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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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sjyoun (예리큰아빠)
날 짜 (Date): 1998년 6월  3일 수요일 오전 05시 03분 58초
제 목(Title): 위대한 전법자들-신라 법흥왕


번호 : 18/3092                 입력일 : 98/06/02 09:31:46      자료량 :128줄

  제목 : 위대한 전법자들-신라 법흥왕

 왕의 불법(佛法)귀의는 당대의 불교가 흥기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기마련
이지만 역사에 족적을 남긴 왕들의 봉불행은 저마다 개성이 독특했다. 인도
의 아쇼카왕 같은이가 부처님 가르침을 국가의 통치이념에 접목시킨데 특징
이 있다면, 중국의 양무제는 개인의 드높은  신심을 왕의 지위를 활용해 펼
치는 조금은 개인적 성향이 강한것이었다.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용화세상을 꿈꾸었던 신라왕들의 봉불행은 타국의 왕
들과는 사뭇 달랐다. 왕즉불(王卽佛)사상을 바탕으로 부처와  왕권을 동일시
하려하고, 자신의 지위를 전륜성왕에  비교하기 즐겼던 인도.중국의  왕들과
달리 신라왕들은 누구보다 불법홍통에 앞장섰으면서도 만년에는  평범한 불
제자로 돌아갔다.

 `부처'가 아닌 미륵의 하생을 기다리는 중생의 한사람으로. 그래서 더 인간
미가 물씬 풍긴다. 조카 이사돈의 희생을 바탕으로 불교를 공인시켰던 법흥
왕 또한 그런 신라왕 가운데 한사람이다. 신라  제23대 법흥왕(재위514~540)
은 지증왕과 연제부인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으로  속명은 원종이다. 왕은 키
가 7척(2미터)에 달하는 거구였지만 성격이 너그러워 사람들이 성인이나 현
인으로 믿고 따랐다.

 부족연맹체로 출발한 신라는 당시만해도 왕권이  취약하고, 귀족들의 권한
이 막강하던 시기. 씨족장인 귀족들은 오랫동안 각부족들내에서 정치.종교적
지배권(祭政一致)을 행사했다. 당시 이들은 오늘날 도교적 가풍 또는 샤머니
즘이라 부르는 토착신앙의 주관자이자 최대 수혜자였다.

 아도에 의해 1백50년전 전래된  불교는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시
기층민중사이에 상당히 퍼져있었다. 취약한 왕실도 역시 불교에 호의적이었
다. 중국이나 고구려 백제에 전해진  불교사상이 왕권강화에 크게 기여한바
있다는 경험을 신라왕실도 이미 접했기 때문이다.

 타계한 고익진 교수는 그의 저서 <한국고대불교사상사>에서 "불교사상 가
운데서 미륵사상이나 전륜성왕설등은 특히 왕권이 취약한  신라왕들에 매력
적인 대안이었을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특히 502년 양나라를 건국한 양
무제에게 삼국모두 조공(租貢)을 바쳤다는 기사가 전하는 것으로 미루어 법
흥왕은 자신과 거의 동시대 인물인 양무제의 봉불행도 익히 접했을것이다.

 법흥왕은 즉위이후 佛法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때마다 번번히  귀족들의 반
대에 부딪쳤다. <해동고승전>에  따르면 왕이  신하들을 불러 "미추왕께서
아도 스님과 함께 이땅에 불교를 펴려고 하셨지만 큰 성과를 얻지못하고 돌
아가셨다. 이후로 부처님의 경이로운 가르침이  전파되지 못하니 매우 슬픈
일이다"고 하면서 "마땅히 큰 절을 세우고 다시 불상을 조성하여 선왕의 공
덕을 따르려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공목, 갈홍 등의 대신은 간언하기를 "민심이 흉흉한데다, 전쟁이 그
치지 않고있는데 어떻게 우리 백성들에게 쓸데없는 건물을 세우게 하겠습니
까"하고 반대했다. 막강한 귀족들의 힘에  밀린 법흥왕은 우선 왕권의 강화
를 위한 일련의 조치들을 취하기 시작했다. 벼슬 직급을  정하는 관등(官等)
제도와 신하들의 복식(의복)제도가 왕대에야 비로소 마련됐다.

 (520년) 또 처음으로 병부(兵部)를 설치해 군권의  통일을 기하는 한편(517
년) 율령을 완성(520년) 공포하는 일련의  왕권강화책들이 실시됐다. 그렇다
고해서 귀족들의 견고한 아성을 완전히 꺽어놓은 것은 아니었다. 사서(史書)
에는 법흥왕이 권신들의 반대로 불법홍포가 좌절될때마다  상당히 안타까와
했다는 여러 기사가 전하는데 저 유명한  순교자 `이차돈'과의 일화는 즉위
후 14년이 지난후에 전개된다.

 이차돈(혹은 박염촉)은 법흥왕에게는 조카뻘이 되는 왕족으로 궁궐에서 內
舍(오늘로 치면 비서관)직을 맡고 있는 촉망되는 젊은이였다. 이차돈은 이미
고구려 도읍 평양 흥복사(興福寺)의  백봉(白峰)국사에 불교를 배워  상당한
식견을 갖고있었다. 이차돈이 어느날 왕에 아뢰었다. "소신이 거짓으로 왕께서
불사를 창건하라 명을 내렸다고 말하며 천경림에 절을 지을터이니  그때 신
하들이 항의하면 바로 칙령을 내려 소신의 죄를 추궁해 처형하십시오.

