를 모를 때 쓰는 
'부정적 긍정' 이다.

우리는 아내가 감정이 토라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몰라 몰라" 라고 앙탈을 
부리거나 익히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려고 "잘 모르겠는 걸" 하는 말들을 
일상생활에서 자주 접한다.

이럴 때의 '불식' 이 바로 겉은 부정이지만 속은 긍정인 부정적 긍정이다.

선종은 달마 이래로 문자 밖의 도리인 불법 진리를 부득이 표현해야 할 경우 
이처럼 '불식' 이라는 말을 써오고 있다. >문 : 스님께서는 무슨 도리 (道理) 를 
보았기에 이처럼 공기 맑고 경치 좋은 조계산에서 안주하고 계십니까. 답 : 
똥독에 빠져 있다.

   <참으로 깨친 사람은 결코 열반이라는 곳에 주저앉아 즐기기만 하고 있어선 
안된다. 열반의 경지까지도 박차고 한걸음 더 나가는 백척간두 진일보 (白尺竿頭 
進一步) 를 해 완전한 공의 세계 (속세) 로 들어가 중생과 삶을 같이 하면서 
세속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돼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선이 지향하는 '부주열반 (不住涅槃) 이라는 지향점이다.

보성방장은 왜 난데 없이 똥독 이야기를 했을까. 그에겐 똥독이라는 오탁악세 
(五濁惡世)에 빠져 오물을 뒤집어 쓴 것쯤은 문제가 되질 않는다.

똥물은 기어나와 뜨거운 물로 샤워 한번하면 냄새도 찌꺼기도 깨끗히 씻겨나간다.

그러나 그의 중모습.중냄새는 아무리 비누칠하고 씻어내도 없어질 수 없다.

따라서 그에게 절박한 것은 불법의 본질을 상징하는 중모습.중냄새지 몸둥이에 
묻은 똥물이 아니다.

  보성방장의 '똥독' 에는 속인처럼 보일지도 모르는 자신의 겉모습 뒤에는 
씻어도 없어지지 않는 영원한 불법의 향기 (스님 냄새)가 풍기고 있다는 자부심 
같은게 엿보인다.

선법 (禪法) 의 고향인 역설 (逆說) 의 아성속에서 빛나고 있는 그의 악랄한 
가풍이다. >문 : 지금 세속은 10대 윤락녀의 절반이 여중생이고 심지어 
마누라까지 바꿔 노는 성도덕의 문란이 심각한데 이들을 제도 (濟度) 할 방편이 
있으십니까.  답 : 우리 모두가 고향을 멀리 떠나 불행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同是天涯 淪落人) .  < '동시천애윤락인' 은 중국 당나라 3대 시인중 한사람인 
백거이 (白居易.772 - 846) 의 시 "비파행 (琵琶行)" 에 나오는 7언구다. 시의 
주인공은 신분 몰락으로 술집에 나와 비파를 뜯으며 작부생활을 하고 있는 기구한 
삶의 한 여인이다.

  '윤락녀 (淪落女)' 라는 말도 여기서부터 비롯했다.

때때로 많은 지성인들에게서 보아오듯이 행동과 도덕의 질 (質) 을 결정한다는 
이성도 섹스 앞에서는 추풍낙엽처럼 무력하지 않던가.

  보성방장이 백거이의 싯구를 인용한 것은 인간의 본래 고향인 청정심을 상실한 
세태를 개탄한 것이다.

이 싯구는 술집서 응큼하게 여자를 꾀일 때 써먹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인간 
도덕성의 타락을 아파하는 외마디 소리요 본래심 (本來心) 회복의 촉구다. >문 : 
비 오는 날은 나막신 장수딸이 걱정이고 개인 날은 우산 장수딸이 걱정인 노파의 
근심을 어찌해야 확 풀어줄수 있겠습니까. 답 : 비 오는 날은 우산 장수딸만 
생각하고 개인 날은 나막신 장수딸만 생각한다.

   < '노파근심' 이라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도 선은 이처럼 농담 같은 한마디로 
쉽게 풀어낸다. 보성방장의 답은 초등학생들도 쉽게 맞힐 수 있는 해답이다. 
마음속에 천지를 담고 있는 상태가 곧 선의 세계다. 선에서 말하는 마음은 '생명' 
을 뜻한다. 그 생명은 추우면 화롯불 쬐고 더우면 부채질 하는 무의식이라는 
야성적 에너지에 의해 지탱된다.

따라서 모든 걱정의 뿌리인 마음을 무의식적으로 비 오는 날은 우산 장수딸, 
개인 날은 나막신 장수딸만 생각하도록 훈련 (수행) 해 긍정적 사고속에서 살면 
노파의 근심은 사라질 수 있다.

세살 먹은 아이도 알기는 쉬운 일을 80노인도 행하기는 어렵다 하지 않았던가. >
문 : 옛날 조사스님들은 돌과 나무 같은 무정물도 불법을 말하고 알아듣는다는 
무정설법 (無情說法) 을 설했는데 요사이 국제 금융시장의 투기꾼들은 부처님 
말씀을 전혀 못 알아듣는 것같으니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답 : 삵괭이와 흰 
소 (理奴白고)가 불법을 안다.

<최근 세계 금융시장에서 1일 거래되는 1조5천억달러중 그 1백분의 1인 
1백50억달러만이 산업자본으로 투입되고 나머지는 모두 투기자본이라고 한다.

질문은 신자유주의를 기치로 한 자본주의 세계 한편에서 맹목적인 충동에 들떠 
투기적인 카지노 자본주의 파도를 타고 윈드서핑하는 국제 투기금융 현실을 비판, 
그 해답을 찾고 있다.

맹수류에 속하는 삵괭이는 주린 배를 채우는 사냥 이상의 욕심을 내지 않는다.

배불리 먹고 나면 그저 낮잠을 자고 우주가 선물한 대자연의 정경을 두눈 뜨고 
즐긴다.

소는 인간을 위해 매를 맞으면서도 불평 없이 논.밭갈이하고 묵묵히 무거운 짐을 
실은 우마차를 끈다.

선에서는 대지와 수평적인 동물들의 자세를 직립 (直立) 의 인간보다 훨씬 더 
불법 진리에 부합하는 안정 (Well - being) 의 상태로 본다.

사람은 직립하면서 피를 위로 끌어 올리는 장력 (場力) 을 지탱하느라 고통을 
겪고 있다.

  정글법칙을 따라 사는 삵괭이와 일만 하는 농우 (農牛)가 오히려 무욕.
보살도라는 불교 교리에서 볼때 무한대의 욕심에 불타는 투기 자본가들 보다 한참 
위라 할수 있다.

  '이노백고' 라는 화두는 선학적으론 욕망의 절제.보살도 외에도 일부러 
동물처럼 어리석은 척 하는 가운데서 선리 (禪理) 를 터득하는 '치둔 (痴鈍) 의 
철학' 을 상징한다. > 문 : 3계 (욕계.색계.무색계) 를 통털어 이 세상 어디에도 
가시적인 형체를 가진 법 (法.진리) 은 없다 (三界無法) 했는데 어디서 마음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답 : 주암댐 물이 둑에 넘친다.

   <우주와 내가 하나로 합쳐졌을때 둑에 넘치는 가을물처럼 마음이 홀연히 
드넓어지고 깊어지면서 이 세계에는 오직 마음만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는 얘기다. 
옛날 반산보적 (盤山寶積) 선사는 푸줏간 앞을 지나다 주인과 손님의 대화를 듣고 
깨쳤다.손님이 "제일 좋은 고기를 주게" 하니까 주인은 칼을 내동댕이 치면서 
"우리집 고기는 모두 제일 좋은 정육일뿐 나쁜 고기는 하나도 없다" 고 호통을 
쳤다.

반산에게는 푸줏간 주인의 말이 "이 세상 나쁜 사람은 하나도 없다" 로 들렸던 
것이다.

인간의 무의식 세계를 상징하는 저수지에 넘실거리는 가을물은 분석하고 
생각하는 의식작용 저 아래에 깊숙히 자리한 우주 근원과 연결된 존재의 
밑바탕이다.

마음이란 이같은 무의식 세계로 깊숙히 들어가지 않고는 찾아낼수 없다. 반산의 
'삼계무법' 이라는 화두는 이처럼 생명의 근원인 무의식을 일깨운다. >   
[보성율사는…]▶1928년 : 경북 성주 출생 ▶45년 : 해인사서 사미계 수지 ▶50년 
: 해인사 강원 중등과 수료 해인사서 비구.보살계 수지 ^62년 : 총무원 종무위원 
▶70년 : 송광사 총무국장 ▶71년 : 광주 증심사 주지 ▶73년 : 송광사 주지 
▶74년 : 조계종 종회의원 ▶81년 : 단일 계단 (戒壇) 유나 ▶91년 : 송광사 주지 
▶54년이후 30 하안거 (夏安居) 수행 ▶98년 4월~: 송광사 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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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20. 제목 : [선문답]3.수덕사 덕숭총림 방장 원담선사   <1998/11/12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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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견 (杜鵑) 이 울고 산죽 (山竹) 이 쪼개진다.

  근세 한국불교 중흥조 경허.만공선사가 머물었던 도량 (道場) 인 덕숭산 
(德崇山)가풍은 이처럼 격렬하고 가파르다.

  그래서 충남 예산 수덕사 덕숭총림 방장 원담 (圓潭.72) 선사를 찾아 가는 
길에는 담력을 다지고자 점심으로 온양 저수지서 얼큰한 밑물 매운탕 한 그릇에 
소주 반병도 마셨다.

경허 (鏡虛.1849 - 1912) 선사가 초겨울 어느날 시자 만공 (滿空) 을 데리고 
탁발을 나갔다.

  저녁때가 되자 만공의 바랑에는 동냥한 쌀이 묵직했다.

  탁발을 끝내고 수덕사로 향하는 길에서 경허선사는 산밑 주막집으로 들어가 
파전 한 접시와 막걸리 한 주전자를 청해 마시고는 술값으로 탁발한 쌀을 
주모에게 몽땅 털어주라고 만공에게 명했다.

  깜작 놀란 만공이 "스님, 내일 아침 대중들 공양은 어떻게 하라구요" 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 때 경허는 취기 (醉氣)가 오른 자신의 불그레한 얼굴을 가리키며 "오늘 
단청불사 (丹靑佛事) 는 이만 하면 됐다" 하고는 갈길을 재촉했다.

경허 가풍의 얼근한 취기로 수덕사 덕숭총림 원담방장을 만나 세상을 한번 
내려다 봤다.

  문 : 스님께서는 그 좋은 얼굴을 가지고 왜 장관이나 판.검사를 하지 않고 중이 
되셨읍니까.    답 : 임마, 중보다 더 좋은 거 있어. 너는 골통 싸매고 취재해서 
기사써야 월급 타먹지만 여기는 목탁만 잘 쳐도 먹고 산다.

문 : 그래 그동안 얼마나 많은 중생을 제도 (濟度) 하셨읍니까.   답 : 한 명도 
없다. 내 자신도 구제하지 못했는 걸 뭘.  문 : 어떤 법문을 해오셨습니까.  답 : 
욕밖에 한게 없다.

문 : 무슨 욕인데요.   답 :  "야,×할 놈들아!"   <문답의 핵심 포인트는 
원담선사의 말후구 "×할 놈들아!" 다. 선에서는 지독한 욕이나 독설이 세속과는 
정반대로 지극한 칭찬이 된다. 선의 세계가 가지는 독특한 상징체계다. 따라서 
그의 말후구는 '선남선녀 (善男善女) 들아!' 라는 칭찬이다. 두번째 대답의 "한 
명도 없다" 는 계속 즉각적인 부정을 거듭해 얻는 긍정이다. 선의 사유체계가 
갖는 이같은 역설의 논리를 일명 '즉비 (卽非) 의 논리' 라고도 한다.  '금강경' 
에 자주 나오는 "반야는 반야가 아니기 때문에 반야다 (第一波羅密 
卽非第一波羅密 是名第一波羅密)" 와 같은 즉비의 논법이다.

  한국 선방에서 가장 많이 드는 화두인 조주종심선사 (778 - 897) 의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 (狗子無佛性)" 는 '무 (無)' 자 공안도 부정을 통해 "개에게도 
불성이 있다" 는 유.무 분별을 뛰어넘는 절대긍정을 도출하는 선리 (禪理) 다. 
이렇다면 원담선사가 제도한 중생이 한명도 없다는 부정이나 많다는 긍정은 전혀 
망녕된 분별심의 구분일뿐인 것이다.

첫번째 대답의 목탁은 언필칭 '사회의 목탁' 이니 입법부.사법부.행정부에 이은 
'제4부' 니 하는 언론과 불가의 상징인 목탁의 관계를 직지 (直指) 한 일할 (一喝.
고함소리) 이다.

  목탁은 공양때를 알리는 목어 (木魚)가 변형된 것으로 집회.염불.독경때 
사용한다. 목탁에는 물고기가 밤낮으로 눈을 뜨고 있듯이 수행자도 그처럼 잠자지 
말고 도를 닦으라는 뜻이 담겨 있다.

