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sjyoun (예리큰아빠) 날 짜 (Date): 1998년 8월 21일 금요일 오후 06시 00분 23초 제 목(Title): 위대한 전법자들-원효 번호 : 12/3290 입력일 : 98/08/21 10:43:23 자료량 :123줄 제목 : 위대한 전법자들-원효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말엽 동아시아는 영웅들의 각축장이다. 고구려 신라 백제 중국 일본등 동아시아에서는 시대를 달리했더라면 일세를 풍미했을 정치가와 군주 장군이 한꺼번에 배출돼 천하를 놓고 다퉜다. 이 시기 불교계, 특히 신라불교계도 그랬다. 원효 의상 자장 문아 혜숙 혜공 대안 안함등 희대의 고승들이 한꺼번에 배출돼 신라불교는 르네상스를 구가했다. 전란의 상처를 불교사상으로 치유하고 3국의 통일을 사상· 문화적으로 완성한 고승들. 이들 가운데서도 원효는 독보적인 존재다. 원효의 속성은 설(薛)씨로 617년(진평왕 39년)에 압량군(지금의 경북 경산) 불지촌(佛地村)서 태어났다. 육두품 귀족으로 중급관리였던 아버지 담날내말은 밤나무 밑에서 태어난 그를 서당(誓幢, 새털)이라고 이름 지었다. 원효의 소년기는 〈삼국유사〉에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남보다 뛰어나 스승을 따라 배울것이 없었다”는 기사가 남아 특별한 스승없이 독학으로 학문했음을 보여준다. 원효의 출가 시기와 장소에 대한 의견은 엇갈리지만 8~9세 정도에 동진출가(또는 유년시절에 출가)했고, 출가지는 황룡사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여기서 당시 불교계의 상황을 짚어보자. 화랑의 세속오계가 입증하듯 이미 사회의 지도이념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신라불교계는 크게 두 흐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원광 안함 자장 명랑등은 이른바 해외유학승 출신으로 귀족·왕의 지원아래 국가불교의 기틀을 다진 인물들이다. 반면 서민속에서 활발한 교화활동을 펼쳤던 국내파도 많았다. 혜숙 혜공 낭지 대안등이 그들이다. 특별한 스승을 두지 않아 종파에 얽매임이 없었던 원효는 시간이 갈수록 이들 두 부류 가운데서도 후자에 더 친밀감을 갖게 됐다. 원효의 청년기 이후를 기록한 〈삼국유사〉 「낭지승운」조에는 그가 낭지화상에게 경론을 배웠다는 기록이 전한다. 울주 영축산 반고사에 머물던 낭지(朗智)는 법화 화엄 삼론등 교학에 밝아 원효를 지도했다. 또 시골에서 저자거리에서 골목에서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불법을 홍포하던 혜숙 혜공 대안 스님들로부터 원효는 경론을 배우고 영향을 주고 받았다. 낭지화상에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원효가 31세때 지은 〈초장관문〉과 〈안심사심론〉은 원효의 최초 저술로 알려져 있다. 이 저술들은 이미 독창적인 선적(禪的) 세계관을 물씬 풍기고 있을뿐 아니라 자신의 문중인 황룡사 귀족불교와의 선을 분명히 긋고 있다. 아마 이즈음에 청년기 원효의 삶은 큰 궤적을 그리고 전환했을 것이다. 특이하게 〈송고승전〉이 이를 기록하고 있다. 고승전은 원효의 당시 학업을 극찬하며 “의학(義學, 사변적인 학문)의 무리들을 치고 문호(文豪)의 진에 종횡하여 그 기개는 의연하고 그 앞에 맞설사람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그 나라(신라) 사람들이 그를 만인의 적이라고 일컬었다” 최고의 귀족출신이자 내로라하는 학승들이 운집해 있던 황룡사가 그를 반겼을 리 없다. 오히려 얼마나 배척했으면 ‘만인의 적’이라고 기록해 놓았겠는가. 그렇다고해서 당대 고승들과 교류에 편협하지는 않았다. 의상(義湘)과의 두차례 당(唐) 유학시도는 이의 반증이다. 34세때 첫 유학을 시도했지만 고구려에 억류되어 실패한 원효는 45세때 37세인 의상과 두 번째 유학을 시도했다. 〈송고승전〉 「의상전」 에는 저 유명한 ‘무덤속에서 홀연 얻은 깨달음’이 그려져 있다. “어젯밤 잠자리는 땅막(土龕)이라 편안했는데, 오늘밤 잠자리는 귀신의 집(古塚)이라 생각하니 뒤숭숭 하구나. 알겠도다.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삼계는 오직 마음이요. 만법은 오직 인식일뿐이다. 마음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하겠는가.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 불법을 어떻게 백성들에게 알기 쉽게 전할것인가. 깨달음은 어떻게 구할 것이고 대중은 어떻게 교화할 것인가. 고향에 돌아온 원효는 분황사에서 집필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중단했다. 