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리) 날 짜 (Date): 1998년 5월 23일 토요일 오후 12시 36분 11초 제 목(Title): 도올 벽암록 제 3강화-6/신동아 [12] 제목 : 도올 『碧巖錄』 講話 제3화 -6 예수는 말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는 자신의 고향에서 대접 받는 일이 없나니라』(Truly I say to you, no prophet is acceptable in his own country. 누가 4 : 24) 이 모두가 같은 인간의 냄새가 풍기는 푸념들이 아니겠누? 자! 이제, 우리의 본칙으로 돌아가자! 이 3칙은 馬祖가 죽기 직전 세수 80의 어느날 石門山에서 있었던 일로 사료된다. 第三則 馬祖日面佛月面佛 垂示云: 「一機一境, 一言一句, 且圖有箇入處, 好肉上朦瘡, 成貸成窟. 大用現前, 不存軌則, 且圖知有向上事, 蓋天蓋地, 又摸索不著. 恁匿也 得, 不恁匿也得, 太廉纖生; 恁匿也不得, 不恁匿也不得, 太孤危生. 不 涉二塗, 如何卽是? 請試擧看.」 제3칙 마조스님 말씀키를, 일면불월면불 마음가짐 한 꼬타리, 대상세계의 한 상황, 말 한 마디 한 구절에 서 깨달음의 한 입구를 발견하려고 도모하는 것은, 마치 멀쩡한 고 운 피부에 생채기를 내서, 그곳에 둥지를 틀고 썩은 굴을 짓는 것 과도 같다. 깨달음의 큰 쓰임은 어디에나 있는 그대로 눈 앞에 드 러나 일체의 궤적을 남기지 않거늘, 초월의 구도의 길을 찾아 헤매 는 것은 하늘을 다 덮고 땅을 휘덮어도 어디서도 더듬어지지조차 않는다. 이렇게 해도 좋고 이렇게 안 해도 좋다는 태도는 너무 가냘프다.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이렇게 안 해도 안 된다는 태도는 너무 고고 하다. 이렇게 해도 좋고 이렇게 안 해도 좋다는 긍정의 태도와, 이 렇게 해도 안 되고 이렇게 안 해도 안 된다는 부정의 태도, 이 양 자의 길을 밟지 않는다면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곧 정도일 것인 가? 다음 마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機」라 함은 心機를 말하는 것이요, 우리 마음이 즉각 즉각 움 직이는 기능의 妙用이다. 機란 본시 「찬스(Chance)」요, 그것은 氣의 조합이 변해가는 어떤 갈림길(Bifurcation Point)을 말하는 것 이다. 「一機一境」이라 할 때 機는 心의 주관적 기능이요, 境은 그 기능에 상응하는 대상영역(visaya), 대상사물(artha), 인식범위 (gocara)를 가리킨다. 눈에는 色이라는 境이 있고, 귀에는 聲이라는 경이 있고, 코에는 香이라는 경이 있고, 혀에는 味라는 경이 있고, 身에는 觸이라는 경이 있고, 意에는 法이라는 경이 있다. 眼·耳· 鼻·舌·身·意를 六根이라 하고, 色·聲·香·味·觸·法을 六境 이라 한다. 그런데 이러한 一機一境, 인간의 언어갈등의 一言一句에서 우리가 入處(깨달음의 실마리)를 찾으려 하는 노력은 멀쩡히 고운 피부에 상처를 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 慧能의 말대로 本 來無一物이요, 塵埃가 일어날 곳이 없는 것이라면 깨달음을 향한 인위적 노력 그 자체가 하나의 집착이요, 업보인 것이다. 禪은 때로 깨달음을 향한 노력 그 자체를 거부한다. 인간의 깨달음 을 향한 부단한 向上心은 참으로 고귀한 것이다. 