  한달만 배우면 치는 목탁이지만 목탁만 잘쳐서 먹고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중이나 신문기자나 '목탁' 을 잘 쳐야 한다. >  문 : 석가모니와 달마는 
각각 어떤 사람입니까.    답 : 석가는 서천 (西天.인도) 의 도둑놈이고 달마는 
동토 (東土.중국) 의 사기꾼이다.

    문 : 스님은 어떻습니까.   답 : 나도 똑 같다.

   <언뜻 보기엔 부처와 달마를 비방하는 신성 (神聖) 모독이요 부처를 욕하고 
조사를 매도하는 가불매조 (呵佛罵祖) 다. 원래가 선의 세계는 이렇다.

석가모니는 8만4천 법문을 설하고도 "나는 한마디도 설법한 바 없다 (不說一字)" 
고 잡아 뗐다. 달마는 양무제와의 문답에서 무제 (武帝)가 "절을 많이 짓고 탑을 
많이 세웠으니 얼마나 한 공덕이 되겠느냐" 고 묻자 "전혀 공덕이 안되니 절과 
탑들을 다 허물어 버리라" 고 일할했다.

  부처와 달마는 세속 논리로 보면 틀림없는 사기꾼이다. 그런데 원담선사는 
자기도 부처.달마와 똑같단다. 그는 이런 일화를 들려주었다. 여자냄새를 전혀 
모르는 11살 동진 (童眞) 으로 출가하던 날 수덕사 마당가에 주장자를 들고 
서있는 만공선사께 인사를 올렸다.

  선사는 아무말 없이 들고 있던 주장자로 원담의 머리통을 한대 내리치고는 
"알겠느냐" 고 했다.

  원담은 하도 아파서 무심코 "예, 알겠습니다" 고 대답했단다.

  만공은 "무엇을 알았느냐" 고 다그치면서 주장자를 다시 들어 올려 내리치려 
했다.

  이때 그가 더는 안맞으려고 엉겁결에 "아픕니다" 는 비명을 지르자 만공은 허허 
웃고는 방장실로 들어가버렸다.

그는 이제 와서 보니 그때 내뱉은 "아픕니다" 는 한마디속에 이미 모든 선지 
(禪旨)가 들어 있었고 일체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 (一切衆生悉有佛性) 는 
절대평등론을 내보인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부처도, 달마도, 원담도 몽둥이로 골통을 얻어맞으면 아프다.

그 아픔을 느끼는 의식작용을 일으킨 저 밑바닥의 '그 놈' 이 바로 우리의 
생명을 지탱해 주는 불성이다. >  문 : 저는 담배를 많이 피우는데 고급 
레스토랑이나 골프장 클럽 하우스에 가면 '흡연석' 팻말로 담배 피울수 있는 
자리를 제한합니다.

때때로 전망 좋은 금연석에 앉아 담배도 피고 식사도 즐기고 싶은데 가능한 
방법이 없을까요.

  답 : 옮겨라 (移) .

  <저 구석의 흡연석 팻말만 창가 테이블로 옮겨놓고 담배를 피우면 된다.

이것이 선적인 '발상의 전환' 이고 이른바 선행위 (禪行爲) 라는 것이다.

흡연석 지정은 절대적인 것도 아니고 강제적 구속력을 갖는 실정법이나 식당의 
성문화된 규정도 아니다. 본래가 식당의 흡연석 지정은 팻말을 놓는데 따라 
정해지는 임의적인 것이다.

따라서 팻말을 놓는데가 흡연석이고 팻말을 옮겼다 해서 흡연석수가 줄거나 
늘지도 않는다. 선은 이처럼 외적 여건에 지배당하는 피동적 삶이 아니라 자기 
주체성을 살리는 능동적 삶을 살라고 가르친다. >  문 : IMF로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는데 이들에겐 무엇을 보시해야 합니까.   답 : 거지는 부족한게 
하나도 없다.

  <선립 (禪林)에서의 '빈곤' 은 번뇌.망상을 다 털어버린 마음의 가난을 뜻한다. 
송곳 꽂을 땅이 없는데서 더 나가 꽂을 송곳조차도 없는 적빈 (赤貧) 의 
가난이라야 진짜 조사선 (祖師禪) 의 가난이고 마음을 비운 무심이다.

원래 산스크리스트어의 비꾸 (Bhiksu.比丘) 는 걸식하는 무일푼의 거지를 뜻한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역설적으로 말해 우주를 다 가진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겐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걸 필요하면 거저 얻으면 되니까.  '빈자보시 (貧者布施)' 라는 이 
화두는 IMF로 물욕의 억제와 진정한 무소유 (無所有) 의 가난을 알게 된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마음의 부자가 됐으니 큰 공부를 했다는 이야기다.

수덕사 주지 법장스님이 옆에서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지난 여름 하안거 (夏安居) 해제날 원담방장께 안거를 끝낸 납자들이 
인사를 오거든 노자나 보태주시라고 돈 50만원을 봉투에 넣어 드렸다.

나이가 71세나 되는 월룡수좌가 먼저 와서 작별 인사를 하자 원담방장은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통째로 줘버렸다.

얼마후 납자들이 들어오자 월룡수좌는 입승 (立繩.선방감독자)에게 그 봉투를 
그대로 건네 주고는 방장실을 나와 노자 20만원씩을 받은 젊은 사제 (師弟) 
두명한테 10만원씩 내라고 해서 길을 떠났다.

참으로 멋진 운수납자 (雲水衲子) 들의 무소유정신이고 적빈의 삶이다. >  문 : 
스님께 드릴려고 케이크 하나를 사가지고 오다가 굶주림에 지쳐 길가에 누워 있는 
개가 있길래 주고 왔습니다.

  답 : 여래 (如來)에게 보시를 했군.

  <기독교 성서 (聖書) 를 보면 그리스도가 "가장 보잘것 없는 자에게 베푼 것이 
바로 나에게 베푼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모든 고등 종교와 성인들은 이처럼 
하나같이 가난한 자, 억눌린 자, 비천한 자를 자신과 동격시하면서 구원의 우선 
순위에 두었다. 항차 개도 불성을 가진 중생의 하나일진대 어찌 케이크를 개한테 
보시한게 부처님께 공양한거와 다를 바 있겠는가. >  문 : 문안 인사가 
늦었습니다. 그래 여전히 화두는 또렸하신지요.   답 : 까만 숯더미 위에 앉아 
있다.

   <까만 숯 (炭) 은 '암흑의 진리' 를 상징한다. 이른바 노자가 말한 "모르는 
것을 안다는 사실이 최상 (知不知上)" 이라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암흑의 진리에 
들어간 높은 경지다.  원담방장은 이 한마디를 통해 자신과 만물이 하나가 돼 이 
속세를 곧 지상낙원으로 알고 평범한 삶속의 일들 조차를 신성하게 여기는 즐거운 
나날을 살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래서 겉만 보면 화두를 다 까먹고 멍청하게 
앉아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 원담선사의 대답은 한 소식한 경계를 드러내 보인 
사자후가 된다. 사자의 울음소리에 놀라 어둠이 깔리는 덕숭산을 도망치듯 서둘러 
내려왔다. >  [원담선사는…]▶1926년 전북 옥구군 출생. 속명 김몽술 (金夢述) .

▶1937년 수덕사로 출가▶1941년 만공스님에게 사미계 수지▶1943년 
만공선사로부터 법을 인가받음▶1960년 화엄사 주지▶1970년 수덕사 주지▶1983년 
덕숭총림 개설▶1986년 덕숭충림 제3대 방장 취임▶1986년 일본 산케이신문 
국제서도전 대상수상▶1994년 조계종 원로회의 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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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1. 제목 : [한국불교의 큰스님/선문답]4. 서옹선사   <1998/11/26 20: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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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려다 보니 백운 (白雲) 이요, 건너다 보니 청산 (靑山) 이다.

  백운청산의 경계 (境界) 는 남산에 구름 일자 북산에 비가 온다.

  우리는 이같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평범한 대자연의 섭리를 별탈 없이 예사롭게 
받아들이며 산다.

  이게 바로 마음과 우주가 하나라는 것이다.

  그저 이것 뿐이다.

  그런데 그만 여기에 비단옷과 감투가 끼어들면 산꼭대기서 파도가 일고 
우물밑서 먼지가 인다.

  중국 송대의 대도곡천 (大道谷泉) 선사는 "미풍을 안고 태양을 향한채 낮잠에 
들면 그지 없이 쾌적하여 그 경지는 마치 세속 사람이 비단옷 입고 으시대는 것 
이상이다" 라고 설파, 산꼭대기의 성난 파도를 잠재우려 했다.

  일본을 다녀오는 여로에서 잠시 서울 상도동 백운암 (白雲庵)에 머물고 있는 
전남 장성 백양사 고불총림 방장 서옹 (西翁.86) 선사를 만나 봤다.

  터만 잡아놓고 절은 아직 못지은 백운암이지만 언덕 위의 흰 구름은 늦가을 
하늘만큼이나 높았다.

  문 : 홀연히 술에 몹시 취한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교화하시겠습니까.   답 : 
번뜩이는 칼날에 머리를 들이대도 가을 바람에 스치듯 한다.

   <물음은 극히 세속적이고 형이하학적이다. 세속은 과음으로 인사불성인 자를 
취한 (醉漢) 이라 하여 치한 (癡漢).일전한 (一錢漢 : 돈만 아는 놈) 등과 같은 
'놈' 의 부류로 취급한다. 한자의 한 (漢) 은 크고 위대하다는 뜻도 있지만 앞의 
경우들은 사나이를 낮추어 멸시하는 '놈' 의 뜻으로 사용된 것이다.  자, 
그렇다면 술주정꾼에게 비단길을 미끄러져 가는 부처님 설법을 해준들 먹힐 리가 
없다.   그렇다고 취한 하나쯤 지도하지 못한다면 어디 큰 스님이라 할 수 
있겠는가. 서옹선사는 그 연배로는 흔치 않은 일본 임제대학을 나온 선장 (禪匠) 
답게 형이하의 취한을 찰나에 형이상 (形而上) 의 세계로 끌어 올린다.

  즉 불법진리로 빚은 법주 (法酒)에 만취한 사람이라면 시퍼런 칼날에 머리를 
부닥쳐도 전혀 상처없이 바람 스치듯 비켜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는 취한 하면 술주정꾼만 생각하지만 나는 불법을 흠뻑 마신 취한 
(해탈자) 을 생각한다는 얘기다.

  멋진 곡예다. 교 (敎) 같으면 '동사섭 (同事攝)' 을 내세워 화복을 함께 
함으로써 취한을 진리의 길로 이끈다고 하겠지만 선은 말장난 같은 한마디로 
곤경을 이처럼 헤쳐나간다. 세속 현실에서도 자다가 차 사고를 당하거나 술에 
몹시 취해 무의식 상태에서 낭떠러지에 떨어지면 전혀 안다치는 기적을 체험한다. 
불법을 빌린다면 '무심' 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취한제도 (醉漢濟度)' 라는 화두는 중국 선림의 현사사비선사 (835~908)가 한 
중으로부터 같은 질문을 받고 "원래 우리 육신은 주인도 없고 공 (空) 한 지라 
칼날에 베일 게 없느니라" 는 승조 (僧肇.384~413) 스님의 게송을 인용해 답한 바 
있다. >   문 : 조계종단에 요사이 총무원장이라는 감투를 놓고 큰 싸움판이 
벌어졌는데 싸움을 말릴 방법이 없습니까.    답 : 눈 위를 밟고 간 기러기 
발자국이다 (雪泥鴻爪) .   <해빙기의 기러기가 강변의 잔설 위를 열심히 밟고 
지나간다. 그러나 한참을 가다가 자신의 발자국이 잘 남아 있으려니 하고 뒤를 
돌아다보면 이미 눈이 싹 녹아버려 발자국은 흔적도 없다. 종정이니, 
총무원장이니 하는 감투라는 게 뭔가, 잔설 위에 남긴 기러기 발자국에 불과한데 
말이다. 세속의 장관이니, 사장이니 하는 감투도 예외가 아니다.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는 '설니홍조' 의 삶을 살고자 하는 게 조사선 (祖師禪) 의 선지 (禪旨) 
다.

흔히 말하는 조사선이란 중국 선종의 제6대 조사 조계혜능 (638~713) 이후 선종 
5개 종파를 창종한 개산조들을 포함, 10세기 중엽까지 선불교를 만개시킨 거물 
선사들이 전개한 부처도, 조사도 뛰어넘는 초불월조선 (超佛越祖禪) 을 말한다.

서옹선사는 한국불교 선종 (조계종) 의 법맥이며 조사선의 큰 줄기인 임제선 
(臨齊禪) 의 대가로 세계 문명사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 조사선의 역할을 거듭 
강조해 오고 있다. >   문 : 임제스님은 "부처를 찾고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도 지옥에 갈 죄업이다" 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뭘 배워야 합니까.   답 :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여라 (殺佛殺祖) .

   <선에서는 부처도, 조사도, 부모 형제도 만나는대로 모두 죽여버리라고 
가르친다. 또 8만4천 경문 (經文) 은 밑씻개나 고름닦는 종이에 불과하다고 
일갈한다. 겉보기로는 억지소리고 모순에 찬 역설 (逆說) 같지만 부처와 경전을 
지극히 떠받든 찬사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의 본질이 '공' 이라는 것을 스스로 
철저히 깨달아 자기 자신이 부처가 되는 자수성가 (自手成家) 를 이루어야 진짜 
해탈이고 도통 (道通) 이다.

