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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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sjyoun (예리큰아빠)
날 짜 (Date): 1998년 11월  3일 화요일 오후 02시 24분 32초
제 목(Title): 위대한 전법자들-균여


번호 : 15/3496                 입력일 : 98/11/03 10:27:11      자료량 :106줄

  제목 : 위대한 전법자들-균여

 고려개국의 일등공신은 지방호족들과 이들의 이념적 귀의처였던 신라말 선
종이었다. 그러나 건국의  두 기둥은 개국 직후 왕권의 철저한  견제 대상으
로 전락했다. 건국 이후에도  막강한 물리력을 보유하고 있는 호족세력이나,
자칫 절대왕권에 대한  부정으로 흐르기 쉬운 선종은  이미 정권을 잡고 난
후엔 부담스러운 존재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 처절한 혁명과  모반의 시기에 때로는 왕권과, 때로는  호족과 결합하는
정치력을 발휘해 화엄종을 통합하고, 사회복지로  불교대중화 운동을 펼쳤던
불교지도자가 균여스님(923-973)이다. 스님의 속성은 변(邊), 황해도 황주 둔
대 엽촌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11세기 초 혁련정이  쓴 〈균여전〉에는
“스님의 어머니가 예순살 때  낳았는데 용모가 너무 추악해 길거리에 내다
버렸다”는 기사가 있어 어린 시절을 불행하게 보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포대기에 업혀 있을때부터  아버지가 들려주는 화엄경 게송을 듣고
하나도 잊지 않을  정도로 총명했다. 스님은 15세 되던 해  사촌형인 선균스
님을 따라 부흥사(復興寺)로 출가했다. 학구열이 얼마나 높았던지 밤중에 몰
래 개성 영통사를  찾아가 의순스님(화엄종의 대가)을 찾아 배우고 올  정도
였다고 한다. 당시 시대상황은 혼란스럽기 그지 없었다.

 고려초기 왕들은 끊임없는  쿠데타의 위협에 시달렸다. 호족들은  그들대로
왕실이 언제 자신을 배반할줄 모른다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태조는 물론
그의 25남9녀 가운데 장남인 2조 혜종 3대 정종(3남)등  단명한 왕들은 호족
들의 눈치를 살펴야했다. 그러다 왕건의 4남인 4대  광종대에 이르러 상황이
달라졌다.

 광종은 956년 노비안검법을  실시, 호족의 세력을 삭감시킨데  이어 과거제
(958년) 관복제(960년)등 잇달은  정치개혁을 펼치며 숙청작업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균여스님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균여전〉에 따르면  광종과
균여스님의 본격적인 인연은 953년에 시작된다. 광종은 즉위  4년만인 이 해
에 비로소 왕위 책봉식을  거행할수 있었는데 마침 오랜 시간동안 장대비가
쏟아져 식을 거행할수 없었다.

 이때 송나라 사신이 “동국에 성인이  있는데 왜 그로 하여금 날이 개도록
기도하게 하지 않느냐”고  묻자 왕은 전전긍긍했다. 내로라  하는 고승들이
모두 피했기 때문이다. 그때 국사 겸신(謙信)이 균여스님을  천거, 스님의 한
바탕 법문으로 날씨가  개었다. 광종은 균여스님에게 9배를 하며  최대의 예
를 갖추고 스님을 중용했다.

 광종에게는 특히 지방호족과  연결된 선종 보단 화엄종이, 또  하나속에 전
체를 통합하는 원융사상 즉 성상융회사상(性相融會思想)을  설파했던 신이승
(神異僧) 균여가 더없이  매력적인 제휴대상이었다. 균여스님 역시 광종과의
인연을 계기로 자신의 이상을 펼쳐보고자 적극 나섰다.

 본래 북악 화엄종의 법통을  이은 균여스님은 신라말 희랑스님의 북악파와
관혜스님의 남악파로 분열되어 있던 화엄종의  통합에 착수했다. 희랑스님은
고려 왕건을 지지했고,  관혜스님은 후백제 견훤을 지지했는데  이로인해 갈
린 화엄종은 이미 불신의 벽이 깊어 교리적 차이로까지 벌어지던 때이다.