허나 이 깨달음의 노력 그 자체가 거부된다고 하는 것은 方便설법이다. 의사가 사람을 튼튼하게 만들어주겠다고 하여 공연한 치료를 해 멀 쩡한 사람이 병신되는 예가 하나둘이 아니라고 한다면, 큰스님이랍 시고 깨달음의 向心을 빙자하여 깨닫게 해주겠다고 하면서 쓸데없 이 話頭나 던지고 방할이나 하고, 부질없는 설법으로 인간을 혼미 하게나 만든다면 그것은 멀쩡하게 고운 살에 공연히 생채기를 내는 것(朦瘡)과도 같은 것이다. 여기 貸窟이라 한 것은 생채기가 깊어져서 고름구멍이 되는 것과도 같은 상황을 비유한 것이지만, 貸窟이란 본시 인간의 안락처요 동 물의 보금자리인 것이다. 佛家는 모든 정체를 거부한다. 貸窟과도 같은 안락한 定處를 거부한다. 莊生의 「齊物」 비유를 빌려 말한 다면 그것은 나비의 고치와도 같은 것이다. 나비가 고치를 벗어나지 않는 한 그것은 누에일 뿐이다. 푸른 창공 을 훨훨 날아다니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치라는 貸窟을 벗어나야 하 는 것이다. 一機一境, 一言一句에서 쓸데없이 깨달음의 入處를 찾으 려 하지 말라는 이 원오의 수시는 죽음을 앞둔 馬祖 말년의 해탈경 지를 전제로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원오가 말하는 마조의 공안은, 긁어 부스럼이 없고, 깨달음의 시도조차 좌절되고마는 그러한 절대 경지인 것이다. 「恁(nen)」이란 글자는 宋·元·明의 백화소설·희곡에서 널리 쓰 인 글자로, 현재 백화의 這, 那, 這匿, 那匿, 什匿 張匿와 같은 다양 한 의미로 쓰인다. 「廉纖」이란 형용사 역시 唐·宋의 詩나 어록 체에서 흔히 쓰였던 말인데 원래 「가는 비(微雨)」를 가리키며 「細小」 「細微」의 뜻이 있다. 唐 韓愈의 詩 「晩雨」에 『廉纖 晩雨不能晴, 池岸草間戮蚓鳴』이라 하였고, 宋 黃庭堅의 「次韻賞 梅」에 『微風拂掠生春絲, 小雨廉纖洗暗怏女』이라 함이 그 대표 적인 용례다. 「恁匿也得, 不恁匿也得」이라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매사를 긍정하는 것을 말한다. 「~也得 ~也得」이라는 구문은 「~해도 좋 고 ~해도 좋다」는 뜻이다. 「得」이란 요새말로 「오케이」 정도 에 해당되며 현재백화로는 「行」에 해당된다. 따라서 매사를 긍정 하는 소박실재론(naive realism)의 단계는 너무 여리고 가냘프고 나 약한 깨달음의 단계다. 「恁匿也不得, 不恁匿也不得」은 어떠한 상황에도 매사를 부정하는 태도를 말한다. 이렇게 부정적이기만 하면 너무 위험하고 고립되고 만다는 것이다. 여기 「太廉纖生」 「太孤危生」의 「生」은 唐代 에 쓰인 구어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별의미 없는 「語助詞」이다. 이것을 문어적으로 번역하면 의미가 통하지 않게 된다. 긍정만 하 면 너무 廉纖하게 되고 부정만하면 너무 孤危하게 된다. 긍정과 부 정의 二塗(두 길)를 밟지 않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正道는 무엇일 까? 그것이 바로 다음에 나오는, 죽음에 직면한 노장 馬祖의 달관 의 경지일 것이다. 請試擧看! 【本則】 擧:馬大師不安, 院主問:『和尙近日尊候如何?』 大師 云:『日面佛, 月面佛.』 들어보자! 요즈음 들어 마조도일 대사가 병이 들어 몸이 편칠 못 했다. 그래서 원주스님이 여쭈었다: 『스님 요즈음 기체존후가 어떠하시옵니까?』 