  선은 학교 공부처럼 부처나 조사의 가르침에 의지해 지식을 습득하는 게 아니라 
피나는 자기 성찰을 통해 발견한 내재적 자아 (眞我) 를 신앙하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조사에 의탁해 깨침을 얻으려는 자세는 당초부터가 어긋난 길일 수밖에 없다.
선 공부는 우선 부처에 집착하는 마음까지도 칠판의 백묵 글씨 지우듯 깨끗이 
털어내 버리는 무심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것이 모든 번뇌.망상과 집착을 버리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알몸뚱이의 무심이다.

  부처는 어디에 있나. 부처란 아무데도 없다. 자신이 부처가 되면 그만이다. >   
문 : 역시 임제선사가 말한 직위도, 계급도 없는 참사람 (無位眞人) 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답 : 밤에 아이를 낳는 돌계집 (石女) 이다.

   <선종 5가 (五家) 중 가장 유구하고 번성한 임제종 개산조인 임제의현 
(臨濟義玄.?~866) 선사는 심장을 뜻하는 "빨간 고기덩이 (赤肉團.赤團心) 안에 
참사람이 있어 항상 여러분의 눈.귀.코.입 등을 통해 드나들고 있다" 고 설파했다.

  마음의 상징인 심장은 연꽃 모양의 고기 덩어리다. 마음이 의식작용을 일으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알게 한다.

  그렇다면 진인 (眞人) 의 본체는 육체가 아니라 마음이다.  그런데 아이를 낳는 
석녀가 진인 (real self) 이라니…. 우리는 아이를 못낳는 불임 여성을 석녀라 
부른다.

  돌계집이 아이를 낳는 도리는 토끼가 달빛에 아이를 배고 (兎子懷胎) , 조개가 
보름달 빛을 머금으면 임신을 하는 것 (蚌含明月) 과 같은 원리다. 동양에서는 꼭 
육체적 교섭이 없더라도 기 (氣) 로 임신을 시키는데, 도교는 여자에게 이같은 
방법으로 임신시키는 것을 투태 (投胎) 라 한다. 여기서 석녀는 흔히 말하는 
다이아몬드 같은 반야지혜를 상징한다. >  문 : 여자는 다섯가지 장애 (五障) 를 
가지고 있어 부처나 범천왕.제석 (帝釋).마왕.전륜성왕이 될 수 없다던데 어찌 
하면 그 죄를 면할 수 있습니까.    답 : 원하건대 영원히 고해 (苦海)에 
빠져있기를 바랄 뿐이다.

  <죄를 면하게 해달라는데 영원히 지옥에나 머물라니 악담도 보통이 아니다. 
그러나 이 악담이야말로 스스로는 고해에 빠져들 망정 다른 사람들은 모두 
하늘나라에 태어나길 기원하는 대승 보살의 생활태도를 설파한 훌륭한 법문이다.  
"중생의 병이 다 낫기 전에는 내 병도 결코 나을 수 없다" 고 했던 유마거사의 
중생제도 사상과 일치하는 한마디다. 진정한 동체대비 (同體大悲) 의 공동체 
의식이 없다면 인간사회는 끝장이다. >   문 : 어떤 것이 평상심으로 도 (道)에 
합치하는 것입니까.   답 : 차를 마시고 밥을 먹으니 세월이 가고, 산을 보고 
물을 보니 마음이 상쾌하다.

   <차 마시고 밥먹는 일을 흔히 다반사 (茶飯事) 라 하여 하찮게 여긴다. 그리고 
두 눈만 뜨면 보이는 게 산이고 물인데 그게 무슨 대수냐고 코웃음을 친다. 
천만의 말씀이다. 다반사같은 당연지사를 소홀히 하는 데서부터 모든 왜곡과 
비리가 시작된다. 배가 고파야 밥이 당기고 들어가지, 잔뜩 먹고난 후에는 아무리 
산해진미의 성찬이라도 먹을 수가 없다.

이때 더 먹으면 배탈이 나거나 체한다.  '시장이 반찬' 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산과 물을 보고도 상쾌감을 못느끼는 사람은 뭔가 고민이 있고 정상이 아닌 
사람이다. 인간이란 게 별게 아니다. 자연의 섭리를 따라 살아가게 돼있는 극히 
순리적인 실존의 밑바탕에서 어긋나지만 않으면 즐거운 나날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선이 가르치는 인생철학은 이처럼 간단 명료하다. >   문 : 어제 저녁에는 
마누라하고 대판 싸웠는데 오늘 저녁에 들어가서는 어떻게 할까요.    답 : 
박살을 내라.

  <선은 역설의 미학을 즐긴다. 박살을 내다니. 마누라를 두들겨 패란 말인가. 
아니다. 싸움 끝에 맺혀있는 응어리를 박살내라는 얘기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 라고 하지 않던가. 아무리 심하게 다투었더라도 다음날 밤 합방 (合房) 
하고 나면 미움은 뜨거운 물에 얼음 녹듯 사라진다. 서옹선사는 비구라 남녀의 
정애 (情愛)에 대한 체험적 지혜는 없겠지만 외눈박이 독안룡 (獨眼龍) 이 보는 
평상심의 가르침이리라. 그는 경상 (經床) 위에 있는 신도가 보시한 케이크 
상자를 집어주면서 "오늘 저녁 부인하고 이 케이크를 잘라먹고 합방" 하란다. 
밝은 달은 하늘을 가득히 채우되 요란스럽게 비치지는 않는 (皓月普天而非照) 
서옹 노숙 (老宿) 의 가풍이다. >  [서옹선사는…]  ▶1912년 충남 논산 출생  
▶1932년 서울 양정고보 졸 백양사로 출가  ▶1935년 중앙불교전문학교 졸 백양사 
강원 영어외전 강사  ▶1937년 오대산 한암선사 문하서 2년간 참선  ▶1941년 
일본 임제대학 졸 일본 묘심사 선원서 3년 수선 (修禪)   ▶1962년 동국대 
대학선원장겸 조실  ▶1964년 무문관.동화사.백양사. 봉암사.대흥사 조실  
▶1974년 조계종 제5대 종정  ▶1996년 백양사 고불총림 방장대담 = 이은윤 
종교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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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제공시각 : 12/10 18:52                   출처 : 중앙일보
 제목 : [한국불교의 큰스님 선문답]5.성수 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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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엽 진 텅 빈 산속, 사람은 보이지 않고 체로금풍 (體露金風) 만 스치
는데 지는 햇빛 산속 깊숙히 들어와 바위 위 푸른 이끼를 다시 비춘다.

  늦가을 덕유산 굽이 굽이 맑은 계곡물을 끼고 경남 함양군 안희면 황대
마을의 황대선원 (黃垈禪院) 을 찾아가는 길의 풍광이다.

  간간이 나타나는 산촌 (山村)에는 까치밥으로 남겨 놓은 감나무 꼭대기
의 홍시 (紅枾) 들이 손대면 톡하고 터질 것만 같다.

  저 홍시들은 까치가 먹고도 남으면 하얀 눈과 함께 허공속으로 떨어져 
흙바닥에 녹아 흐르다가 끝내는 자신을 비워버리리라. 마치 진흙소 (泥牛
)가 바다에 뛰어들어 녹아 없어지듯이 말이다.

  덕유산 끝자락 시내가의 아늑한 마을안 고목 느티나무 옆에 자리한 황대
선원은 의외로 건축 공사장 가림막이용 철판의 가건물 몇채로 구성된 절이
었다.

  이 토굴의 암주 (庵主) 인 성수 (性壽.75) 노장은 얼마전까지도 만행 (
萬行) 을 멈추지 않던 운수행각 (雲水行脚) 의 납자였다.

  [대담=이은윤 종교 전문위원]

  문 : 황대마을 영수 (靈樹) 의 과일이 다 익었습니까. 
  답 : 보살년들이 돈 막 갖다줘 중들 다 베릿 (버렸) 다.

  <질문은 매우 상징적이고 형이상학적이다.
  우선 질문이 뜻하는 바를 직설적 표현으로 바꾸면 "성수선사, 당신의 제
자들이 다 견성 (見性) 을 해서 도인이 됐느냐" 는 다그침이다.

  신령스런 나무는 성수노장을, 과일은 그의 제자들을 가리킨 은유적 표현
이다.

  성수노장의 대답은 돈이 흘러넘쳐 오늘의 불교 현실을 망치고 있다는 개
탄이다.
 
  그래서 그는 붉은 벽돌로 30평의 선방을 지었는데 '춥고 배고파야 공부
한다' 는 옛말을 따라 일체의 난방을 하지 않았다.

  동지 섣달 추위속 동안거 (冬安居 : 음력10월15일~다음해 정월 15일) 의
 참선수행을 냉방에서 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보살들이 선방에 보일러를 놓고 뜨겁게 불을 지펴주자 납승 (衲僧) 들의
 용맹정진이 해이해져 졸음만 졸고 있단다.

   선은 이같이 '형이상' 의 체 (體 : 본질.정신.이상) 를 내밀면 '형이하
' 의 용 (用 : 현상.육체.현실) 으로 되받아 치는 묘기를 곧 잘 연출한다
.

  이를 선학에서는 체용일여 (體用一如) , 또는 회호 (回互) 의 원리라 한
다.
  교학은 호환 (互換) , 또는 왕환 (往還) 이라고도 하는 회호의 원리를 
이것과 저것이 서로 자기를 버리고 상대방과 하나가 되는 파도이면서 물이
고 물이면서 파도인 관계 (相卽) 를 이루는데 충돌이나 걸림이 없는 융합
 (相入) 으로 설명, '상즉상입' 이라 한다. >

  문 : 들어오다 보니 고목나무에 산새들이 모여 앉아 지저귀는데 "숲속으
로 들어가면 어떻게 할래" 라고 하던데요…
  답 : 나는 잡초더미로 들어가고 너는 숲속으로 들어간다.

  <잡초더미는 현실.번뇌를, 숲속은 이상.보리 (菩提) 를 각각 상징한다.

  지저귀는 고목나무의 산새들은 수행정진하는 학인들이다.
  초발심의 수행자들은 으례히 조용한 곳을 찾는 답시고 깊은 산중의 토굴
로 들어간다.

  그러나 이른바 깨쳤다는 한 소식한 도인이 되면 세속으로 돌아와 세간의
 고통과 아픔을 같이하면서 중생의 삶을 산다.

  이것이 바로 보살행이라는 것이고 '깨달음의 사회 환원' 이다.
  성수노장은 포단 옆에 놓인 주장자 (柱杖子) 를 곧추 세워 선승의 위엄
을 갖추고는 다음과 같은 자신의 체험담을 들려주었다.

  50년대 말 부산 범어사 근처의 한 암자 주지를 하다가 정진을 하겠다고
 깊은 산속 빈 암자를 찾아 들어갔다.

  바랑을 풀고 가부좌 참선을 하고 있는데 하루는 산나물 캐는 아주머니가
 다가와 물었다.

  "왜 이리 깊은 산속에서 혼자 사십니까. " 그는 "내가 살던 곳은 시끄러
워 조용한 산속에 들어와 공부를 좀 해보려고 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아주머니는 성수납자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이 산속의 새 소리, 물 소
리는 시끄럽지 않단 말입니까" 고 반문했다.

  이때 골통을 철퇴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끼면서 온 몸에 기운이 싹
 빠지는 사경 (死境)에 떨어졌다가 깨어나 그 길로 바랑을 지고 하산했단
다.

  그는 해인사 총림 수좌시절 "문수야, 부처를 푹 삶아 대중공양을 하라"
 는 효봉선사 (1888~1966) 의 상당법어를 듣고 "천하만물이 선 아님이 없
고, 세상만사가 도 아님이 없다 (天下萬物無非禪 世上萬事無非道)" 는 깨
침의 노래 (悟道頌) 을 이미 토했건만 그만 실천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는 효봉선사가 법문후 한 마디씩 일러보라고 하자 일주일 동안 조실방
을 열네번이나 가도 문을 열어주지 않기에 하루는 문 앞에서 "도 (道) 를
 가져왔습니다" 라고 고함을 치고는 오도송을 토해냈다.

  성수수좌는 이에 앞서 3일 동안 재래식 뒷간에서 거적을 깔고 단식을 하
면서 '나도 기어코 깨쳐 조실이 되겠노라' 고 이를 악물고 정진했다.

  그러자 몸이 벌겋게 달아 올라 도반들이 와서 떼미고 나왔는데 그 때 몸
의 열이 확 식으면서 날아갈 듯한 쾌감을 느꼈단다. >

  문 : 어떤 것이 자기 존재의 일상 (日常) 을 똑바로 알아 할 일 없는 편
안한 사람 (無事是貴人.了事漢) 입니까.
  답 : 동지 섣달의 부채다.

   < '무사시귀인' 이란 할 일을 다 마쳐 한없이 편안한 가운데 무위자연
 (無爲自然) 을 즐기는 해탈 도인을 말한다.

