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sjyoun (예리큰아빠) 날 짜 (Date): 1998년 7월 8일 수요일 오후 01시 38분 23초 제 목(Title): 퍼]충담스님 소신공양 원력부터 결행까지 번호 : 18/13383 입력일 : 98/07/04 11:56:20 자료량 :68줄 제목 : [474호]충담스님 소신공양 원력부터 결행까지 충담스님은 입적하기 10년 전부터 소신공양 원력을 세웠다. 스님은 자신이 세운 원력을 저서《염불》(한국불교출판부)을 통해 확연히 드 러냈다. 스님은 《법화경》약왕보살본사품에 희견보살이 부처님 회상에서 수 행정진할 때 육신으로 공양함을 서원하고, 부처님 앞에서 소신공양을 올려 불은에 보답하는 대목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모든 중생으 로 하여금 온갖 괴로움과 병환을 여의게 하고 나고 죽는 일과 얽힘으 로부터 벗어나 무생법인(無生法忍 불생불멸의 진여를 깨달아 알고, 거 기에 안주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 진실의 이치를 깨달은 마음의 평온.) 을 증득하게 하는 것에 감명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스님의 속가 아들 지성 스님(태고종 총무원 총무부장)은 “노 스님 이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을 찾아달라고 한 것이 10년 전이었다”며 “이후 소신공양할 수 있는 다각적인 방법을 스스로 연구해 오셨다” 고 말했다. 70대 때 세운 원력은 팔순이 지난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스님은 92 년께 청평 감로사 미륵불 앞에 소신공양할 수 있는 통나무와 널판지를 사용해 만든 원형 건물 한 채를 마련했다. 스님은 이 건물을 선방으로 사용, 입적하기 전까지 수도정진했다. 스님은 평소 자신의 권속들과 신도들에게 소신공양은 공개적으로 할 것임을 누차 강조하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첫째, 아무도 모르게 혼자 할 수도 있으나 산불이 날 염려가 있기 때문이며 둘째, 50여년전 영도사(지금의 개운사) 노사께서 칠성각 앞에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놓았으나 그 손상좌가 끌어내려 깊은 화상을 입 고 뜻을 펴시지 못한 채 열반한 일이 있으니 그것이 걱정이요, 셋째 만일 다비까지 깨끗이 안되면 두번 장사지내야 할 것이니 그것이 우려 되노라.” 스님은 소신공양하는 이유도 명백히 밝혔다. “이 나라 분단된 국토가 하나로 통일되고, 사회가 안녕하며, 헐벗고 괴로운 이 없어지며, 종단이 화합해 불국정토가 앞당겨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스님의 소신공양을 찬성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성 스님도 “노 스님이 소신공양하면 자신도 `중 노릇'을 그만 두겠다”며 강하 게 반대해 왔다고 한다. 스님은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 아랑곳 없이 선방 주변에 나뭇더미를 쌓아 두었다. 언제라도 선방에 들어가 화현할 태세였다. 스님이 장작과 나뭇 더미를 갖다 놓으면 감로사 스님들과 신도들은 다시 치우는 것이 일이었다고 한다. 스님은 6월27일 입적 하기 전 단오날인 5월30일 소신공양을 시도한 바 있으나 주위 사람들의 만류로 실패했다. 단오날 결행하려는 의지는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스님은 열반송을 써 놓았기 때문이다. 감 로사 스님과 신도들은 선방 주변에 있던 장자과 나뭇더미를 감로사 앞 주차장으로 옮겨 놓았다. 스님은 자신의 소신공양을 끝까지 만류할 것 까지도 이미 예견한 듯 하다. 스님은 이 때를 대비, 《염불》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의 행동이 가당치 않은 줄 잘 안다. 그러나 여래, 부처님을 향한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저희들이 훼방한다면 나는 내가 말한 염려를 다 버릴 것이다” 공개적으로 소신공양하는 것을 막는다면 혼자 단행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다. 스님은 입적하기 전에 실직자와 굶주리고 있는 북한 동포들에 대해 자주 언급한 것으로 전해진다. 감로사 신도 이 선자씨는 “실직자들을 어이해야 하냐 그 가족들은 또 어떻고 북한 어린이들이 너무 가엾다 이게 다 우리가 못나서다”라며 자주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 결국 스님은 단오날 실패하자 6월 27일 실행할 것을 다짐했다. 서울 승가사 에 머물던 스님은 새벽 2시께 택시를 타고 청평 감로사로 올라왔다. 주차장 앞 나뭇더미를 버려 둔 그 자리에 좌대를 마련했다. 나뭇더미 를 추스려 쌓고 그 위에 가부좌를 틀고 손수 불을 당겼다. 이때가 새 벽 4시께. 아무도 보는 이가 없었다. 호명산과 감로사 미륵부처님만이 스님의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굽어 보았을 뿐이다. [채한기 기자] 발행일:1998년 7월 8일 구독신청 TEL 02)725-7010 FAX 02)732-7019 법보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