마조대사가 답하기를: 『일면불 월면불!』 세상에 요렇게도 짧은 공안이 또 있을까? 아니 이걸 공안이라구 내놨어? 내가 「일면불 월면불」을 번역하지 않고 여기 그대로 음 역하여 놓으니까 그 뜻이 전달되지 않는다. 죽음을 앞둔 馬祖, 80세의 마조, 자기 죽을 날짜까지 정확히 예견했 던 마조, 그 마조가 방에 앉아 툇마루 앞에 나 있는 미닫이 문을 열고 불편한 몸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을 무렵! 주지스님이 와서 조 실스님께 『옥체 일향만강하시옵나이까』하고 묻는 것은 너무 흔한 스토리, 선승의 다반사 아닌, 俗家의 예도에 속하는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마조의 대답이다. 그 대답은 어쩌면 마조의 마지막 유언이었을지도 모른다. 『祖堂集』 14권에는 『내일 새벽 遷化하려 하는데 오늘 저녁 원주스님이 여쭈었다』로 되어있다. 그렇다면 때는 AD 788년 2월4일! 레어티스와의 결투끝에 죽어가는 햄릿의 마지막 한마디는 무엇이었던가? 『The rest is silence』 『나머지는 침묵뿐!』 『일면불, 월면불!』 이건 과연 무슨 개구란가? 정말 무슨 소린지 아는가? 이 馬祖의 話頭가 던져진 것은 AD 788년! 현금 1998년까 지 일천이백십년동안 斯界의 주석가들은 모두 한결같이 다음과 같 은 주석을 달아놓았다. 菩提流支譯의 『佛說佛名經』 卷七에 의거하여 日面佛은 변함없는 해와 같아 1800세를 족히 사는 장수의 부처님이요, 月面佛은 항상 변하는 달과 같아 하룻밤(一日一夜)밖에 못 사는 단명의 부처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면불, 월면불」이라는 마조가 마지막 지상 에 남긴 영원의 말은? 『천년을 살든 하루를 살든』 죽어가는 마조에게 원주스님이 『느낌이 어떠하십니까?』하고 물으 니 마지막 대답인즉, 『천년을 살든 하루를 살든!』 시간의 초월이 었다. 말해보라! 과연 그런가? 莊子의 『逍遙遊』에 보면 朝菌은 晦朔을 모르고 瞿瞿은 春秋를 모 르는데, 楚나라 남쪽에 冥靈이라 불리는 큰나무는 5백년을 봄으로 삼고 5백년을 가을로 삼는다. 또 上古의 大椿이라는 나무는 8천년 을 봄으로 삼고 8천년을 가을로 삼았다. 그런데 겨우 나이 7백을 살았다 하는 彭祖를 놓고 세간에서 엄청나게 오래 산 인물로 전설 화하고 있으니 이 또한 우스꽝스러운 일 아닌가? 또 『齊物論』에 말하기를: 天下莫大於秋毫之末, 而大山爲小. 莫壽於禾子, 而彭祖爲夭. 하늘 아래 가을 터럭끝보다 더 큰 것이 없는가 하면 거대한 태산도 눈곱만할 수 있는 것이요, 태어나자마자 죽는 아기보다 더 오래 사는 사람이 없는가 하면, 팽조를 요절했다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天地與我竝生이요 萬物與我爲一이라, 공간의 大小나 시간의 長短이 모두 상대적인 개념이요 결국 하나로 통합되고 초월된다는 것이다. 「일면불, 월면불!」 천년을 살아도 아침만 살고 저녁이 있는 줄 모르는 하루살이 벌레보다도 더 짧은 시간을 살았다 말할 수도 있 는 것이요, 하룻밤을 살았어도 7백년을 살았다 하는 팽조보다 더 오래 살았다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마조가 마지막으로 외친 「일 면불, 월면불」은 삶의 무상함과 영원함이 초월되는 순간이었을까? 도올은 말한다! 이 모든 주석이 개구라다! 갈등에 얽매인 拙僧들의 稚解에 불과하다. 말인즉 그럴 듯하다. 