  이러한 도인을 선지식 (善知識) 이라 한다.
  그런데 성수노장은 선지식을 하찮은 '부채' , 그것도 동지 섣달에는 전
혀 쓸모가 없는 부채에 비유했다.

  언뜻 보기엔 괴팍한 선승들의 억지다.
  그러나 한여름철 요긴하게 쓰이고 겨울이 돼서는 쓸모 없는 물건으로 구
석에 쳐박혀 다음 해 여름을 기다리는 부채의 한가한 겨울철이야 말로 유
한자재 (有閒自在) 한 도인의 모습이 아닌가.

  깊은 산속 대목 (大木) 은 큰 집을 지을때나 쓰인다.
  도인은 아무리 바빠도 자신만의 한가한 여유를 잃지 않는다.

  '삼동선자 (三冬扇子)' 라는 화두는 견성 도인의 본성을 흔한 일상 생활
용품을 통해 아주 멋지게 밝혀 준 비유다. >

  문 : 스님께서는 깨치셨습니까.
  답 : 어제와 오늘이다.

  <선에서는 깨달음을 얻었다느니, 견성을 했다느니 하는 것도 천리만리 
어긋난 외도 (外道) 다.

  왜냐하면 선리 (禪理.도) 는 늘 우주에 가득차 있기 때문에 못쓰고, 못
보는게 바보일 뿐 다른 도리란 없다.

  성수노장의 대답은 장소 따라 똥누고 오줌 누는 것을 가릴줄 아는 일상
생활이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으면 깨달음이고 '정상' 이라는 얘기다.

  '평상 (平常)' 을 관념적으로만 이해하는 것과 체험적으로 납득한다는 
것은 전혀 다르다.

  그는 젊은 시절 한참 깨쳤다는 자만에 들떠 석장 (錫杖) 을 짚고 으시대
며 산골 촌락을 지나다가 마당가에 모여 놀던 꼬마들 중 한녀석이 "애들아
, 저기 중 지나간다" 고 소리치자 모두 일어나 "중봐라, 중봐라" 라고 외
치는 소리를 듣는 순간 앞이 콱 막혔던 일을 회상했다.

  이때 그는 자신이 섬돌 밑의 작은 벌레만도 못하다는 부끄러움을 느껴 
쓰고 있던 방갓과 석장.장삼을 벗어 불지르고 산속으로 도망쳐 잡곡 생식
을 하면서 용맹정진을 했다고 한다. >

  문 : 가건물 불당이지만 불상을 모셔놓고 있는데 저 부처는 얼마나 한 
영험을 가지고 있습니까.  
  답 : 동구 (洞口) 의 고목나무다.

  <이 문답은 한마디로 불법 진리를 자연으로부터 배우라는 일할 (一喝) 
이다.

  실은 그가 작성자였다는 성철전조계종 종정의 유명한 종정 취임 법어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는 현성공안 (現成公案 : 평상심의 눈으로
 보면 자연만물이 모두 진리 당체라는 현실수용의 화두) 도 자연법이 (自
然法爾) 를 일깨우려는 것이었다.

  성수노장은 산골 동네 꼬마들한테 혼이 난 후로 들판을 지나다가 누렇게
 익어서 머리를 숙인 벼나 보리 이삭을 보면 엎드려 3천배 (拜) 를 했단다
.

  선사들은 모든 해답은 자연속에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자연을 최소한 인
간과 동격시했고 나가서는 위대한 가르침을 주는 '스승' 으로 받들었다.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2세도 1997년 7월 이탈리아 돌로미테 산악 휴양지
의 일요 미사 강론에서 "인간은 자연의 경외로움을 통해 신의 위대함을 느
낄수 있도록 명상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고 역설했다.

  마치 옛날 한 선사의 가르침을 오늘에 새삼 듣는 감회를 갖게 하는 교황
의 강론이었다. >

  문 : 부처는 자기 안에 있다는데 스님께서는 왜 그리 숱한 만행을 하고
 아침 저녁 예불을 열심히 하십니까.
  답 : 부처한테 몽땅 속았다.

  <성수노장의 그칠 줄 모르는 만행에는 일화가 많다.
  80년대 후반 통일교 교주 문선명목사의 미국 자택서 한달 동안 침식을 
같이 하며 지냈고, 60년대에는 기독교 박태선장로의 신앙촌서 박장로와 3
일간 함께 생활해 보기도 했다.

  또 가톨릭의 신앙생활을 체험하기 위해 신부.수녀와 함께 한방에 자면서
 살아보기도 했단다.

  그의 젊은 시절 만행중 하일라이트는 삼성그룹 이병철 (李秉喆) 선대회
장을 만났던 일이다.

  가까스로 3분간의 면회를 허락받은 성수수좌는 단도직입적으로 "회장님
의 돈버는 비법을 배운 후 전 국민에게 가르쳐 주어 중생 모두가 잘 살게
 하고자 한다" 고 했다.

  이회장은 그의 갸륵한 자비심에 감동,점심까지 회장실로 시켜다 먹으면
서 3시간동안 이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당시 이회장으로부터 배운 경영철학은 사업보국 (事業報國) 과 '도
둑놈을 사람 만들어 쓰는 재주' 였다.

  지금도 그는 이회장의 간단명료한 용인술이 생동하는 중생제도의 실천이
요 선림이 강조해 오는 활구 (活句) 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성수수좌는 그처럼 사모하던 부처님한테 속은 것만 같은 기분이
었단다.

  시간을 세월속에 묻고 담론 (談論) 을 하다 보니 밖에 어둠이 깔렸다.
  합천 해인사까지 가야 할 여정이 남아있어 서둘러 자리를 일어섰다.  >


  [성수선사는…]
▶1923년 경남 울주 출생.법호는 활산 (活山) , 법명은 성수
▶1944년 : 부산 내원사서 성암 (性庵) 선사를 은사로 득도
▶1948년 : 범어사서 동산스님으로 부터 구족계 수지
▶1967년 : 조계종 총무원 포교부장.조계사 주지
▶1968 - 1972년 : 범어사.해인사 주지
▶1978년 : 세계 불교지도자 대회 한국측 대표
▶1981년 : 조계종 총무원장
▶1994년 :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
▶현재 : 황대선원 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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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6. 제목 : [선문답]부산 해운정사 조실 진제선사   <1998/12/28 20:2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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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해운대 앞 바다는 물이 마른적 없고 해운정사 뒤 장수산 푸른 솔가지 
사이를 오가는 해와 달은 서쪽에서 뜬 일이 없다 이것이 존재 (存在)가 본질에 
앞서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 (山是山 水是水)'인 도리다.

   선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다"다.

   선은 삼라만상이 모두 있어야 할 제자리에 있으면서 조화하고 종국에는 하나로 
일치되는 자연의 섭리를 빌려 불교 진리를 구체화 시킨다.

   그래서 한편에선 영재 (英才)를 대상으로 한 고도의 사변적, 주관적 유심론에 
탐닉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선 선지 (禪旨)를 자연 현상에 비유,가시화시켜 대중의 
이해를 돕는 민중친화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해운대 장수산 끝자락에 자리한 해운정사는 유적 (幽寂)한 선방이 아니라 
1971년 창건된 도시 속 선찰 (禪刹)이다.

   여기서 근세 한국 선불교 중흥조인 경허 (1846~1912)~혜월~운봉~향곡선사로 
이어진 우뚝한 법맥을 이어 영남지역의 선풍 (禪風)을 진작하고 있는 진제 (眞際) 
선사 (64)를 만나봤다.

   문 : 얼굴을 보니 이름을 듣던 것만 못하군요.    답 : 용전이나 좀 내놓게나. 
   문 : 귀만 가졌으니 화상 (和尙)의 높은 뜻이나 들려주시구려.    답 : 
절름발이 자라가 눈섭을 치키고 저녁 바람을 맞는다.

  문 : 얼굴을 대해도 서로 알지 못하나 천리에 부는 바람은 역시 같은 
바람입니다.

  답 : 으 - 악(喝).    <선림 (禪林)에서는 한번 겨뤄보고자 할때 자못 
이죽거리는 투로 상대방을 찔러본다. 자자한 명성을 걸고 들어가자 진제선사는 
질문을 아예 무시해 버리고 엉뚱한(?) 대답을 한다.

   대답은 그 정도 수준이면 이 진제라는 산승 (山僧)의 현존 (現存)과 에너지의 
장 (場)을 볼수 있을테니 진제의 영혼에 대해선 걱정 말고 먹고 살 돈이나 
내놓으라는 반격이다.

    문답의 클라이맥스인 두번째 거량(擧揚 : 禪理에 관한 문답)의 '화상'은 
지혜와 덕을 갖춘 비구를 일컫는 존칭이다. 진제선사의 대답은 비록 산 속에 살고 
있지만 결코 세속을 버리지 않겠다는 다부진 의지를 밝힌 상징적 표현이다.

    '절름발이 자라'는 현실을 망각하려는 백이 숙제 (伯夷叔齊)의 은둔이나 
극락을 앞세운 사후 내세관으로 현실속 고통을 호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선승들을 
일단 '불구자 (不具者)'로 비유한 것이다.

    저녁 바람은 거센 세파의 상징이다. 흔히 비정상의 도피주의적인 삶처럼 
보이는 동아시아 선불교의 낙천성과 안빈낙도는 지극히 내세관에 치우쳐 있는 
인도불교와는 전혀 다른 현실 인식을 가지고 있다.

   선방에서 유거 (幽居)와 무소유의 삶을 즐기는 선승들의 낙도 (樂道)는 언제나 
현실 세계와 연결돼 오늘의 이 현실을 행복하게 살자는 것이다. 진제선사가 
갈파하고자 하는 선법 (禪法)도 바로 이것이다.

    맨 끝의 '할'은 눈과 귀, 높은 뜻과 얕은 뜻으로 구분하고 있는 질문자의 
분별심 (分別心)이 일으키고 있는 번뇌 망상을 단칼에 깨부수는 선가 (禪家) 
전통의 단진법 (斷盡法)이다.>    문 : 화상의 성씨는 무엇입니까.    답 : 이 
때다.

     <물음의 성씨는 통상의 속성 (俗姓)이면서 진제선사의 뿌리, 곧 본래면목 
(本來面目)을 상징한다. 그런데 성씨가 '이 때'라니 참으로 엉뚱하다.

    '이 때'라는 성은 이 세상엔 없을 것만 같은데 말이다. 우선 정답부터 말하면 
'한 (韓.寒)'씨다. 이때 (12월)는 날씨가 몹시 추운 겨울철이다. 겨울철은 추우니 
한 (寒)이고 이런 성은 없지만 성의 한(韓)도 발음은 같다.

   원래 승려들의 성은 모두 석가모니를 따라 석(釋)씨다. 부모 형제도 다 버리고 
출가하는 순간 승려의 속성은 자동적으로 없어진다. 진제선사의 원래 성씨는 
임(林)씨지만 자신의 행장(行狀)을 밝힌 저서에 까지도 일체 속성 (俗姓)을 쓰지 
않는다.

   따라서 한씨라는 성은 그가 성씨를 빗대 이 추운 겨울에도 봄이나 여름과 
똑같이 지금 (Now) , 여기 (Here) , 주체적 자아 (Self)로 실존하고 있다는 
확고한 선의식 (禪意識)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문 : 어떤 것이 세상에서 
가장 고맙고 기쁜 일입니까.    답 : 부산 시내 청소부들과 김해 들판 농부들이다.

     <선사들은 하나같이 대체로 우주가 선물하는 삼라만상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육체적 생명이 지금 여기에 살아있다는 자신의 실존을 가장 고마운 일로 
생각한다.

   그래서 "나 홀로 대웅봉 꼭대기에 앉아 있다" 고도 하고 "내가 여기에 
있노라"고도 한다. 그러나 진제선사는 직접 화법을 피해 청소부와 농부의 실존적 
삶을 제시하는 간접 화법을 택했다.

   모든 사람들이 외면하는 쓰레기를 기꺼이 치우는 일을 하지만 즐겁게 살면서 
소년소녀 가장.불우 노인등을 돌보는 청소부들을 적지 않게 본다. 또 농부와 
청소부들은 그렇게 많은 호화 가구들을 탐하지도 않고 불행한 일을 맞아도 겸손히 
자기 탓이라며 모든 권한과 책임을 자신에게로 귀결시키는 선적인 윤리관을 
가지고 산다.

   조사선 (祖師禪)은 이처럼 도덕적 행위와 종교적 행위를 둘이 아닌 하나로 
통일시킨다.>    문 : 어느 큰 부자집에 쇠솥이 하나 있는데 그 솥의 밥은 
세사람이 먹어도 부족한 반면 천명이 먹고도 남는다는데 어찌된 일입니까.  답 : 
다투면 부족하고 양보하면 남는다(爭則不足 讓則有餘).    <마음을 완전히 비워내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허공과 같은 융통성을 갖는 상태가 역설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심족 (心足)이다. 이러한 심족의 경지에서는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다.

