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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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sjyoun (예리큰아빠)
날 짜 (Date): 1998년 7월  8일 수요일 오후 01시 37분 07초
제 목(Title): 퍼]역사속에 나타난 소신공양


번호 : 17/13383                 입력일 : 98/07/04 11:56:20      자료량 :52줄

제목 : [474호]역사속에 나타난 소신공양

  치열한 구도 열정 소신통해 증명

  중국 당나라때 선승이었던 남악 현태(南岳玄泰) 스님은 임종때가 되
어도 아무 스님도 오지 않자 몸소 문밖에 나가 스님을 불러들여  화장
준비를 하라 하고 임종게를 읊었다. “금년에 65세인데 4대(四大)가 주
인을 떠나려고 하네. 도는 본래부터 현묘하고 현묘하니 거기에는 부처
도 조사도 없다. 머리도 깎지 말고 목욕도 시키지  말고 한 무더기 사
나운 불길이면 천 만번  만족하리.” 게송을 마친  스님은 장작더미에
단정히 앉아 불을 붙이게 했다.
  중국 당나라때 회양(懷讓)선사의 제5세  법손 원주 앙산 혜적(慧寂)
선사의 법손인 진주 곽산 경통(景通)선사는 세상의  인연이 다할 무렵
에 장작을 뜰에다 준비하고 여러 도반과 시주들에게 하직한 뒤 공양을
끝내고는 장작있는 곳에 가서 제자들에게 말했다.  “해가 한 낮이 되
거든 와서 알리라.” 한 낮이  되자 손수 촛불을 들고  장작더미 위로
올라가서 삿갓을 벗어 머리 뒤에 원광(圓光)같이  하고 손에는 주장자
를 들어 항마저(降魔杵)의 모습을 나타낸 채 불길속에 서서 입적했다.
  중국 송나라때 혜익스님은 소신공양이야말로 깨달음을 성취하고  비
원을 이룰 수 있다고 믿은 수행자였다. 혜익스님의 소신공양론에 대해
당시 찬반양론이 많았지만 스님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신공양을
실행했다.
  혜익스님은 경산(鏡山)에 소신 준비를 하고 왕과 대신들, 그리고  도
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기 몸에 기름을  붓고 촛불을 켰다. 장작더
미에 불이 붙자 스님은 아무런 고통도 내보이지 않고  《법화경》 `약
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을 외우며 소신공양을 마쳤다.
  조선 순조때  전남 해남   대둔사 일여(一如)스님은 25세되던  해인
1832년 금강산 만회암에 주석하면서, 암자  뒷편에 자리잡은 관음봉에
올라 백일기도를 올리면서 “찬 화로에서 백일안에 연기가 오르면  기
도를 마치려니와 백일이 다 되어도 연기가 오르지 않으면 나의 이  육
신을 불태워 부처님께 공양하리라”고 서원했다.  그러나 백일이 지나
도 찬 화로에서 연기가 오르지  않자 스님은 만회암 앞마당에  장작을
쌓아 그 위에 올라 불을 붙였다.  도반인 백인스님이 일여스님을 말렸
으나 그의 완고한 결심에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백인스님
은 “의상스님께서도 금강산의 맑고  께끗한 대도량을 더럽힐까봐  이
산에서 입적하지 못했다”며 일여스님이 죽어도 왕생극락하지  못한다
고 설득했다. 일여스님은 백인스님의 충고를 받아들여 불 밖으로 나왔
으나 이미 몸은 검게 그을린 후  였다. 일여스님은 백인스님이 살인자
로 누명을 쓰게되자 `자신이 왕생극락을 하기위해 소신공양을 한것'이
라고 변론하고 그날 밤 입적했다. 베트남이 남북전쟁의 참화에 빠져있
던 1963년 5월29일 73세의 틱쾅툭 스님은 군부지배자들의 민족주의 세
력과 불교에 대한 탄압에 항거, 사이공 거리에서 소신공양을 했다.  이
사건에 대해 틱낫한스님은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압제자들에게 경고를 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당시
베트남 사람들이 겪고 있던 고통에 대해 전세계인의 관심을 불러 일으
키는데 있었다”고 했다.
  [김태형 기자]

발행일:1998년 7월 8일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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