혜망에 번뜩이는 원오도 오 죽하면 『只這日面佛·月面佛, 極是難見.(이 놈의 일면불 월면불 참 으로 해석하기 어렵다!)』라고 고충을 털어놓았을까? 나는 말한다! 천이백 秋의 몽롱한 주석의 구름을 헤치고 나 도올은 말한다! 죽어가는 馬祖가 후대의 주석가들이 토를 달듯이, 『佛名經』을 인 용했을 리 만무하다. 아니 그렇게 해탈한 마조가 이제 죽음에 직면 하여 출전에 의거한 무슨 공식을 話頭로 남겼을 리가 있겠는가? 莊 周의 朝菌과 大椿이 다 개구라인 것이다. 우리는 죽음에 직면한 한 인간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출전의 복선을 깔지 말고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 「日面佛, 月面 佛」의 面은 「면한다」 「바라본다」라는 동사다. 「直面한다」라 는 우리의 상투적 용법처럼. 日面佛은 문자 그대로 해를 바라보는 부처요, 月面佛은 문자 그대로 달을 바라보는 부처다. 거기에 무슨 구구한 1천8백년이니, 하룻밤이니 하는 시간의 개념이 있겠는가? 원오의 評唱에도 일체 그러한 시간의 길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최 소한 北宋의 설두나 원오만 하더라도 그러한 식으로 이 마조의 언 어를 이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일 아침 죽을 마조에게 『尊候如何?(어떠하십니까?)』라는 말은 단순히 죽을 당시의 느낌을 묻는 말은 아닐 것이다. 한 인간의 장 구한 깨달음의 드라마를 마감하는 위대한 한 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존경하는 스님! 선종의 뿌리를 내리신 우리의 조사 마조스님! 위 대한 생애를 사셨습니다. 이제 돌아가시는군요. 스님! 스님께서는 스님의 생애를 되돌아보시면서 뭐라 말씀하시겠습니까?』 『난 말야! 낮에는 해를 보고 살았고, 밤에는 달을 보고 살았어! 그 냥 그렇게 살았어!』 위대한 마조! 소같이 덩치가 컸고 호랑이같이 민철했던 마조! 그 마조의 이 마지막 한 마디, 『낮에는 해를 보고, 밤에는 달을 보 고』 이 한 마디로 족하지 않을까? 이것이야말로 조균과 대춘의 시 간을 초월한, 소박한 선승의 모습 아닐까? 그는 분명 위대한 선사였다. 나는 일면불, 월면불의 마조에게서, 내 고향 천안에서 멀지 않은 서산 용현리 바위에 새겨진 마애삼존불의 미소를 읽는다. 동남쪽에서 해가 뜨면 근엄한 얼굴이 비치다가 해 가 오름에 따라 차차 평온한 미소를 띠면서 자애롭게 변해가는 서 산 마애삼존불! 영원한 백제의 미소, 그 미소를 나는 마조의 일면 불·월면불에서 읽는다. 구기동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지금 비구니 참선도량이 되어있는 승 가사! 비봉 아래의 마애불, 참으로 내가 사랑하는 신라의 위대한 예술이다(고려시대로 상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분명 통일신 라의 작품이다. 진흥왕 순수비와도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자애로운 얼굴, 우람차게 솟은 어깨, 갸름하게 내려뻗은 허리, 피카 소의 게르니카보다 더 강렬하게 짓누르는 오른팔뚝, 주욱 평온하게 뻗은 반가부좌다리, 치솟는 연꽃받침, 섬세한 발톱, 후덕하지만 고 운 선을 그린 붉은 입술! 나 야밤중에 홀로 그 부처를 대면하고 얼 마나 많은 눈물을 쏟았던가! 