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sjyoun (예리큰아빠)
날 짜 (Date): 1998년 6월 30일 화요일 오후 12시 17분 28초
제 목(Title): 위대한 전법자-현장


번호 : 6/3174                 입력일 : 98/06/29 09:22:41      자료량 :145줄

  제목 : (연재)위대한 접법자-현장

 흔히 玄裝은 유명한  求法기행문 <대당서역기>의 저자로, 또는 불경(佛經)
의 중국적 해석을 이룬 천재적 역경가로 평가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그의
일생을 관조하기는 불가능하다. 그의 삶이 웅변하는 구도의 열정, 철저한 지
계행과 쉬임없는  정진, 교단의 안위를  위한 왕과의 협력 그로인해  가졌던
번민같은 드라마틱한 요소때문이다.

 현장의 일생을 편의상  출가, 구법여행, 나란다 수학, 귀국후  역경사업등 4
단계로 나눠보자.  그는 602년(혹은 600년) 수나라의  수도 낙양의 교외마을
진보곡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진위.

 그의 부모는 10세때 모두 세상을 떠나고 네아들중 막내였던 현장은 둘째형
소(법명 장첩)를 따라  낙양의 정토사로 들어간다. 이때가  열세살 되던해다.
공부를 위해 낙양과 장안 사천을 10년동안 옮겨다닌 현장은 23세때 장안 대
각사에서 당시 명성이 높던 법상과 승변에게 수학했다.

 그들은 현장의  비범함에 "불문의 천리마가 될것"이라며  감탄했고, 현장의
명성은 이미 도성안팎에  자자해졌다. 그러나 현장 자신은  여기에 만족할수
없었다. 당시 불교계는  서역을 통해 들어온 경전의 해석이 각기  달라 분열
이 심했고, 번역조차 온전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서역(인도)에  가서 온전한 부처님 가르침을 배워오겠다고  결
심했다. 그러나 당의 조정은  서역 출국을 금지했다. 현장은 세 번이나 원서
를 냈지만 모두 거부되자 국법을 어기고 출국하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해서
장안을 나선 것이 당태종 이세민의 즉위3년(629년)이다. 이로부터 15년반(혹
은 17년반)에 걸친 구법여행이 시작됐다.

 서역으로  가는길은 멀고도  험했다. 고국에  송환될 위기에  처하기도하고
사막을 건너다가 죽을고비도  넘겼다. 그때마다 각국의 관리나  왕들이 그를
도왔다. 그는 <대당서역기>에서 자신이 거쳐간  국가의 실태와 문화를 자세
히 기록해 놓았는데 총 5만리에 걸친 128개국의  기록이 생생하게 전해온다.
그런데  젊은 이방인에  대해, 타국의  왕과 백성이  오늘날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환대하고 가르침을 청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  현장이 갖춘 위의와  비범함때문이었을 것이다. 현장의  전기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이하 자은전)에는  현장을 이렇게 설명하고있다.
"법사의 키는 7척 남짓하고 몸은  적백색이며 미목(眉目)이 뚜렷해 단엄하고
미려하기가 그림같았다. 그의  언담은 우아하고 청아하여 듣는  사람은 염증
을 내지  않았다. 복장은 늘 가사를  입었고, 항상 곁눈질하지  않았다. 환한
모습은 연꽃같았고 시종일관  계율로써 모범을 보여 복(福).혜(慧)의  양업을
갖추었다.

  수려한 용모에 자비와 복덕을  두루 갖춘 상호에 지계의 철저함 까지갖췄
으니 보는 즉시 감화되는 사람이 많았을 법하다.

 현장이 만 3년여에 걸친 노정 끝에 도달한곳이 왕사성 북쪽 교외의 나란다
학. 당시 각국 4천여 승려와 6천여명의 주객이 있었던 나란다대학은 불교계
는 물론  세계최대의 학부로 명성과  권위를 지녔던곳. 거기서 현장은  스승
계현(戒賢)을 만나 <유가사지론>등 유식학 계통의 학문을 배운다.

 당시 인도는 굽타왕조의 통일제국이 망하고, 집권한 하르샤왕(戒日王)에 의
해 불교가 크게  융성했다. 현장이 머무른 나란다대학만해도  온갖 호사스러
운 건물에 1만여명에 달하는 대규모 인원이 풍족한 생활을 누릴수 있을정도
로 막대한 지원을 받았다.

 현장은 나란다사에서 계현의 강의를  듣고, 범어(당시 산스크리트어로 통일
됨)로 된 경전을 필사하고 틈나는대로 본인이 직접 강의와 논쟁을  주관하며
5년을 보냈다.

 현장의 경에  대한 이해와 성실함은  당시 나란다대학서도 최고였다.  그는
당시 유물론, 소승불교등 인도사상계의 다양한 입장과 논쟁을  하며 많은 일
화를 남겼는데, 오직  현장만이 대승의 입장에서 이교도와의  논쟁에 이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공부를 마친 현장은 다시 부처님의 전적을 4년동안에  걸쳐 답사한후, 열렬
한 후원자  계일왕의 청을 받아 대승불교를  알리기위한 대규모 토론대회를
끝으로 귀국길에 오른다.  갈때는 죽을 고비를 넘기는  고행길이었지만 올때
는 전혀달랐다.