 그러면 왕께 두려움이 절로 들어 복종할것입니다" 왕은 "어찌 충신을 해칠
수 있겠느냐"며 이차돈의 뜻을  만류했다. 그러자 이차돈은 "선한일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신하의 절개이온데, 하물며  이로인해 불법이 영원히 빛나고
왕조의 결속을 갖고온다면 소신이 죽는날이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겠습니
까"하고 거듭 간청, 결국 왕과 함께 깊은 서원을 맺었다.

 천경림에 절을 짓기 시작하자 신하들의 반대가  빗발쳤고, 왕은 둘만의 약
조에 의해 이차돈의 참형을 명했다. 그의 목을 베자 머리는 경주 동북쪽 금
강산 꼭대기로 날아갔고 피대신 흰젖이  용솟음쳐 수십미터나 올랐으며, 햇
빛은 어두어지고 땅이 크게 진동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숭고한 희생을 접한
신하들은 왕의 불법홍포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때가 527년 8월초닷
새 이차돈의 나이 26세요, 법흥왕 재위 14년만의 일이다.

 목숨을 던져 불법을 공인시킨 이차돈의 순교는 왕에게 가장 가슴아픈 일이
었을 것이다. 왕은 백성들과 함께 이차돈의 형장인 소금강산에서 그를 장사
지내고 자추사(혹은 흰피가 솟구쳤다해서 백률사라고도 함)를 지어 그를 추
도했다. 이 백률사 경내에 817년 추모비가 세워져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전해온다.

 이차돈의 순교 이듬해 왕은 살생을 금지하는 영을 내렸다. 나아가 왕은 불
법을 홍통하며 특히 십재일(十齋日)일에 백성들에게 `팔재계(八齋戒) 가운데
서도 불살생을 잘지키라'고 명했다는 기록이 중국 <梁書>에 전해온다. 이또
한 이차돈의 순교를 기리는 일환이었으리라.

 이차돈의 순교는 왕권도 강화시키면서  더불어 신라가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지는데도 이바지했다. 건원(建元)이라는  연호가 왕23년에 처음  사용됐고
상대등(上大等) 관직 신설, 금관가야 정벌등이  차례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때까지도 절대왕권이 확립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왕은 불교를 공인해 백성
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수 있도록 했지만 천경림에 절을 짓는 불사를 곧
장 시작하지는 않았다.

 이는 귀족들의 반대가 잔존해 있었거나, 아니면  왕 자신이 말년에 불사를
친히 수행하려 했을것으로 해석된다. 또 신라건국이후부터 천경림(天鏡林)이
지녀왔던 성소로서의 권위를 감안했을때 시기를 기다린 왕의 현명한 처사로
봐야할 것이다. 천경림의 창건공사는  법흥왕 22년(534년)에 비로소  시작했
다. 당시 나무를 베고 터를 닦다가  이땅에서 주춧돌과 대들보 섬돌등이 발
견됐다고 한다.

 아마 아도스님과 이차돈의 흔적이었을것이다. 묘하게도 신라불교의 흥법성
(興法三聖)이라 불리는 아도, 이차돈, 법흥왕이  이곳 천경림과 인연을 맺었
다. 법흥왕은 친히 공사를 지휘 감독하기도 했는데 불사가 어느정도 마무리
되자 (흥륜사는 후대인 진흥왕대 544년에 완공) 왕위를 던지고 출가해 승려
가 되어 흥륜사에서 거주했다.

 출가연도에 대한 기록이  전하지 않지만  <삼국사기> 법흥왕조의  기사가
537년부터 입멸때인 540년까지 남지않은것으로 봐서 아마 537년경 이곳으로
출가해 4년정도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왕의 출가 이후 흥륜사는 왕이 살
았다해서 대왕흥륜사라 불리기도  했다. 왕의 법명은  법공(法空). 출가이후
세벌의 옷과 바루하나만을 갖고 있었을 정도로 출가이후 왕은  청빈한 삶을
살며 정진에 정진을 거듭했다.

 왕비 또한 출가해 영흥사에서 비구니로 수도정진  했다. 우리 역사상 왕과
왕비가 함께 출가해 수년간 여느  스님과 같이 구도의 길을  걸었던 사례는
처음이었다. 이같은 전통은  법흥왕의 후대인 진흥왕대에  이어져 진흥왕도
불교와 나라를 크게 융성시켜놓은후 미련없이 출가해 법운이라는 법명을 받
았다. <삼국유사>에는 법흥왕이 출가후 깨달음에 대한 원대한 뜻과 고매한
행동으로 일체중생에 자비심을 가르치다 540년 가을에 승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뇌속에 결정된 조카 이차돈의 순교는  아마 왕의 장엄한 원력과  정진의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鄭雄基 기자>
 *발행일(1675호):1998년 6월 2일 , 구독문의 (02)730-4488
  < 한장의 불교신문 한사람의 포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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