개인의 원혼에 사로잡혔던 대자대비의 소망이었던 승가사의 마애불, 그것은 나의 미소요 위로였다. 낮에는 해를 보고, 밤에는 달을 보는 승가사의 부처, 그 부처의 미소에서 나는 마조의 환희와 정적을 읽는다. 【頌】 日面佛, 月面佛. 五帝三皇是何物? 二十年來曾苦辛, 爲君幾下蒼龍窟. 屈! 堪述. 明眼衲僧莫輕忽. 낮에는 해를 보고 밤에는 달을 보고, 삼황오제 뭐 말라비틀어진 게냐? 내 이십년동안 얼마나 고생했던가, 그대 위해 저 푸른 바다 속 용굴에 몇 번이나 내려갔던가? 억울토다! 어찌 내 심정을 다 말할 수 있으리오. 똑똑한 체하는 스님네들! 제발 이 일면불 월면불 쉽게 생각마소. 「五帝三皇」이란 중국의 문명을 건설한 상징적 先王의 대명사다. 異說이 存하지만 五帝란 少昊, 芮頊, 帝柰, 堯, 舜을 이름이요, 三皇 이란 燧人, 伏羲, 神農을 가리킨다. 『일면불·월면불』이라 하는 마조의 경지에서 본다면 이러한 세속의 이상군주의 세계가 다 뭐 말라비틀어진 것이냐? 세속의 어떠한 지고의 권위도 이 일면불·월 면불 앞에서는 의미를 잃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설두의 게송인 즉, 출전이 있다. 그것은 유명한 禪僧詩人, 禪月大師의 『禪月集』 중 「公子行」이라는 시에서 따온 것이다. 여기서 「公子」란, 좀 안됐지만 내 똑똑한 후배(高大同門) 김현철군을 연상하면 쉽게 상 상이 갈 것이다. 『비단옷(錦衣) 찬란(鮮華)히 빛나고 손에는 매를 들고 사냥을 나 간다. 한가로이 거니는 그 모습, 경박하기 그지없네. 피땀 흘리는 농부의 어려움은 조금도 몰라. 五帝三皇, 뭐 말라빠진 게냐?』 이 시는 당대 왕후장상들의 세상물정 모르는 사치와 민중의 삶의 노고를 배반한 세속적 권위의 타락을 풍자한 시다. 설두는 여기서 제2구를 따온 것이다. 或說에 의하면 『벽암록』이 「五帝三皇是何 物」이란 구절 때문에, 중국황실의 정통성을 거부했다하여 『대장 경』에 편입이 안 되었다고도 하나 내 아는 바 없다. 「二十年來曾 苦辛」은 설두 자신이 이 「일면불월면불」한 소리를 깨닫기 위해 20년을 고생했다는 아주 소박한 이야기로 풀어 마땅하다. 「爲君幾下蒼龍窟」이란 『大智度論』 卷12에 보이는 能施太子의 고사에서 온 것이다. 蒼龍窟이란 저 해저 깊숙한 바위속에 있는 용 의 굴을 말하는 것인데, 그 깊은 굴속에 사는 용의 턱 아래에 구슬 이 있어, 그 구슬을 취하기 위해 바다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는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다는 우리 속담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爲君」의 君은 馬祖일 것이다. 나 그대 때문에 저 깊은 푸른 바 다 속까지 몇 번이나 내려가야 했던고! 아 억울하다 억울하다, 그 고생 다 말할 수 없네! 수도자의 고충, 깨달음의 어려움을 표현한 말이렷다. 그런데 요즈음의 똑똑한 스님네들, 이 도올의 해설 하나 로 「일면불월면불」 다 알아버려! 마조의 「일면불월면불」 입술 에서 까는 구라로 다 해결해버린다구? 제발 제발 똑똑한 사람들이 여! 서양철학, 야소철학, 수학·물리 다 마스타한 석학님네들, 제발 일면불 월면불일랑 그리 쉽게 깨달아 넘겨버리지 마소! 진리란 역 시 어려운 데 있고, 깨달음이란 역시 어려운 데 있나니. 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