   또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은 욕심을 적게 갖는 것(少慾知足)
이다. 우리는 흔히 선사들의 심지법문 (心地法門)을 패배주의적인 자포자기처럼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진정한 선은 현실을 버리고 이상에 떠도는 은둔이나 도피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래서 번뇌를 보리 (菩提)로 만들어 쓰고자 하는 선의 윤리관은 세속 
사회를 구원하는 하나의 훌륭한 제도 (濟度) 방법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진제선사가 말하는 '소욕지족'의 생활철학도 바로 이러한 선적 윤리관이며 
오랜 선방의 전래 덕목인 음덕 (陰德 : 주어진 자원이나 물품을 낭비하지 않는 
절약정신)과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는 행동 지침이다.>    문 : 유 (有)를 깨달은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답 : 무간지옥에 떨어진다.

     <유를 깨친 사람이란 일체 사물의 본질이 공이라는 사실을 철견 (徹見)하고 
현실로 돌아와 만물의 실상을 진리당체로 보되 현상계에 집착하지 않는 도인을 
말한다.

   그런 사람을 부모와 아라한을 살해하거나, 승단의 화합을 깨거나, 부처의 몸에 
유혈 상처를 입힌 5역죄 (五逆罪)를 범한 자들이 가는 미세한 틈도 없는 영원한 
지옥으로 가라니….    이는 불도 (佛道)와 하나가 된 사람이면 그가 없는 곳이 
없어야 한다는 '도무소부재 (道無所不在)'를 설파한 비유법이다. 무간지옥의 
중생도 원천적으론 부처가 될수 있는 씨앗 (佛性)을 가지고 있다. 진정 도가 
높다면 이들부터 구제해야 한다.

   선은 가장 비천한 것을 빌어 가장 고귀한 것을 드러내는 역설적 상징법을 전매 
특허품처럼 사용한다. 부처가 '마른 똥막대기'라는 화두도 이같은 상징법의 
하나다. >    문 : 스님이 속하신 조계종단의 종권분규와 관련한 승단 폭력사태가 
외국언론에까지 보도돼 세계화 했는데….    답 : 중이 싸우지 스님은 싸우지 
않는다.

     <중 (衆)은 부처님을 따르는 무리를 뜻한다. 구약시대의 기독교에서도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오클로스 (무리)라 했다.

   그러나 이 고상한 의미의 '중' 이 조선시대 승려들을 천시하는 비하어(卑下語)
로 둔갑돼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진제선사의 대답은 참으로 부처님을 
따르는 승려라면 폭력행위는 있을 수 없다는 단호한 부정이다.>    문 : 세상 
모든 소리가 부처님 설법 소리라는데 똥.오줌 누는 소리도 부처님 소립니까.    
답 : 그렇다.

     <돌과 바위 같은 무정물도 설법을 한다는 이른바 '무정설법 (無情說法)
'이라는 화두를 묻자 그는 역시 비천한 것을 빌어 고귀한 것을 나타내는 선의 
상징법을 그대로 긍정했다.>    문 : 해운정사 식사공양에 빠지지 않는 밑 반찬은 
무엇입니까.    답 : 방 (棒)과 할 (喝)이다.

  <질문은 진제선사의 가풍 (家風) 을 물은 것이다. '방할'은 특히 임제선 
(臨濟禪)의 사가 (師家)들이 제자를 교육시키는데 전통적으로 사용해 오고 있는 
제접 (諸接) 방법이다.

   방은 '몽둥이 찜질'인데 지금도 선방서 규칙을 어기면 장군죽비라는 큰 대나무 
판대기로 등짝을 사정 없이 내리친다. 할은 고막이 터질 정도의 고함소리다. 
동아시아 선림은 1천2백년 동안 방할의 고성이 산천을 울려왔다.

    '방'은 덕산선감선사 (782~865)가 "옳게 말해도 30방, 틀리게 말해도 30방을 
때리겠다"고 한데서 부터 유명해 졌고 '할'은 임제의현선사 (?~866)가 제자들의 
물음에 고함을 지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데서 비롯했다.

    '덕산방 임제할 (德山棒 臨濟喝)' 이라는 성구로 선가에 회자돼 오는 이 
교육방법은 제자들의 상대적인 분별심을 일거에 박살내 유와 무라는 이변 (二邊)
을 버리고 일체사물의 본질인 공의 한 가운데 서있도록 하는 효과를 갖는다.

   요사이 학생들을 때리는 스승의 매를 금지시키자 논란을 빚고 있는 세태속에서 
아직도 방할절류 (棒喝截流)를 자랑하는 진제선사로 부터 야릇한 아이러니를 
느꼈다.

   조실방을 나와 상선당 (上禪堂 : 승려들 참선방)과 하선당 (신도들 참선방) 을 
둘러보고 해운정사를 떠나왔다.>  ***진제선사는  ▶1934년 경남 남해 출생  
▶1954년 설석우스님을 은사로 득도  ▶1967년 향곡선사로부터 법을 인가받음  
▶1971년 해운정사 창건.선학원 이사장.선학원 중앙 조실  ▶현재 해운정사.대구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 조실




No. 7. 제목 : [선문답]7.석주선사   <1999/01/14 20:3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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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동서남북으로 돌아가, 깊은 밤 바위 위의 흰 눈이나 함께 보세 
(東西南北歸去來 夜深同看千岩雪)" .설두중현선사 (980 - 1052)가 한국 선방에서 
많이 드는 화두의 하나인 '이뭐꼬 (是什磨)' 를 평석한 말후구다.

   설두는 여기서 인간은 각자의 천품에 따라 할 일도 각기 다르니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자각해 실천하라고 가르친다. 90평생에 처음으로 충남 온양 현충사 입구 
금병산에 복지불사로 양로원과 보문사라는 절을 창건하고 있는 서울 칠보사 조실 
석주 (昔珠) 노장 (90) 을 찾아가는 설중의 여정에서 떠올려 본 선화 (禪話) 다.

   선객입네 하고 공연히 언제까지 운수 (雲水) 의 여로나 헤맬 필요는 없다.

평등과 차별, 생과 사 (死)가 동일하다는 명암일여관 (明暗一如觀) 을 확립, 
분별심을 여의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들을 열심히 하면 '날마다가 좋은 날 
(日日是好日)' 을 살아가는 도인이 아닐까 싶다. 혹한의 북풍을 가르며 흰 눈 
덮인 바위 밑에 살고 있는 노장 (老長) 을 찾은 이유도 바로 이런 삶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문 : 무슨 화두 (話頭) 를 들고 계십니까.   답 :  '삼베 서근 (麻三斤)'   문 
: 화두를 타파하셨습니까.   답 : 대낮에 웬 잠꼬대냐.     <군더더기가 없는 
간결하고 엄정한 관청의 공문에 비유, 공안 (公案) 이라 했던 화두 (話頭) 는 
도를 깨우치려는 지극한 가르침을 말한다. 따라서 화두란 직역하면 '이야기' , 
'담론' 이고 구체적으론 유명한 선문답이나 방장의 상당법어에 붙인 시.소설.
신문기사등의 제목과 같은 것이다.

   선승들은 전 생애가 하나의 공안이며, 공안을 타파함으로써 진정한 삶을 
누리게 된다고 생각한다. 운문종의 동산수초선사 (910 - 990)가 한 중으로부터 
'불법이란 무엇인가' 를 질문 받고 대답한 '삼베 서근' 이라는 화두는 일상생활 
속의 평등 (마) 과 차별 (서근) 을 드러내 평상심의 삶을 설파한 격외 (格外) 의 
화두다.

   옷감으로서의 삼베는 똑같은 평등이지만 각자의 체격에 따라 옷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삼베는 3근.4근.5근으로 차이가 난다. 그러나 한벌의 삼베옷이 됐을 
때는 평등과 차별이 하나가 돼 '삼베옷' 이라는 한 물건일 뿐이다.

    동산은 지금 입고 있는 자신의 삼베옷이 다른 사람들 것과 똑같고 무게도 
3근에 불과하지만 옷안의 사람 인격은 각자가 다르다는 점을 빗대 자신을 부처로 
제시, 질문자가 생각하는 허상의 부처를 단호히 배격한다.

   선은 이처럼 극히 상식적인 일상생활 속에 있으면서 시간과 공간을 기차게 
뛰어넘는다. 석주노장의 말후구 (末后句) 는 한마디로 아직 깨치지 못했다는 
'겸손' 이며 신앙고백이다.>   문 : 삼세제불 (三世諸佛) 이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답 : 어미 돼지 등어리다.

     <자심 (自心) 속에 빛나고 있는 신령한 빛에 의지해 깨달으라는 얘기다. 
외부를 향해 부처를 구하는 것은 마치 낡은 쟁기 보습으로 밭을 가는 꼴이다. 
그래서 선은 종이 조각에 불과한 경전이나 달달 외우는 것을 극구 반대한다.

   새끼들이 즐겁게 타고 노는 어미 돼지 등어리를 평등의 태양빛만이 내려쬐는 
심전 (心田) 으로 비유한 것이다. 달그림자를 붙잡으려다가 물에 빠져 죽은 
원숭이와 같은 꼴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미 돼지 등어리를 잘타고 놀아야 한다.>
   문 : 거울이 빛을 발한 다음은 어떻습니까.   답 : 깜깜하다.

     <거울은 젊은 여자가 나타나면 젊은 여자를, 늙은 할머니가 오면 늙은 
할머니를 비춘다. 대도 (大道)가 펼치는 우주세계의 낮은 태양, 밤은 별을 볼수 
있게 한다. 마치 거울의 광학 (光學) 작용과 똑같이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낮에는 해를 보고, 밤에는 별을 보며 산다. 거울은 피사체를 거짓말 없이 그대로 
드러내는 '순종' 의 전형이다.

   순종할 뿐인 거울의 뒷면은 언제나 깜깜하다. 이러한 거울의 순종은 무명.
아둔함을 상징한다. 그러나 선에서는 깜깜한 암흑은 진리를 상징, 부처의 바탕이 
되는 본연자성 (本然自性) 을 가리킨다.

   선의 불이법 (不二法)에서는 무명은 곧 명 (明) 의 씨앗이고 아둔함이 부처가 
되는 첩경이다. 이것이 바로 선이 강조하는 어리석은 척, 미친 척하는 치둔 (癡鈍)
의 철학이고 풍광 (風狂) 의 철학이다. 그래서 무명과 아둔함처럼 보이는 거울의 
순종 뒤에 있는 암흑은 부처의 씨앗인 자성을 가리킨 역설이 된다.

   문 : 불법은 지극히 오묘하다는데 일상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마음을 쓰고 
익혀야 할까요.   답 : 둘이 아니다.

     <동아시아 선불교의 사실상 창시자인 6조 혜능대사 (638 - 713) 는 "불법은 
원래부터 세간속에 있다 (法元在世間)" 고 설파했다. 일상생활과 불법생활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선의 핵심인 '불이법' 이란 모든 것이 뿌리로 돌아가면 하나라는 만물일체사상 
(萬物一體思想) 이다. 그래서 선은 재가와 출가 (出家) , 세간과 출세간을 나누어 
구분하는 어리석음을 '밥 광주리 속에 앉아 굶어 죽는 사람 많고, 바닷가에 앉아 
목말라 죽는 사람 많다' 고 질타한다.

   부처와 중생의 성품 자체는 전혀 다름이 없고 똑같다.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일심 (一心) 의 입장에서는 똑같은 부처와 중생이지만 다만 자기 성품의 청정성을 
상실했느냐, 아니냐의 차이로 성인과 범인이라는 다른 인격이 되고 만다.

   선은 당일.당시 (當時)가 절대고 이를 소홀히 하면 인생도 불도도 없다는 점을 
거듭 강조, 날마다의 일상생활에 충실할 것을 가르치는 생활철학이기도 하다. 
빈부.귀천으로 구분하는 분별심만 버리면 오묘한 경지가 되고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게 선리의 알파이며 오메가다.>   문 : 뜻밖에 깨달은 사람을 만나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답 : 회대도 (會大道 : 대도를 구현하라).   <설사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는 구극의 본래무일물 (本來無一物) 을 깨친 도인에게도 
아직 보살행을 통한 진리의 실천이 남아 있는 것이다. 자신의 성불 (成佛)에만 
도취돼 열반에 안주하고 있는 깨달음은 사선 (死禪) 이고 총각이나 꾀는 처녀 
귀신이다. '회대도' 는 참으로 깨친 선사들이 누누히 역설해온 불법의 세속적 
실천을 촉구한 일할 (一喝) 이다.>   문 : 세계는 어느 때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까.   답 : 네놈의 마음이 풍족해지기를 기다릴 뿐이다.

     <원래 이 선문답은 운거도응선사와 한 장군이 주고 받은 문답이다. 
장군이라는 무인은 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데 급급하고 무한한 정복의 야망에 
불타는 번뇌의 화염에 휩싸여 있게 마련이다. 인류평화는 그러한 욕심에 불타는 
인간의 공리심이 사라질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얘기다. 언어문자라는 것부터가 
공리적이다.   엄격히 말해 언어나 문자는 이미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순간 
자신을 합리화하고 자신의 욕망을 호도하는 공리적 계산을 깔고 있다는게 선의 
언어문자관이다. 그래서 선은 심오한 불법진리를 말로서는 표현 불가능한 불가해 
(不可解) 의 영역으로 간주, 침묵이나 '모른다 (不識)' 는 말로 대답한다.

