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sjyoun (예리큰아빠) 날 짜 (Date): 1998년 8월 25일 화요일 오전 10시 23분 31초 제 목(Title): 지명스님의 교리산책-사물사이의 무애 번호 : 19/3314 입력일 : 98/08/24 17:38:16 자료량 :64줄 제목 : 지명스님의 교리산책-사물사이의 무애 화엄사상의 사법계(四法界) 즉 네 가지 법계 가운데서 우리는 지난 호까지 사(事)법계 이(理)법계, 이사무애(理事無碍)법계의 대강을 추려 보았다. 이번 호는 그 마지막으로 사사무애(事事無碍)법계를 살필 순서이다. 사람은 누구나 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긴 시간과 넓은 공간을 원한다. 마음 내키는 대로 가고 오고 앉고 눕고 싶어한다. 육체적인 자유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원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사회의 관습, 도덕, 법, 직장, 재물, 권력, 명예, 색심 등이 있다. 무엇보다도 나와 똑같이 자유를 구하는 무수한 타인들이 있다. 내가 그들을 경쟁 상대나 출세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상대도 나를 그리 생각할 것이다. 여기서 내가 무애의 자유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세상의 모든 것들이 상호간에 걸림이 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기 위해 있다는 것을 터득해야 한다. 사사무애는 사물간의 보완, 내통, 무애 관계를 밝히려고 한다. 이사무애와 사사무애의 차이를 전쟁 중에 아군을 확인하는 예로 구분해 보자. 내가 한 무리의 군인들을 발견하고, 본부에 무선을 쳐서 그들이 아군임을 확인했다면 그것은 이사무애에 속한다. 현실의 사물에서 본부라는 마음 자리로 올라가 세상사가 마음의 무한연기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상대를 내 편으로 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본부와의 연락이 없이 상대를 아군으로 알아보게 되었다면 이는 사사무애에 속한다. 본부라는 원리를 들추지 않고 사물의 현장에서 바로 상대가 내 편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화엄종의 십현문(十玄門)은 이 사사무애를 설명하려고 한다. 넓음과 좁음, 하나와 여럿, 숨음과 나타남, 작음과 큼, 짧은 시간과 긴 시간, 주인과 종 등의 관계에 아무런 걸림이 없다는 것이다. 먼저 주인과 종 사이의 무애 관계를 생각해 보자. 내가 만두 가게를 열었는데 최고의 만두 기술자 주방장을 채용했다 치자. 만두 맛이 좋아서 고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이 경우 나는 사장이고 주방장은 나의 직원이다. 적어도 명의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안을 자세히 보면 다르다. 사장인 나는 항상 주방장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주방장이 만두를 무성의하게 만든다거나 일을 그만 두게 되면 나의 만두 가게는 바로 문을 닫아야 한다. 내용적으로는 주방장이 주인이고 나는 그의 종인 것이다. 통일교의 박보희씨가 리틀엔젤스 무용단을 이끌고 북한에 가서 공연을 하고 돌아왔다. 이번에는 쾌속정을 타고 금강산을 하루만에 관광하고 돌아올 수 있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한다. 겉으로 보기에 문선명씨는 통일교의 교주이니 주인이고 박보희씨는 그의 교도이고 직원이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어느 한 쪽을 주나 종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이 주종관계는 모든 사람을 괴롭힌다. 드라마에서는 종종 “때려 치워야지 더러워서 못해 먹겠다”는 표현이 나온다. 누구나 한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 본적이 있을 것이다. 왜 그런가. 주된 이유는 주종관계를 잘못 보는데 있다. 주종관계가 고정적인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은 세상사 어느 곳에든 고정적인 주나 종은 없다. 어느 면에서는 상대가 주인이고 다른 면에서는 내가 주인이다. 이 “어느 면”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법계(法界)가 아닌가. 세상에는 남의 것과 비교될 수 없는 무수한 법계가 있다. 모든 사람은 각기 자기의 법계를 가지고 있다. 자기 법계에서는 자기가 주이고 남의 법계에서는 그가 주이다. 모든 면에서 주인 행세를 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누군가에 의해서 무너지고 만다. 그렇지 않으면 소수의 윗사람에게는 혀로 땅을 핥을 듯이 아첨하고, 다수의 아랫사람에게는 독재자로 군림하는 비겁자가 될 것이다. 그렇게 하더라도 그는 어차피 한 면에서는 종이고 다른 면에서 주이다. 넓은 것과 좁은 것, 작은 것과 큰 것, 짧은 시간과 긴 시간의 관계는 앞에서 살펴 본 바 있는 상즉(相卽)과 상입(相入)으로 풀어야 한다. 좁고 작고 짧은 것 속에 한없이 넓고 크고 긴것의 견본이 들어 있다. 지구를 알기 위해서 세계의 도시를 다 방문해야 할 필요가 없듯이, 영원을 살기 위해서 시간의 끝까지 걸어가야 할 필요는 없다. 지금 여기에 시간끝의 견본이 있으니까 말이다. *발행일(1686호):1998년 8월 25일 , 구독문의 (02)730-4488 < 한장의 불교신문 한사람의 포교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