 균여는 대립의 극복을  신라 화엄종 초조인 의상스님에게 찾고자  했다. 그
래서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를 알기쉽게  풀이하여 대중에 전파하면서
법맥의 통일을 기했다. 광종은  균여스님의 입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했고, 스
님은 왕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담당해 줬던 것이다.

 균여스님의 저술은  광종 9년에서 13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설해져 기록됐
다. 30대 중반인  스님의 저술은 현전하고 있는  〈일승법계도원통기〉 〈십
구장원통기〉등 5종외에 총 10여종 50여권에 달한다.  스님의 저술은 스님의
법호인 원통(圓通)이  시사하듯 화엄의 제반  논쟁들을 하나로 회통하려  한
것이다. 화엄학의 논저들에 대한 깊은 이해로 논파와  회통에 저어함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교단통합이 어느정도 이뤄지자  스님은 불법을 세상에 펼치는데  진력했다.
〈균여전〉은 “사람들을 이롭고 이익되게 하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알았다
”고 적고있다. 경전이나 논소 가운데 자세하게 풀이되지  않은 것에는 반드
시 자세하게 풀이를 달아 대중들이 쉽게 이해할수 있도록 했다.

 스님의 불교사상을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은 보현보살의 10종대원을 향
가로 옮긴 ‘보현십종원왕가’  이다. 보현십원가로 불리는 11수의  이 향가
는 대중들이 누구나 알기쉬운 노래를 통해 불법을 깨닫게 하기 위한 배려이
자 사회적 혼란기 가장 어울리는 포교방법이기도 했다.  입에서 입으로 전파
된 이 감동적인 노래의 가락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아 그 참맛을 온전히 느
낄수는 없지만 스님의 사상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균여스님이 사회복지사업을 활발히 펼쳤다는 사실도  특기할만 하다. 963년
광종은 개성 송악산에 왕실원찰  귀법사를 창건하며 스님을 초대 주지로 주
석케 했다. 스님은 이곳  귀법사에서 입적때까지 중생구제사업을 펼쳤다. 대
표적인 사업이 무차대회와  제위보 설치다. 10년동안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
을 위해 연 무차대회는  중생과 부처가 하나라는 보현십원의 사상을 유감없
이 발휘한 장이었다.

 가난한 이를  무료로 치료해주던  제위보(濟危寶)는 스님이 광종에  간곡히
청해 설치된 우리 역사상 최초의 불교사회복지 기관이다.  후일 광종과의 관
계는 악화된다. 광종은  집권 초반 호족배척의 정치개혁에도  불구하고 중반
이후 다시 호족세력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광종  19년이후에는 호족들이 노
골적으로 왕권을 위협했다.  이같은 대립상황 하에서 스님이  광종의 편만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광종은 자신과 밀착해있던  귀법사 승려 정수(正秀)의 간언을 들어  균여스
님을 제거하려 한다. 그러나 당시 황주지역의 강성  호족인 황보씨등 호족의
도움으로 오히려 정수가  처형된다. 스님이 정치적 상황을  절묘히 활용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호족들조차 균여스님을 왕권과  야합한 권승
으로 여기지는 않은것 같다.

 스님을 회유키 위한 호족들의 권유에도 스님이 동요치 않고 거리를 두었다
는 〈균여전〉의 기사는 이를 입증한다. 그러나 스님의  일생은 상당히 폄하
됐다. 상당수 기득권층은 “젊은 승려가 왕을 믿고  너무 설친다”며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또한 대각국사 의천은 후일 균여스님의  일생과 사상을 폄하
해 〈신편제종교장총록〉에 스님의 저서를 한권도 싣지 않았다.
 정치적 격변 상황을 적절히 활용해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한 균여스님. 그
러나 스님의 원력은  1천년이 지난 오늘 찾을길 없고,  정치승이라는 역사의
비아냥만 남아있다.                                     〈鄭雄基 기자〉
 *발행일(1695호):1998년 11월 3일 , 구독문의 (02)730-4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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