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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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리)
날 짜 (Date): 1998년 5월 23일 토요일 오후 12시 30분 02초
제 목(Title): 도올 벽암록 제 3강화-3/신동아 


 [15] 제목 : 도올 『碧巖錄』 講話 제3화 -3

   마조는 이러한 회양의 교시(示誨)를 들었을 때, 목마른 심령에 퍼붓
   는 천상의 감로수를 마시는 느낌이 감돌았다.  그 자리에서 마조는 
   벌떡 일어나 회양대사에게 모든 예를 갖추어 절을 하고 나서  다시 
   여쭈었다.
   
   『마음가짐을 어떻게 가지면 그 모습이 없는 삼매경지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如何用心, 卽合無相三昧?) 
   
   그러자 회양대사는 친절하게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네가 마음 내면의 法門을 배운다고 하는 것은 꼭 들판에 씨를 뿌
   리는 것과도 같다. 내가 법문의 요체를 말한다고  하는 것은 그 들
   판에 내리는 하늘의 단비와도 같은 것이다. 그 인연이 닿으면 반드
   시 싹트게 되어 있는 법, 그대 나와 연이 있는 것 같군, 그대  반드
   시 道를 보게 되리라』(汝學心地法門,  如下種子. 我說法要, 譬彼天
   澤, 汝綠合故, 當見其道.)
   
   묵직한 마조는 그래도 또 궁금해서 캐물었다. 
   
   『아니 도를 보게 되리라 하셨는데, 도란 본시 색깔도 없고 형체도 
   없는 법, 어떻게 그 도를 볼 수 있단 말입니까?』(道非色相, 云何能
   見?) 
   
   회양대사는 여유롭게 다음과 같이 일러주었다.
   
   『마음속엔 달마눈깔이라는 게 있어. 그 눈깔로 道가 다  보인단다. 
   모습이 없는 삼매경지도 그 눈깔이면 다  해결되지.』(心地法眼, 能
   見乎道. 無相三昧, 亦復然矣.) 
   
   아이쿠 두야! 그래도 석연치 못한 마조! 집요하게 또  묻는다. 깨우
   침이란 중도하차는 없는 법, 중간타협도 있을 수 없다!
   
   『그 놈의 도라는 게 만들어졌다가  부서지기도 하고 그러는 겁니
   까?』(有成壞否?)
   
   『이놈아! 도라는 건, 만들고 부수고,  모이고 흩어지고, 그런 관점
   에서 보려고 하면 이미 날 샌 거다. 그렇게  보면 도를 볼 날은 없
   을 것이다. 이놈아! 귀찮아 더 못 말하겠다. 게송 하나 읊을게 들어
   보아라!(若以成壞聚散而見道者, 非見道也. 聽吾偈. 曰:)
   
   
   
   우리 마음속에 온갖 씨앗 들어있어
   은혜로운 단비를 만나면 모두 싹이 트지
   삼매의 꽃, 모습이 없으니
   어찌 만들고 또 부수고 하리오?』
   
   (心地含諸種,
   遇澤悉皆萌.
   三昧華無相,
   何壞復何成.)
   
   
   이에 우리의 주인공 마쭈 따오이, 무명을 떨치고 개오를 한다. 그의 
   마음 초연하여 활짝 갠 봄날과도 같았다. 그 뒤로 회양대사를 시봉
   하기를 아홉 가을, 날로 날로  그 현오함을 더해갔다.(一蒙開悟, 心
   意超然, 侍奉九秋, 日益玄奧.) 회양에게  入室제자 모두 6인이 있었
   는데 각기 회양의 인가를 받았다:  『그대들의 깨달음, 내 몸의  한 
   지체와도 같다』 法常은 그 눈썹을 얻어 威儀에 善하고, 智達은 그 
   눈동자를 얻어 顧盼에 善하고, 坦然은 그 귀를 얻어 聽理에 善하고, 
   神照는 그 코를 얻어 知氣에 善하고, 嚴峻은  그 혀를 얻어 譚說에 
   善하다. 마조 道一! 그야말로 그 마음을 얻어  古今에 善했다. 마조 
   도일! 古今에 善했다  함은, 곧 그야말로  선의 역사를 창출해냈다 
   함이다.
   
   天寶元年(742) 建陽(복건성) 佛跡巖에서  開法하였고, 또 南康(강서
   성) 陽湖 北岸의 新開寺,  撫州(강서성) 西裏山, 虔州(강서성)  公山 
   등지에 住하였고 大曆四年(769)에는 鍾陵(강서성) 開元寺(일명 佑淸
   寺)에 주석하면서 이곳을 중심으로 宗風을 擧揚하였다. 晩年乳潭(江
   西省 靖安縣) 石門山 寶峰寺에  住하면서 宴默終焉의 地를  定하였
   다.
   
   貞元四年 正月중에 石門山 숲을 지나가던 어느 날 시자에게 이르기
   를: 
   
   『이제 이 내 썩은 기덩어리가 땅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구나. 내달
   쯤 되리라!』(吾之朽質, 當於來月歸玆地矣.)
   
   말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과연 다음달 2月4日  微疾이 있었다. 목욕
   재계를 하시더니 방에 돌아와 가부좌를 틀고 조용히 入滅하시었다. 
   世壽 80이었다. 마조가 산 시대, 시인 李白(701~762), 杜甫(712~770)
   와 동시대, 玄宗과 양귀비가 로맨스를 펼치던  盛唐의 한나절을 지
   냈던 것이다.
   