 이미 현장의 명성은 서역과 중국을 넘나들던 상인들에 의해 알려져 지나는
곳마다 법을 청하는 이, 공양올리고 보시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진리를 얻기위해  옥문관을 넘은 청년은  이제 43세의 장년이  되어있었다.
그는 6백57부에 달하는 경율론과 부처님 진신사리 150과,  금은동 나무로 만
든 각종 불상 등을 20여기의 말에 싣고 645년 장안에 입성했다.

 태종도 그를 반가이  맞았고 나라는 축제분위기였다. 목숨을 건  여행은 그
자체가 더없는 전법행이었고, 이것이 그를 교단 최고의  지도자로 어느새 올
려놓았던 것이다.

 귀국한 현장은 당태종이  지은 흥복사 대자은사등에서 입적할때인 664년까
지 역경에 종사했다.  그는 경전번역시 증의(證義:고증) 철문(綴文:문체의 통
일)  필수(筆受:구술 필기)  서수(書手:정서) 등의  독특하고  정확한 과정을
밟아 `중국적  해석'의 단초를 놓았다. 그로인해  중국불교는 경전의 해석을
둘러싼  논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불교는 사회사상과  문화에서 확고한
자기영역을 구축할수 있었다.

 임종시 헤아려보니 그가 번역한 경전이 모두 74부 1천3백38권에 달했다 한
다.

 그의 삶을 이해할  때 빠질수없는 것이 당태종 이세민과의  인연이다. 중국
사상 최대의 명군으로  불리는 태종은 현장에게 "비구의 법복을  벗고, 유마
힐의 소복을 걸치고 조정에  앉아 도를 논해주기 바란다"며 환속할 것을 여
러차례 요청할  정도로 현장을 아꼈다.  현장 역시 태종에 극도의  존경심을
표했다.

 당고조 이연의 둘째아들인 태종은 집권을 위해 황태자인 형과 아우를 살해
할 정도로 정치적 야심과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현장은 황실근처를 벗
어날 수 없었다. 다분히 교단의 안위를 위한 것이었다. 더욱이 왕에 의한 법
난의 참혹함을 익히 알고 있지 않았는가.

 이런 태종을 대하는 현장의  태도는 다분히 교단의 안위를 위한것이었으리
라. 강력한 왕권에  의한 교단의 궤멸과 훼불사건을 익히 접했던  현장은 인
도서 가져온 경전을 번역하고  이를 널리 알리는데 왕이 탄압한다면 불가능
할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현장은  당 태종과 그의 아들  고종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아니 떠나고 싶어도 왕들이 놓아주지 않았다.

 왕의 득남을 기원하고, 왕이 아들을 낳으면 축하의 선물을 보냈다.
<자은전>에는 현장이  황제를 칭송하는 미사여구가 숨김없이  담겨있다. 태
종의 고구려정벌을 칭송하는  대목도 그중 하나다. "고려 소국은  중국에 대
한 예의가 없어 수의 양제가  천하의 대군을 세 번이나 통솔해 정벌에 나섰
으나 헛되이 군만 잃었지만, 폐하는 짧은 기간에  철통같은 요동성을 파괴하
고 군대의 위엄을  떨치며 개선하였으며… 천지가 태평하여 일월이 빛나고"
사실 이렇게 해서 얻은 것은 너무 많았다.

 많은 수의  승려들이 배출됐고 군현마다  사찰이 의무적으로 들어섰다.  또
승려에 대한 관의 처벌권도 간청해 회수했다.

 왕권과의 밀착이 개인의 안락이  아닌 전법을 위함이었음은 분명하다. <자
은전>에는 그가 매일 일과를 세워 낮에 충당치 못하면 밤에 그것을 끝내고,
예정된 양이 끝나면 비로소  붓을 놓고 경전을 거둔다음 부처님께 예배하고
행도하다가 삼경에 잠깐 잠자리에  들고 오경에 다시 일어나 범본을 독송하
면서 매일 재계를 마쳤을 정도로 철두철미했다고 전한다.

 그래도 아쉬움은 남았다.  현장은 입적하기 며칠전 문인들에게  "만약 내가
죽거든 그대들은 마땅히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고 거적에 싸서 산간의 벽지
를 택해 안장해주고  궁사(宮寺)는 가까이 하지 말아주오.  부정(不淨)한몸은
마땅히 벽지의 먼땅에 묻어야 하오"라고 유언했다.

 어쩔수 없이 왕권과 밀착했지만 그자신 이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고종은 나라의 대들보를 잃었다고 애통해하며 장의를 화려하게 치르
길 바랬다. 시신은  거적에 싸였지만 금은으로 장식한 번 은곽  사라수등 화
려한 장의물품이 동원됐다. 불교와 정치가 섞여 빚은 시대의 아픔이었다.

 전법자로서 그의  삶은 `불법을  향한 열정과  정진이 있을  때 이것이 곧
가장큰 포교의  원천'임을 증명한 징표였다.  왕에서 천민까지  온 백성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것은 사실 이런 점때문이었다.  유년시절 보였던 천재
적 재능과 불법을 향한  열정, 목숨을 건 구법기행, 역경사에 세운 금자탑에
는 의단독로(疑端獨路)하는 진지한 삶의 자세와 함께  이를 한시도 놓지않는
불굴의 정진이 있었기 때문이다.<鄭雄基 기자>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