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yonho (Song) 날 짜 (Date): 1995년05월13일(토) 07시32분38초 KST 제 목(Title): 야스퍼스와 포괄자 사상 3 신비사상의 의의 만일 우리가 우리의 철학적인 근본작업에 의해 존재자신으로 오인된 어떤 객관에다가 우리를 얽매는 그러한 속박을 풀었다면 우리는 신비사상의 의의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수천년 이래 중국과 인도 및 서양에 있어서 철학자들은 고금동서에 있어서 동일한 그 무엇을 언명해 왔었다. 즉 그 무엇이란 인간은 주관-객관의 분열을 넘어서 주관과 객관이 완전히 하나로 되는 경지, 즉 모든 대상성이 소멸하고 자아가 말소되는 그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경지에 있어선 본래적인 존재가 열리거니와 깨었을 때 그것은 지극히 깊은 무진장한 의의의 의식을 뒤에 남기곤한다. 그러나 이것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저 합일의 경지가 본래의 각성이고 주관-객관의 분열상태에 있는 의식에의 각성은 오히려 수면이다. 이리하여 서양 최대의 신비주의 철학자인 프로티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육체의 잠에서 깨어나 나자신으로 돌아 올 때 왕왕 불가사의한 미를 본다. 그 때 나는 자기가 한결 훌륭하고 한결 높은 세계에 속해 있음을 굳게 믿는다. 그리하여 가장 빛나는 생명이 내속에 강력히 용솟음쳐 나는 신성과 하나로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신비적 경험에 대해선 물론 아무런 의심도 품을 수 없거니와 모든 신비주의자가 언어를 통해 자기를 전달코자 함에도 불구하고 그 언어로써는 그에 있어서의 본질적인 것은 말해질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또한 아무런 의심도 품을 수 없는 것이다. 신비주의자는 포괄자 속에 침잠한다. 말해 질 수 있게 되는 것은 주관-객관의 분열속에 빠지고 만다. 그리하여 의식에 있어서의 명료화를 아무리 무한히 추진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저 근원의 충만에 도달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만 대상적인 형태를 획득 하는 것에 대해서만 말할 수가 있다. 그렇지 않은 것, 즉 포괄자 그것은 전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사변적 사상이라고 일컫는 저 철학적 사상의 배경에 서 있다는 것은 이 사변적 사상의 내실과 의의를 이루는 것이다. 암호문자로서의 형이상학 우리가 시도한 포괄자의 철학적 확증을 기초로 하여 우리는 또한 수천년이래의 저 위대한 존재론과 형이상학(불, 물질, 정신, 세계과정 등등에 관한)의 의미를 한결 잘 이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존재론과 형이상학은 기실은 대상지 에만 그치질 않았고(그것들은 흔히 자기를 대상지로서 이해했으며 대상지로서 형이상학이란 것은 철두철미 오류인 것이다.), 도리어 한갖 존재의 암호문자였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존재의 암호문자란 것은 원래 포괄자의 존재에 입각하여 철학자가 자기개명과 존재개명을 위해 구상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구상되자마자 그릇되게도 본래적 존재로서인 특정한 객관적 존재로 간주되어 버렸던 것이다. 우리가 세계의 현상 속에서 움직일 경우에 우리는 존재 그것을 좁은 대상 가운데 가지는 것도 아니요, 또 현상전체로 서의 항상 국한된 우리의 세계의 지평가운데 가지는 것도 아니고 모든 대상과 지평을 넘어서, 따라서 주관-객관의 분열을 넘어서 있는 포괄자 오직 그 가운데서만 가진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철학적 근본작업을 통해서 포괄자를 깨달아 알았을진댄, 상기한 형이상학이나, 저 모든 이른바 존재인식은 그것들이 세계내에 있는 그 무슨 위대하고도 중요한 존재를 존재 그것으로 간주하려고 하자마자 곧 무가치하게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존재 그것을 보기 위해 대상적 존재자나 사유된 존재자나 세계지평으로서의 존재자를 넘어서 즉 모든 현상을 넘어서 돌진한단면 그것들은 우리에게 가능한 유일한 언어인 것이다. 왜냐하면 교통될 수 없는 그러한 신비사상이라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세계를 버림으로써는 우리는 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명료한 대상지에 있어서만이 우리의 의식은 밝은채로 남아 있을 수 있다. 그것에 있어서만이 우리의 의식은 한계에 임해서 감득될 수 있는 것을 통해 자기의 한계를 경험하는 가운데 자기의 내실을 받아가질 수 있는 것이다. 대상지를 넘어서 사유하는 가운데 우리는 항상 동시에 대상지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이다. 현상이 우리에게 대해 투명하게 되는 동시에 우리는 항상 현상에 주박(呪縛)되어 있는 것이다. 형이상학을 통해 우리는 초월자로서의 포괄자로서 소리를 듣는다. 우리는 이 형이상학을 암호문자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 사유의 무구속적인 미적 향락에 빠진다면, 우리는 이 형이상학의 의미를 놓쳐버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의 내실은 우리가 현실을 암호속에 청취할 경우에만 우리에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실존의 현실에서만 청취하는 것이고, 단순한 오성에서 청취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한 오성은 오히려 이 경우에 전연 아무런 의미도 보려고 들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만큼 현실의 암호(상징)를 우리가 붙잡기도 하고 처리하기도 하고 소비하기도 하곤 하는 물건과 같은 유형적인 실재물로 간주해서는 더욱 안 된다. 객관 그것을 본래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것은 모든 독단론의 본질이며, 또 물질적인 형채를 가진 상징을 실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특히 미신의 본질이다. 왜냐하면 미신은 객관에만 얽매여 있음이오, 신앙은 포괄자 속에 기초함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