   아마도 석주노장은 기자에게 언어문자의 한계성을 똑똑히 인식, 기사를 쓰는데 
최대한의 공정성을 가지라는 충고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말속에는 기자들이 
붓끝을 잘못 놀려 세상이 평화롭지 못하다는 비판적인 원망을 담고 있는 듯도 
했다.>   문 : 공겁 (空劫) 속에서는 누가 주인입니까.   답 : 내가 여기에 있다.

     <질문은 '모든 존재가 괴멸된 세계에서도 부처는 존재하는가' 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아주 철학적인 물음이다. 노장은 어떠한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절대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경지를 '내가 여기에 있다' 는 한마디로 자신있게 
제시한다.

   석가모니의 게송 '천상천하유아독존 (天上天下唯我獨尊)' 도 바로 이런 절대 
자유의 자기 주체성을 밝힌 사자후다. 석주노장은 흰 눈이 흩날리고 있는 온양 
장자못 가의 보문사 양로원 구석방에서 눈 덮인 바위를 바라보며 필례금 (筆禮金) 
을 모아 남은 불사비에 보태고자 선필 (禪筆) 의 붓글씨나 쓰고 있는 자신을 
당당하게 내세웠다.

   이는 성과 속이 둘이 아닌 일상의 본심 자리에서 상.락.아.정 (常樂我淨) 
이라는 열반 구경의 4덕 (四德) 을 닦고 있음을 과시한 것이기도 하다. 선이 
지향하는 종착점은 이처럼 각자가 자기 능력에 맞는 본분사 (本分事) 를 열심히 
행하면서 어떠한 후회도 남기지 않고 살아가는 날마다의 일상생활이다.

   산다는 게 별건가. 석주노장은 젊은 시절 금강산 마하연.해인사.오대산 선방을 
찾아 참선하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회한 없는 조용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문 
: 입적하신 뒤 누가 스님의 종지 (宗旨) 를 물으면 무어라고 할까요.   답 : 
채소밭의 채소가 날이 가물어 시들면 물을 길어다 밭고랑이 축축하도록 뿌려준다.

     <역시 지극한 불법을 평상의 일상생활 안에서 펼치고 있는 노장의 평상자연 
(平常自然) 은 순박하기만 하다. 거창한 관념적인 형이상의 용어를 구사하는 법문 
보다 한참 위다. 가뭄으로 죽어가는 채소에 물을 길어다 주어 살리는 일상적인 
일은 대승불교가 그처럼 중시하는 불살생 (不殺生) 의 계율을 실천하는 '불법의 
육화 (肉化)' 요, '행동하는 말씀' 이라 할수 있다.

   이렇게 평범속에서 비범 (非凡) 을 보이는 것이 선의 진정한 불도 실현이다. 
진리는 바로 발바닥 밑의 흙속에 묻혀 있는 것이다. 노장의 본한자재 (本閑自在) 
한 삶을 엿보고 난 기분이 흐뭇해서 온양 시내에 나와 송이송이마다 다른 곳에 
떨어지지 않고 내려앉는 곳이 제자리가 되는 눈송이들을 벗하며 소주잔을 
기울이다 상경했다.>  *** 석주선사는▶1909년 경북 안동 출생▶1923년 선학원에 
출가▶1928년 부산 범어사서 득도▶1933년 범어사 강원 대교과 졸▶1936 - 39년 
오대산 상원사.금강산 마하연.덕숭산 정혜사.묘향산 보현사 선방서 안거▶1953 - 
84년 은하사.불국사.봉은사.은해사.관음사 주지▶1959년 범어사서 대덕법계 
품수▶1961년 선학원 이사장▶1965년 칠보사 조실▶1971 - 84년 불교 조계종 제7, 
17대 총무원장▶1980년 초대 승가대학장▶1994년 조계종 개혁회의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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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제공시각 : 02/04 20:20                   출처 : 중앙일보
 제목 : [선문답] 8. 팔공산 파계사 조실 고송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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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담자 = 이은윤 종교전문위원
 
  "기러기 푸른 하늘 나니, 그림자 고요한 강물 속에 잠긴다. 그러나 기러
기 자취 남길 뜻 없고, 강물 또한 그림자 받아들일 마음 없네 (雁過長空 
影沈寒水, 雁無遺종意 水無沈影心) ."  대구 팔공산 파계사 조실 고송 (古
松) 선사 (94) 를 만나 보고자 부산행 새마을호를 타고 왜관 철교를 건넜
다.
 
  기러기떼가 철교 저 아래 하늘 높이 낙동강을 가로 질러 나른다. 순간 
강물 속에 잠기는 기러기 그림자. 기러기 그림자 남길 뜻 전혀 없고, 강물
 또한 그림자 받아들이려는 마음 일으킨 바 없건만 기러기와 낙동강 물은
 분명한 겨울 정경을 그려낸다.
 
  기러기와 강물의 무심함, 바로 그것이 선심 (禪心) 이며 부정적 표현의
 불심인 '무심 (無心)' 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처럼 갈망하는 무심의 경계
를 이날 운수좋게도 자신의 행장 (行狀 : 경력)에 조차 일체 무관심한 고
송화상의 살림살이에서 발견, 실컷 만져보았다.

  섹스에 의한 수태 (受胎) 이전의 자성 (自性) 이 모든 존재의 바탕이다
. 우리는 어머니 뱃속에 잉태돼 분별망상 없이 살다가 이 땅위로 나오는 
순간 아버지 성을 따라 김 (金)가, 이 (李)가가 된다.
  
  이때부터는 형제간에도 과자 한개를 놓고 서로 먹으려 다투고 네것, 내
것을 분별하길 좋아한다. 내것과 네것을 구별할 필요가 없던 어머니 뱃속
의 10개월 동안이야말로 더 없는 극락이고 천당이었다.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의 자리는 이 극락이나 천당보다도 훨씬 더 초형이
상학의 안락이며 열반이다. 노송화상의 "나는 더 모른다" 는 대답은 초형
이상학의 불법 진리를 어찌 언어문자로 설명할 수 있겠느냐는 '불가지론 
(不可知論)' 이다.
  
  옛날 중국 선림의 도오원지선사 (769 - 835) 는 자신의 스승인 약산유엄
화상을 알고 있느냐는 한 도반의 물음에 "모른다" 고 대답, 왜 네 스승도
 모르느냐는 추궁을 받자 "몰라, 몰라" 라는 반복 화법으로 불법의 불가해
성 (不可解性) 을 강조한 바 있다. 이는 약산과 도오가 각기 다른 사람이
라는 개체성과 독창성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인식영역 저 너머에 있는 불법
의 숭고함을 드러내 보인 선의 세계다. 고송노장의 대답도 이같은 문법 (
文法) 이다. 선이란 이처럼 아는 데서 모르는 데로 들어가는 역설 (逆說)
 이다.> 

  문 : 도 (道) 라는 게 뭡니까. 
  답 : 눈 앞에 보이는 저 산들이 제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지 않은
가.
 아니 이 사람아,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속에 있네 그려 (雲在天水在
甁)   
  <깨친 사람에게는 눈 앞에 보이는 두두물물 모두가 그대로 불법의 나타
남이고 진여실상 (眞如實相) 이다. 그래서 선사들은 언제나 즉흥적이다. 
지금 눈에 보이는 뜰 앞의 측백나무가 바로 부처고 화단의 작약꽃이 그대
로 법신 (法身) 이라고 말한다. 

  이른바 '현성공안 (現成公案)' 이라는 선의 즉흥성은 재즈라는 즉흥음악
과도 상통한다. 일본의 세계적 재즈 피아니스트 사토 마사히코 (佐藤允彦
.57) 는 재즈만의 특징인 스윙.블루노트같은 음악적 장치들을 팝이나 클래
식까지 구사하는 오늘의 현실에서 "재즈의 진정한 가치는 이제 즉흥뿐" 이
라고 외친다.
  
  정형적인 틀이 없는 재즈의 즉흥성과 현장성은 다른 음악이 복제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몽골 태생의 재즈 보컬리스트 사인호 남치락 (41) 은 재즈
의 가치와 목표가 "쉬고 있는 두뇌에 충격을 주어 직관적 각성에 이르도록
 하는것" 이라고 말한다. 재즈가 지향하는 '직관적 각성' 이 바로 선의 돈
오 (頓悟) 다.
 
  21세기를 우리는 흔히 '정보화 시대' 로 특징 짓는다. 그런데 정보산업
의 세계적 선두주자인 미국의 빌 게이츠와 손정의 일본소프트뱅크 사장은
 수많은 언론 인터뷰와 저명 대학의 초청 강연에서 한결같이 "정보화 시대
의 핵심 요소는 아이디어 (창의력) 와 감수성 (직관력)" 이라고 강조한다
.
  
  선은 1천5백년 동안 수행의 핵심 내용으로 창의력과 직관력을 고양하는
데 주력해 왔다. 정보화시대의 핵심요소와 선수행의 중요 내용이 이처럼 
일치하는게 우연의 일치인지 인류문명이 지향해야 할 본래면목인지는 아직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생명의 본질을 창의력과 절대 자유로 보는 선사상은 이제 새로운
 패러다임의 문명일 수 밖에 없는 앞으로의 천년을 이끌 인류의 보편윤리
로서 손색이 없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 이래서 고송화상의 말후
구 '운재천 수재병' 이 뜻하는 즉흥성과 단순성.직관력은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문 : 보거나 듣거나 배운게 아닌 스님의 말씀 한마디를 일러 주십시요.

  답 : ×같은 놈들아! 

  <×는 개.똥.남녀 성기등 임의대로 갖다 붙이면 된다. 어쨌든 시원한 한
마디 욕이다. 그러나 특정 대상은 없다. 선문답은 이처럼 애매모호하고 임
의적인 게 그 특징이다. 모호하기 때문에 임의대로 생각해 볼수 있는 자유
를 누린다. 모호성과 임의성, 그리고 상식과 논리를 벗어난 격외 (格外) 
의 역설적인 초논리는 질문자를 모순의 아성 속으로 몰아넣기 위한 것이다
.
  
  역설과 모순의 막다른 골목을 뛰쳐나오기 위해 온갖 생각을 다 동원하다
가 어느 마디에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게 깨달음이다. 깨달음
이란 생명의 본질을 분명히 파악해 어떤 윤리규범을 따라 살아야 할것인가
를 아는 것이다.
 
  고송선사의 대답은 부처란 자수성가하는 것이니 부처님을 찾고 조사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도 지옥에 갈 죄업이라는 가르침이다. 선에서는 지독한
 욕일수록 지극한 칭찬이다. 그래서 그의 욕은 모든 중생이 성불하기를 기
원하는 외침이 된다. > 

  문 : 지옥과 극락이라는 게 있습니까. 
  답 : 있다.
  문 : 마음과 부처도 있는 것입니까. 
  답 : 있다.
  문 : 다른 스님들은 하나같이 모두가 무고 공 (空) 이라 하던데요. 
  답 : 선생은 마누라가 있제, 그러니 선생은 유 (有) 고 중들은 마누라가
 없으니 '무 (無)' 라 하는게 맞네 그려.   

  <선에서는 무와 유라는 상대적 구별이 전혀 무의미하다. 유무의 분별을
 초월하고 나면 유라 해도 맞고 무라 해도 맞는다. 신 (神) 이란 것도 믿
는 사람에게는 있고 안믿는 사람에겐 없는 것이다. 경전도 인간이 만든 것
이다. 

  선은 인간 우선의 존재론이다. 그래서 선의 존재론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와 정반대인 '나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다'
 다. 존재가 본질에 앞서는 점에서는 선과 실존주의가 일치한다.> 

  문 : 어찌해야 대통령까지 고민하는 요즈음의 초.중.고교 '왕따'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답 : 우물속 개구리가 달을 삼켜버렸다.(蛤마呑月).  

  <묘한 소식이다. 부처의 본체인 법신 (法身) 으로서의 개구리는 우물 밑
바닥에 엎드려 있으면서도 수면에 비친 달그림자는 물론 저 하늘 높이 떠
있는 본래의 달까지도 꿀꺽 집어삼켜 버린다. 신비주의적인 허풍이나 신통
력이 아니다. 부처도 뛰어넘는 조사선의 대기대용 (大機大用)에서는 개구
리가 스스로 달을 삼켰느니라는 확신만 가지면 한 마음 (一心) 안에 우주
를 감싸 안는다.
 
  수행이란 우주를 자신의 마음 속 안에 돌돌 싸서 말아넣는 우주령 (宇宙
靈.Universal mind) 을 양생하는 훈련이다. 짓궂은 아이들이 개구리를 잡
아놓고 빙둘러 서서 못도망가게 하는 장난이 옛날 시골농촌서 흔히 있었다
.
  
  요사이 왕따라는게 이 아이들 놀이와 같다. 왕따를 당하는 학생은 크게
 원력을 세워 우물속 개구리가 달을 삼켜버리듯 '사즉생 (死卽生)' 으로 
급우들을 제압해 보면 어떨까. 불법에서 보면 개구리가 달을 삼키는 '합마
탄월' 의 기량이면 왕따로부터 능히 해방될수 있다.> 

  문 : 어떤 것이 화상의 신통묘용 (神通妙用) 입니까. 
  답 : 먹을 물을 길어 나르고 땔나무를 져 나른다.
   