   마조의 위대성은 교육자의 위대성이었다. 마조의 말들은 매우 간결
   하고 좀 신비롭다. 우리 상식적 논리의 인과를 따르지 않는다. 조주
   의 말들은 잘 상고해보면  치밀한 논리가 숨어 있다.  허나 마조의 
   말들은 도무지 압축된 논리가 인과적으로 펼쳐지질 않는다. 그러나 
   마조의 언어의 파워는 계발성에 있다. 그리고  그는 方便의 대가였
   다. 方便이란 상대방(제자들)의 智根과 주어진 상황에 따라 그때 그
   때 그 계발성의 구조를 바꿔나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方便이
   란 언어에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어느 스님이 마조화상에게 물었다.
   
   『마음이 곧 부처라 말씀하셨는데  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爲甚匿說卽心卽佛.)
   
   그러자 마조가 대답했다.
   
   『어린애 울음 그치게 하려구』(爲止小兒啼.)
   
   『그럼 어린애가 울음을 그치면 뭐라  말씀하시겠습니까?』(啼止時
   如何?)
   
   『마음이 곧 부처가 아니라 하지』(非心非佛.)
   
   『그럼 우는 놈도 아니고 울지 않는 놈도 아닌 놈이 오면 뭐라 말
   씀하시겠습니까?』(除此二種人來, 如何指示?)
   
   『그런 놈한테는 아무 것도 아니라 말하지』(向伊道不是物.)
   
   『그럼 그런 놈도 아닌 우리 문중의 사람을 홀연히 만나면 뭐라 말
   씀하시겠습니까?』(忽遇其中人來時如何?)
   
   『그럼 그런 놈한테는 열심히 몸으로 대도를 닦으라 말하지』(且敎
   伊體會大道.)
   
   
   마조의 대화는 여기서 퉁명스럽게 끝난다. 한문갈등  속에 담긴 뜻
   을 가만히 홀로 상고해보건대 솔직히 말해 그 뜻을 다  헤아리기는 
   어렵다. 허나 아주 생소하게 들리는 이 언어의 이면에는 불교의 기
   본적 이론의 틀이 다 담겨 있다. 그 기본논리를 전제로 한 후에 비
   로소 이 수수께끼들은 풀린다.
   
   「어린애가 운다」 「어린애가 울지 않는다」 이런 명제들은  우리 
   삶의 긍정과 부정의 상징적인  표현들이다. 「卽心卽佛」과 「非心
   非佛」 마음이 곧 부처일 수도  있고 마음이 곧 부처가 아닐  수도 
   있다. 그것 또한 긍정과 부정의 一端들이다. 그런데 「道不是物」이
   라 한 것은 긍정과 부정, 그 양자를 몽땅 부정해버린 것이다.  그리
   고 「體會大道」라 한 것은 그 양자를 몽땅 긍정한 것이다.
   
   마조의 말들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허나 이 모
   든 상황이 수수께끼 같은 말로  점철되는 이유는 바로 이 네  상황 
   개개가 모두 마조에게는  方便의 계기라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는 
   긍정으로 대처하고, 저 상황에서는 부정으로 대처하고, 또 어떤  상
   황에서는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닌 것으로 대처하고, 또 어떤 상
   황에서는 긍정과 부정이 다 수용되는 상황으로 대처한다는 것이다.
   
   이 우파야(upaya)라고 하는 「방편」의 산스크리트어는 본래  「접
   근한다」 「도달한다」 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것은 중생
   을 진리로 끌어가기 위한 교화의 방법이며,  교묘한 수단을 의미한
   다. 방편이 곧 진리 그 자체는 아니다. 
   
   지금 우리가 인용하고 있는 이 언어 자체가 담겨 있는 책이 明나라 
   萬曆 30년(1602)에 序刊된 瞿汝稷의 책인데  그 이름이 『指月錄』
   이다. 「指月」이란 선종에서는 「經典」을 의미한다. 경전이 왜 지
   월인가? 지월이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킨다는 뜻이다. 손가락이란 
   어디까지나 달을 가리키는 방편이요, 손가락이 곧 달은 아니다.  그
   런데 많은 사람들이 달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만 쳐다보고 달을 
   보지 않는다.
   
   
   마조 언어의 方便的 성격, 참으로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허나 현대 
   서양학문의 일방적 세례속에서 자라난 동시대인들에게 가장 了解되
   기 어려운 부분이 이 方便일지도 모른다. 禪은 方便이다. 그리고 이 
   方便이야말로 서양철학의 정교한 논리가 반성해야 할 제1의 과제상
   황일지도 모른다. 논리 그 자체내의 절대적  법칙을 인간에게 강요
   한다는 것은 과학이라는 方便내에서만  方便的으로 가능할 뿐이다. 
   인간은 허무요 찬스다!(Life is nothing, a chance.)
   
   이왕 얘기가 나온 김에 마조의 방편사례를 하나 더 들어보자! 
   
   마조의 제자들이 우글거리는 거대사찰 江西 種陵의 開元寺! 어느날 
   젊은 승려 한명이 마조에게 와서 추근거리면서 질문을 던진다.
   
   『대사님! 요리조리 구라만 치시지 말구요. 좀 속시원하게 말씀 좀 
   해주세요. 긍정이다 부정이다 이따위 4句어법을 쓰지 마시고,  백가
   지로 아니다 아니다 이런 것도 다 끊어버리시고 단도직입적으로 가
   르쳐 주세요. 도대체 달마가 왜 서쪽에서 왔습니까?』(離四句, 絶百
   非, 請師直指西來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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