〈삼국유사〉에는 “원효가 일찍이 분황사에 머물면서 〈화엄경소〉를 찬술하였는데 제4 십회향품(十廻向品)에 이르러 끝내 붓을 꺽고 말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보살이 취해야 할 열가지 회향의 내용을 설명하다가 보살의 삶은 절안 골방에서 이뤄질 수 없다는 통찰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그의 파격적인 무애행이 시작됐다. 백성들의 삶의 현장에서 희노애락을 같이했고, 사변을 일삼는 승려들은 준엄히 꾸짖었다. 자신의 고향집은 절로 만들어 초개사(初開寺)라 불렀다. 이를 시작으로 가는곳마다 절을 만들고는 자신은 또 다른곳으로 옮겨갔다.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사찰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송고승전〉에는 원효의 기행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발언은 미친 듯 사나웠고, 예의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보여주는 모습은 광망했다. 그는 거사와 함께 주막집이나 기생집에 들어가고 금빛 칼과 쇠지팡이를 지니기도 했으며, 혹은 주석서를 써서 〈화엄경〉을 강의하고, 혹은 사당에서 거문고를 타고, 혹은 여염집에서 유숙하고 산수에서 좌선하는등 일정한 규범 이 없었다” 광대나 백정 기생들과 어울린 것은 기행으로 치부해 버릴 일이 아니다. 더할수 없는 인간애가 담긴 보살심의 발로였다. 어려운 교리를 설하기 보다 백성들과 더불어 할 수 있는 몸짓으로 불교를 민중의 품으로 내려놓은 것이다. 호리병을 든 원효가 부르며 추었다는 무애무(無碍舞)와 무애가(無碍歌)는 백성들에게 큰 인기를 끌며 모두가 따라 배웠다. 특히 그가 즐겨춘 무애무는 강렬한 상징이 내포된 춤이었다. 자라처럼 몸을 움츠려 뭇 삶들을 따르고, 두소매를 흔들어 번뇌를 털고, 다리를 세 번 들었다 놓아 삼계(三界)를 벗어나고, 곱사처럼 등을 구부려 모든 것을 다 거둬 들인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원효의 명성은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고 그를 모르는 이는 이제 신라에 없었다. 요석공주와 일화는 이때 생겼다. 원효가 51세 되던해다. 요석은 김춘추의 딸로 황산벌 전투에서 18세의 나이로 목숨을 던져 계백장군을 패퇴시킨 화랑 거진랑의 부인. 혼인 3일만에 과부가 된 공주는 원효 대사와 3일을 같이 보낸다. 둘 사이의 아들이 대유학자 설총이다. 이 또한 굴레를 깨기 위한 대자유인의 행위였다. 스스로 파계라고 생각했으면 사흘만에 부귀영화를 박차고 나왔겠는가. 요석궁을 나온 원효는 그때부터 머리를 기르고 속복을 입었다. 스스로를 근기가 낮다해서 소성(小性)거사 또는 하(下)보다 더낮은 복(卜)자를 붙여 복성거사라 낮춰 불렀다. 대중교화를 위해 더 자유롭게 만행할수 있었다. 70세로 혈사(穴寺)에서 입적하기까지 원효는 무애행을 펼치며 한편으로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쳤다. 87부 180여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는 언급하기 벅찰 정도로 독창적 사상을 유감없이 담고 있다. 그중에서 〈금강삼매경론〉을 저술한 일화는 유명하다. 원효의 기행은 당시 교단주류로부터 심하게 배척을 받아 그 시대 국가적 행사인 백고좌법회에 1백인 법사에 들지 못했다. 그러다 왕이 〈금강삼매경론〉을 중국서 구해 해석을 맡겼지만 원효외에 누구도 할 사람이 없었다. 원효는 고향에서 소를 타고 두뿔 사이에 경전을 놓은채 3일만에 5권의 소를 지었다. 이를 도둑맞아 원효가 연기를 요청, 3일만에 다시 3권의 소를 지었다. 이것이 〈금강삼매경론〉이다. 그때 원효는 이렇게 말했다. “어젯밤 백개의 서까래를 구할때는 비록 들지 못했지만 오늘 아침 하나의 대들보를 가로 지를때는 오직 나홀로 할수 있구나” 이 경전의 주석서는 당시 중국에도 없었다. 중국인들은 원효의 소를 극찬하며 보살의 주석서에만 붙이는 ‘논’이라 이름 붙이고 받들었다. 후일 인도 티벳등지까지 전해져 유통됐다. 해동성자 원효. 그는 민중속에서 그들의 삶을 아파하고 함께 했던 보살이자 동족간의 전쟁을 아파하고 사상적 통합에 앞장서 화쟁론을 피력했던 위대한 사상가였다. 이 위대한 전법자로 인해 한국사상사의 새벽이 열렸다. 더러움과 깨끗함의 모든 법은 이미 일심(一心)으로 회통해 서방정토에 도착한 뒤였다. 〈鄭雄基 기자〉 *발행일(1685호):1998년 8월 18일 , 구독문의 (02)730-4488 < 한장의 불교신문 한사람의 포교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