  <고송선사는 차림새부터가 50년대 농촌 할아버지를 연상케 한다. 만공선
사 (1871 - 1946)가 금강산 마하연 주지를 할 때 그 밑에서 참선을 했던 
현 한국불교의 최고령 수좌다. 그는 이때까지 주지살이 한 일이 없다.
 
  (파계사 주지를 두번 했지만 이름만 걸고 제자들을 시켰다.) 그는 젊은
 시절 물 긷고 나무하는 일도 많이 했다. 그의 대답은 고된 육체 노동을 
참선과 똑같은 수행으로 승화시켜 자득 (自得) 의 경지에 이르른 한국 선
불교의 적손 (適孫) 임을 자부하는 듯도 했다.
  
  한문 선구 (禪句) 세례를 퍼부어 얼떨떨했다. 그러나 끝말은 불법이란 
아주 간단명료해 자작자득 (自作自得) 하는 것 뿐이니 한마디도 말한게 없
는 줄만 알란다 추사 (秋史) 글씨라는 '일광동조 (日光東照)' 편액이 걸린
 조실방 앞에서 기념 사진 한장을 찍고 서둘러 서울로 돌아왔다.>

  [고송선사는]
  ▶1905년 경북 영천 출생
  ▶1920년 파계사 출가
  ▶1930 - 45년 금강산 마하연.유림사, 묘향산 보현사, 청암사 수도암등
서 정진
  ▶1940년 한암선사 사법 제자
  ▶1954년 - 현재 파계사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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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7. 제목 : [선문답] 9. 태백산 무위정사 조실 서암선사   
              <1999/02/18 20: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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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담 = 이은윤 종교전문위원]  한국 불교는 어느 절을 가보아도 큰 스님만 
있고 '작은 스님' 이 없다. 세속의 상대적 분별심으로는 대 (大)가 있으면 소 (小)
가 있게 마련인데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통상 종단의 감투를 썼거나 쓰고 있는 스님, 나이가 많은 스님, 사암의 간부 
승려등을 큰 스님이라 칭한다. 얼핏 보아도 큰 스님이라는 호칭의 필요 충분 
조건인 법력 (法力).지혜등과 같은 불교 인격은 간과되기 일쑤다.

  불성 (佛性) 절대평등론이나 만물일체사상의 선리 (禪理) 라면 큰 것이 곧 작은 
것이고, 작은 것이 곧 큰 것인지라 큰 스님도, 작은 스님도 없고 그냥 '스님' 만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한국의 대표적 선종 사찰인 경북 문경 봉암사 조실을 
20여년이나 했고 조계종 종정까지 지낸 '작은 스님' 서암 (西庵) 선사를 찾아가 
보았다.

  그는 86세의 노령인데도 제자들을 공부하라고 모두 선방으로 쫓아 보내고 
태백산 끝자락의 무위정사 (無爲精舍) 라는 가건물 토굴에서 시자도 없이 손수 
밥짓고,빨래하고, 변소 치우며 살고 있다.

  문 : 태백산의 미묘한 경계 (境界) 는 어떤 것입니까.    답 : 바람은 물소리를 
베갯가에 실어오고, 달빛은 산 그림자를 잠자리로 옮겨 온다.(風送水聲 來枕畔 
月移山影 到牀邊)     <대관령 보다 훨씬 험한 태백산 죽령 (竹嶺) 을 넘었다. 
입춘 시샘 추위가 매서웠다. 그래도 눈이 쌓이질 않아 경북 봉화군 물아면 오전 
약수터까지 가는 길의 교통은 괜찮았다. 우선 약수터로 가서 뼈속까지 스며드는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약수를 한 바가지 마셨다. 차를 돌려 나와 산 중턱의  
무위정사로 올라갔다.

  일체의 인공 (人工) 을 배제한다는 뜻을 담은 '무위' 라는 토굴 편액부터가 
흔히 유위법 (有爲法)에 대칭시켜 무위법이라 부르는 선리를 잘 드러내고 있다. 
무위정사는 겉으로 봐선 전혀 절 냄새도 나지 않는 공사장 야방막 같다.

  물음의 '태백산 경계' 는 서암선사의 깨친바 경지를 상징한다. 경계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의 고카라 (Gocara).비사야 (Vishaya) 는 어떤 행위가 발생할 수 
있는 영역, 장 (場) 을 뜻한다.

  고카라는 소들이 풀을 뜯어먹기도 하고 노닐기도 하는 목초지다. 소들이 그들의 
삶을 위한 목초지를 갖고 있듯이 인간도 자신의 내적 삶을 영위할 장소를 
나름대로 가지고 있다.

  서암 작은 스님의 대답은 태백산 겨울 솔바람을 한껏 즐기고 있는 한 편의 시다.
10평 남짓한 외딴 철판 가건물의 토굴이지만 밤새 벗이 되어주는 빈 창 (虛窓) 
의 달빛이 정신속까지 스며드는 월야 (月夜) 의 백광 (白光) 을 어루만지며 사는 
삶이다. 기막힌 경계다.

  온갖 인해 (人害) 를 뼈저리게 체험하고 난 노장 (老長) 이 그처럼 작은 스님이 
돼 자연의 순리에 자신을 내맡긴 방임 (Let - go) 속의 무위 (無爲) 를 살고 있는 
경계는 아름답기만 하다.

  세상에서 가장 작다는 겨자씨 안에 우주에서 가장 크다는 수미산을 집어넣는 게 
선의 묘용 (妙用) 이다. 그렇다면 작은 토굴 속에서 저 큰 태백산으로 마음을 꽉 
채워 더 이상 무엇도 들어갈 수 없는 포화 상태가 된 그의 마음 (卽心) 도 한껏 
비워낸 무심 (無心) 이다.>    문 : 법랍 (法臘 : 승려 경력) 이 얼마나 
되셨습니까.    답 : 8×9는 77이다.

     <승려가 된지 얼마나 됐느냐는 물음에 전혀 엉뚱한 곱셈법의 대답을 한다.

세속 곱셈법의 진리는 8×9= 72다. 그렇다면 8×9= 77의 소식은 무엇일까. 서암 
작은 스님의 곱셈법은 내가 수행해 닦은 5년분의 도 (道) 는 너한테 줄테니 어서 
견성개오 (見性開悟) 토록 하라는 독촉이다. 따라서 77에서 5를 빼면 72가 된다.

  그는 원래 승적 (僧籍) 이라는 걸 만들지 않았다. 작은 스님 서암이 승려 
호적을 올린 것은 승려가 된지 50여년이 지난 1979년이었다. 그것도 조계종 
총무원장이라는 감투를 쓰게 돼 부득이 필요하다고 해서 만들었다.

  그러나 현재는 승적이 없다. 94년 조계종단 종권분규 때 종정을 잠시 맡았다가 
봉변을 당하자 종단 탈퇴 성명을 내고 무적 승려가 돼버렸다. 이렇게 그는 원래 
무적승이었던 자신의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깨달음이라는 게 뭔가. 무엇에도 구애 받지 않는 절대 자유를 획득하는 일이다. 
승려 자격증이라는 건 우는 어린 아이를 달래기 위한 가짜 가랑잎 돈 (黃葉錢)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문 : 어떤 것이 계 (戒).정 (定).혜 (慧) 입니까.    답 
: 내 여기에는 그렇게 많은 쓸모없는 가구가 없다.

     <계.정.혜는 불교가 지향하는 3대 수행 목표다. 이른바 3학 (三學) 이라 
한다. 대답 속에는 계.정.혜란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미는 가구같은 장식품이 
아니라는 호된 현실 비판이 담겨 있다. 그는 마치 물건처럼 사고 파는 계첩 (戒牒)
장사나 하는 신앙 풍토를 질타한다.

  "한국에는 이미 불교가 없어진지 오래" 라고 목청을 높였다. 문중이나 따지고 
네 절, 내 절이나 구분하는데 열중하는 불교라면 아무 쓸모 없는 불교란다.

  그는 불법 (佛法) 상의 절은 승려의 절이 아니라 국민의, 국가의, 민족의 
절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그래서 현재 사찰들이 문화재 관리.보수를 내세워 
받고 있는 '사찰입장료' 도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는 절을 가는데 돈을 내야 하는 
불교라면 썩은 불교라고 단언한다.>    문 : 찾아 오는 납자들한테 무엇을 
가르치십니까.    답 : 아침에는 쟁기 끌고 저녁에는 고무래 끈다.

     <옛날 산중 토굴의 수행승들은 대체로 '독 (獨) 살이' 를 하기 때문에 밥 
짓는 일부터 풀 베고, 변소 치우는 일까지 모든 살림살이를 자신이 직접 해내는 
만능이었다. 그러나 시자라는 걸 두어 시봉 (侍奉) 을 하게 하면서 쟁기끌고 
밭갈이 하는 일이나 고래 구멍의 재를 긁어내는 일상사를 나몰라라하기 시작했다.

  초기 선종은 모기와 산짐승들한테 물리면서도 숲속 바위 위나 자연동굴 속에서 
좌선을 계속하는 육체적 고행인 두타행 (頭陀行) 의 수행을 즐겨 했다. 
두타행에서는 일의일발 (一衣一鉢) , 오후 불식 (不食) 의 1일2식으로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면서 법력을 양생하는데 전력했다.

  그후 선승들도 절을 짓고 모여 사는 개산주사 (開山住寺) 의 승단을 형성했다. 
이 때부터는 밥 짓고 농사일 하는  일상생활  속에서 불법 진리를 터득하는 
이른바 농선병행 (農禪倂行) 의 수행 방법을 권장,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암선사의 대답은 만행 (萬行) 입네 하고 차비나 거두는 운수행각을 일삼지 
말고 자신을 아는 것이 곧 만유 (萬有) 를 아는 것이니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자기성찰이나 부지런히 하라는 얘기다.>    문 : 오늘 아침 여기에 오느라 
한강다리를 건너 오는데 다리가 흐르는지 물이 흐르는지 몽롱하던데요. 어떤게 
맞습니까.    답 : 다리가 흐르고 물은 흐르지 않는다.(橋流水不流)     <머리가 
뿅 간 사람들의 이야기 같다. 인류 역사는 5천년동안 물이 흐르고 다리는 가만히 
있다 (水流橋不流) 는 것을 진리요 정상이라 해왔으니 말이다.

  선은 이처럼 기존의 사유체계를 때려 부수려는 혁명적 열정으로 가득차있다. 
과연 그렇다면 선의 논리는 무엇인가. 만약 태양계나 은하계의 수많은 별들 중에 
인간과 같은 동물이 살고 있어 그곳 사람들은 '다리가 흐르고 물은 흐르지 
않는다' 라고 보기로 약속하고 그렇게 고정관념화 했으면 그 곳의 진리는 
'교류수불류' 다.

  따라서 우주 본체에서 보면 '수류교불류' 라는 지구상의 진리관은 아무런 
절대성도 가질 수 없는 인간들끼리의 언어적 표현 약속에 불과할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선이 설파하고 있는 기막힌 '발상의 전환' 과 마주하게 된다. 최근 
냉동실을 맨 위칸에 두는 고정관념을 깨고 거꾸로 냉동실을 맨 아래에 배치한 
냉장고가 히트한 것도 이같은 발상의 전환이다.

  지금 '변화와 개혁' 이 개인.가정.사회.기업.국가.세계의 화두다. 이제 
혁명적인 변화와 개혁을 통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문명을 건설하지 않고는 
환경오염을 야기한 20세기 현대문명 이후의 3천년대 인류는 더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절규가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

  종업원 수를 줄이고 부서를 통폐합 하는 구조조정이나 리엔지니어링.벤치마킹 
등을 통한 외형적 변화와 개혁은 물리적인 사상누각일 뿐이다.

  본질적인 개혁은 발상의 전환에 따른 의식혁명이  수반될  때에만 가능하다. 
선은 이미 1천5백년 전 부대사 (傅大士.497 - 569) 라는 선객이 '교류수불류' 
라는 화두를 내놓았다. 이래서 선은 이 시대가  목말라 하는 발상의 전환을 이끌 
무한한 보고 (寶庫) 인 것이다.>    문 : 요사이 감옥에 사는 80노인이 상도동 
사는 옛 어른께 뭉칫돈을 준 일이 있다 하고 당사자는 받은 일이 없다 해서 
세간의 화제인데 어느것이 맞을까요.    답 : 유치원엘 가보라.     <유치원을 
가면 여.야 정당의 싸움도 대통령 선거자금의 아리송한 수수께끼도 풀린다니 
기상천외다. 작은 스님이라 학교 중에 가장 작고 기초적인 '초보' 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내용인즉 유치원생들의 놀음 같다는 일할 (一喝) 이다.

  유치원 어린이들은 남자 아이가 옆의 여자 친구 치마를 한번 훌떡 걷어 
올리고는 "나 의 뭐 봤다" 고 한다. 이렇게 계속 놀다 보면 여자 친구의 뭐, 남자 
친구의 뭐를 서로 다 보고 만다. 그러나 한 어린이도 친구의 진짜 뭐를 본 일은 
없다. 이렇게 돼 유치원생들의 울고불고 하던 놀이는 '유치' 하게 끝나고 만다.

  심각한 질문이 솜털처럼 태백산 맑은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마침 찾아 온 
대구의 한 처사가 사온 귀한 겨울철 포도 한 송이를 먹고 4시간여의 긴 법담 
(法談) 을 끝낸 후 산중 어둠을 헤치며 서울로 돌아왔다.>  [서암선사는]  
▶1913년  경북 예천 출생▶1927년 출가▶1934년 동경 일본대 종교학과 
입학▶1937년 일본대 중퇴▶1938년 예천 대창중학교 교사▶1965년 희양산 봉암사 
조실▶1979년 조계종 총무원장▶1994년 조계종 종정.종단 탈퇴▶1998년 태백산 
무위정사 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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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6. 제목 : [선문답] 10.끝 삼각산 화계사 조실 숭산선사   
              <1999/02/25 20:2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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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담 = 이은윤 종교 전문위원]  이제 도심속 사찰로 변한 서울 삼각산 
화계사지만 그래도 산새들이 겨울철 나목 (裸木) 사이를 분주히 오간다. 산밑 
조실방은 유거 (幽居) 의 선적 (禪寂) 을 느끼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다.

  숭산 (崇山) 화상 (72) 의 법맥상 증조부 벌인 경허선사 (1846 - 1912) 는 
우연히 읊은 시 (偶吟詩)에서 자신의 '선적' 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 바 있다.

  깊은 산속 새들도 나의 고독을 아는지 (幽禽知我獨) , 지나가며 그림자를 
창가에 남기는구나 (影影過窓前) . 화계사 조실방은 도시생활의 '군중속 고독' 이 
직관적 각성을 일으켜 밝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진아 (Real self) 를 또렷히 
보게하는 선적으로 꽉 차있다. 이래서 경허의 우음시는 오늘의 도회지 사찰에서도 
살아 숨쉬는 가보다.

  한국의 몇 안되는 국제선원이기도 한 화계사 선방에는 이번 동안거 (음력98년 
10월15일 - 99년 1월15일)에 방부 (房付) 한 20여명의 세계 각국 납자 (衲子) 
들이 정진중이었다. 이미 한국 선불교 국제 포교의 제일인자이며 세계적인 선사 
(Master) 로 존경받는 숭산화상의 바쁜 살림살이를 잠시 비집고 들어가 만나 봤다.

   문 : 어떤 사람이 병속에다 거위 새끼를 길렀습니다. 거위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 병속에는 더 이상 있을 수 없게 됐지요. 이 때 병도 깨지 않고 거위도 
다치지 않게 하면서 병속의 거위를 꺼낼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답 : 
(숭산화상이 갑자기 큰 소리로 "이기자" 하고 부르기에 "예" 하고 대답을 하니) 
나오너라!  <질문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같은 난제로 상대방을 옥죄어 보려는 
공격이다. 그러나 숭산선사는 이름을 부르면 대답하는 일상속의 '응답' 을 통해 
마치 요술처럼 금시 난제를 해결했다. 그렇다면 그의 말후구 (末后句) 
"나오너라!" 가 뜻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선학적인 결론부터 우선 말한다면 
부르고 대답하는 응답안에 함축된 자성 (自性) 의 체용일여 (體用一如).
유무초월을 통한 모순의 극복이다.

  다시 말해 기자의 좁은 지견 (知見) 을 상징하는 협소한 병이라는 공간 안에 
갇혀있는 거위 (자성본체) 는 숭산선사가 기자를 불렀을때 "예" 라고 대답한 
자성의 작용을 통해 대답이 입밖으로 튀어나오듯이 넓은 바다 (견성의 세계) 로 
나온 것이다.곡예 치고는 대단한 곡예다.

  "나오너라!" 는 한 마디로 병속의 작은 세계에 갇혀있는 기자의 지견을 
해방시켜 주었다. 병속에 갇혀있는 건 원래 거위가 아니라 기자의 좁디 좁은 
소견이다. 구체적으론 큰 것 (거위) 과 작은 것 (병) 을 구분한 분별심이다.

  크고 작다는 분별의 마음만 내지 않으면 작은 병속의 큰 거위가 병을 깨지도, 
다치지도 않고 나오는 건 문제가 되질 않는다. '병중아 (甁中鵝)' 라는 이 화두는 
남전보원선사 (748 - 834) 와 그의 속가 제자 육긍대부 (陸亘大夫)가 거량했던 
선림의 유명한 공안이다.>    문 : 깨달은 사람도 인과법칙 (因果法則) 의 지배를 
받습니까.    답 : 여우가 죽었다.

  <깨달은 자에게도 인과응보가 따르느냐는데 웬 죽은 여우 이야기일까. 선사들은 
으례 이처럼 전혀 엉뚱하거나 애매모호한 대답으로 질문자가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도록 한다. 이는 질문자의 창의력을 무한히 북돋우어 기존의 도로가 
아닌 다른 길을 통해 서울에 도착케 하려는 것이다.

  늘 다니는 고속도로나 철로보다는 전혀 낯선 길을 통해 서울을 올때 모르던 
것들을 많이 봄으로써 체험의 폭을 넓히는 이른바 체득 (體得) 을 하게 된다.

인생살이에서 체득의 경험만큼 산 지식은 없다. 선수행이란 한마디로 창의력과 
직관력을 고양하는 일이다.

  그래서 선의 화두에는 원래 정답이 없고 각자가 창의적인 자각을 통해 해답을 
창출해내야 한다. 선에서의 창의력은 생명의 본질일뿐만 아니라 내면성찰을 통한 
'자아발견' 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원래 '창조하다' 라는 영어 create의 어원인 라틴어의 creatus도 '발견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른바 '깨침' 이라는 자아 발견은 창조적인 각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게 선의 확고한 경험칙 (經驗則) 이다. 선이 이미 
1천5백년전 이같이 21세기 정보화시대의 핵심요소로 강조되는 창의력을 깨달음의 
중요내용으로 제시했다는 점에 우리는 새삼 놀라지 않을수 없다.

  숭산화상의 "여우가 죽었다" 는 대답은 깨친 자도 인과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이다. 다만 깨친 자는 인과법칙에 우매하지 않고 훤히 꿰뚫어 보는 불매인과 
(不昧因果) 의 심안 (心眼) 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여우의 죽음을 통해 
인과법칙과 깨침의 관계를 설파한 유명 공안으로는 백장회해선사 (749 - 814) 의 
'백장야호 (百丈野狐)' 라는 화두가 있다.>    문 : 부처의 청정법신 (淸淨法身) 
이란 어떤 겁니까.    답 :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

  <부처의 몸은 신앙적으론 법신.보신 (報身).화신 (化身) 이라는 3위일체로 
구성돼 있다. 본체에 해당하는 부분이 청정법신이고 작용 (실천) 을 담당하는 게 
천만억 화신이다.

  '산은 푸르다' 는 것은 범부의 육안이 본 소박한 실재론 (naive realism)에서 
일단 내던지는 부정 후에 다시 거두어들인 선의 변증법적 긍정에서 심안이 본 
부활의 실재론 (revival realism) 이다. 불생불멸의 법신은 그 자체로 만족한채 
머물러 있어선 아무런 쓸모가 없다.

  이러한 깨달음은 선문에서 거듭 경계해 온 낙공 (落空) 의 허무주의고, 사선 
(死禪) 이고, 사구 (死句) 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 인데서 한걸음 나아가 
'물은 흘러가' 는 깨침의 실천이 뒤따를 때 비로소 8만4천 법문은 행동하는 말씀 
(Logos of praxis) 으로서 중생제도라는 구원의 역할을 다하게 된다.

  숭산선사는 선의 이같은 체용일여론 (體用一如論)에서 특히 '용 (실천)' 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법어집 제목도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 라고 
했다. 법신이라는 본체가 깨침을 통해 원만보신이 되고 다시 행동하는 화신이 
되어야 3위일체 부처가 완성된다는 얘기다.

  숭산은 이러한 자신의 가풍을 늘 ' - 할 뿐이다' 는 말로 요약, 배고픈 자를 
만나면 밥을 주고 억눌린 자를 보면 해방시키는 이웃 사랑과 헌신적인 봉사를 
강조한다.>    문 : 부처란 무엇입니까.    답 : 김치다.

  <부처가 김치라니 언뜻 듣기엔 신성 (神聖) 모독 같다. 과연 전혀 무의미한 
동문서답일까. 이러한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는게 바로 선이다. 한마디로 
부처란 자신이 스스로 체득하는 실존적 경험이며 타인.사회.우주와 자기의 관계 
정립이라는 얘기다. 컵속의 물이 찬물인지 더운 물인지는 스스로 마셔 보고 아는 
냉온자지 (冷溫自知) 의 방법이 가장 정확하다.

  김치 맛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김치맛을 '시콤 달콤' 이니, '맵고 짜' 니 하는 
온갖 형용사로 설명을 해도 직접 먹어 보고 맛을 아는 것을 따를 수가 없다. 마치 
결혼 첫날 밤을 아무리 뛰어난 문재 (文才) 로 형용하고 표현해도 그 '맛' 을 
체험한 사람의 실감을 충족시켜줄 수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부처' 는 먹어봐야 진짜 김치 맛을 실감하듯이 직관적 통찰을 통한 
체득이 아닌 언어 문자의 설명으론 그 진실을 드러낼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불립문자 (不立文字) , 언어도단의 불법세계라는 것이다.>    문 : 어떤 것이 
몽상검 (夢想劍) 입니까.    답 : 해골이다.

  <몽상검이란 선에서 흔히 말하는 머리카락이 그 날에 닿기만 해도 잘라지는 
취모검 (吹毛劍) 과 같은 것으로 반야지혜를 상징한다. 이 칼은 꿈 속에서 
휘둘러도 목표물을 적중시킨다. 즉 무의식으로 칼을 휘둘러 쓰러뜨려야 할 상대를 
정확히 베어버리는 달인의 검술 (劍術) 을 뜻한다.

  따라서 몽상검은 어떤 마음을 일으킬 때 무슨 목적이나 의식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무의식 가운데서 생각을 창출해내는 것이 바로 몽상검으로 상징되는 선의 
요체다. 금강경의 핵심인 '응무소주이 생기심 (應無所住而 生其心 :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일으키라)' 도 이같은 뜻이다.

  해골은 상대의 목 (번뇌) 을 베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채 나뒹구는 살활 (殺活) 
자재한 살인검.활인검 (活人劍) 으로서의 몽상검을 실감나게 구체화 시킨 것이다. 
>    문 : (대담을 마치니 정오가 됐다. 숭신스님은 시자에게 점심 공양을 
대접하란다.) 삼세심불가득 (三世心不可得) 이라 했는데 스님께서는 과거.현재.
미래심 가운데 어느 마음으로 점심을 드시려 하십니까.    답 : 배가 고플 뿐이다.

  <점심 (点心) 이란 군자의 정오 끼니는 마음에 점을 하나 찍는 것으로 
대신한다는 유가의 검약정신에서 유래한 말이다. 황벽희운선사 (? - 850) 는 
"과거.현재.미래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은 곧 삼세를 함께 버리는 것" 으로 무사 
(無事) 의 입문이라고 설파한 바 있다. 우리는 배가 고플 때 밥을 먹는다.

  인간의 원초적 생명은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동물적 무의식에 뿌리를 둔 
본능에 의해 지탱된다. 선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는 과학적 설명이 불가능한 
이같은 무의식의 세계를 그 종착점으로 하고있다.

  시간과 공간속의 모든 세상사가 하나도 똑같은게 없지만 배가 고파서 점심을 
먹는 일만은 어제나 오늘이나 다름 없는 평상 (平常) 이다. 배가 고파 점심을 
먹는 일은 그래서 불성 (佛性) 의 본질인 '상주불변' 과 동일한 맥락이며 순리다. 
이쯤이면 배가 고파 밥을 먹는 자연적 섭리야말로 하찮은 다반사 (茶飯事)가 
아님을 알수있다.

  일명 '덕산성오 (德山省悟)' 라고도 하는 화두 '삼세심불가득' 은 제자들을 
몽둥이로 두드려 패는 방 (棒) 으로 유명했던 덕산선감선사의 선적 깨달음을 
인도한 공안이기도 하다.

  교종 승려였던 덕산은 길가의 떡장수 노파한테 점심으로 떡을 사먹으려다 위와 
같은 질문을 받고 말이 막혀 선수행을 시작, 대선장 (大禪匠) 이 됐다. >      
[숭산 선사는]  ▶1927년 평남 순천 출생▶1945~49년 평양 평안공고.동국대 
불교학과 졸업▶1947년 마곡사 출가▶1949년 수덕사서 고봉선사로부터 비구계 
수지▶1958년 화계사 주지▶1962년 조계종비상종회 의장▶1966년 일본 홍법원 
개설이래 현재 32개국 1백30개 선원개설, 서양인 사법제자 5명 인가 20명 초견성 
인가▶1999년 화계사 조실  그동안 애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격려와 질책을 받아 
온 「선문답」시리즈는 이번 회로 끝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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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