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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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5년02월15일(수) 15시28분16초 KST
제 목(Title): 나의 신행기 11


[경전....]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왔다. 사회라는 곳은 학교와는 달라서
하옇튼 나를 괴롭히는 요소가 많았다. 원래 싸움을 좋아하고
다투기 좋아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기 좋아하는 성격으로
생존경쟁의 현장인 사회에 나오니 좌충우돌 매일 싸움이나 하고
거기에다 잡학적으로 머리에 입력된 불교정보로 인하여 자기와의
싸움은 갈수록 치열해진다.

사회에 나오기전에 나는 나의 신행생활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고
언제나 유토피아를 찾아서 방황하고 있다고 판단하여서 신행생활도
점검하고 나의 인생도 새로 정립하여야 겠다고 생각하여 학교선배인
K법사에게 경전을 함께 공부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을 했었고
그 말을 잊지않은 K법사가 대학원시절에 연락을 주었다. 경전을 공부할
구성원이 모였으니 함께 공부하자고....

K법사는 대학선배이지만 지금은 대학선배가 아니다.
나의 스승이고 나의 친구이고 나의 생명이다. 나는 K법사를 스승으로
대하고 K법사는 나를 친구로써 대한다. K법사는 나에게 경전에 대한
새로운 눈을 열어준 분이다. K법사는 많은 사회적 유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협하지 않고 법사의 길을 택했고 정법이 아닌 불교,
관념의 불교에는 조금도 여지를 두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간다.
나는 오늘날과 같은 정치적 음모와 상술적인 가치 기준의 시대,
속임수와 사기가 난무하는 이 시대에 K법사를 알게 되었다는,
이 인연에 너무나도 감사한다. 왜 대학시절에는 K법사를 대학선배
정도로만 알았을까?
그렇게 한 2년간을 경전을 공부하고 대전으로 오게 되었다. K법사와의
경전공부는 단순한 지식공부가 아니었다. 경전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시각을 갖도록 하는 공부(그러니까 경전의 글귀가 아닌 경전의 마음을 읽는)
였다.

대전에 내려와서도 주말에는 경전을 공부하러 서울에를 갔다.
사실은 결혼할 여자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기때문에 겸사겸사..
그러다 결혼을 하고 발길이 뜸해졌다. 가족을 책임지고 분주한 일이
많다는 핑계를 대고.... 그래서 스님들이 결혼을 하지 않나보다.

생존경쟁의 싸움터에서 열중하다보니 영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동안 머리에 집어넣은 훌륭한 말씀들도 생존경쟁의 아귀다툼속에서는
힘을 쓰지를 못했다. 도인의 꼴이 너무도 우습게 함몰되어 가고 있었다.
"야! 이래서야 안되겠다." 대전 지역신문 교차로에 광고를 냈다.
"함께 경전을 공부할 도반을 찾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도 많은 전화가 왔다. 서울의 K법사에게
전화를 해서 경과를 보고했더니
대전까지 내려와서 도움을 주시겠다고 한다. 그래서 대전에서의
신행생활이 시작되었다.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싸움터에서
무사히 견딜 수가 없겠다는 절박함을 앉고서...

나는 나의 동지들과 경전을 공부하기 전에는 "참선 지상주의자"였다.
참선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간단히 말하면 경전공부하는 것이 곧 참선이다. 흔히 경전은 부처님의
말이고 참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말하지만, 말도 안되는 말이다.
마음없는 말이 없기에 경전이 곧 부처님의 마음이다. 단지 부처님의 말만
보고 부처님의 마음을 보지 못하기에 쬐끔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경전이란 곧 거울과 같은 것이다. 나의 삶을 비추어 보고 옷깃을 여미는..
경전을 보는 방법은 전통적으로 우리의 선배들이 했던 방법이 옳다.
우리의 선배들은 경전을 수직적으로 배열하는 교판 따위에 크게 관심을
두지를 않았다. 중국의 천태종이나 화엄종과는 역시 우리 선배들은 다르다.
우리 선배들이 전통적(그렇다고 기록된 것이 아님)으로 가진 경전관은
모든 경전은 다 동일하다는 것이다. 짧은 반야심경이나 아주 긴 화엄경이나
모두 완벽하게 진실된 삶에 대하여 완전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을 학문적 카테고리에서 해부하거나 무슨 서열을 정하는
따위의 짓을 하지를 않으셨다. 경전에 대한 관점자체가 철저한
불이(둘이 아님)였다. 일본의 정토종은 무량수경만 경전으로 받들고
일본의 법화종은 법화경만 경전으로 받든다. 그럼 다른 경전은
다 거짓말이란 말인가? 그런 선택지는 경전보는 눈을 멀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와서 서양의 학문적 체계가 들어오면서 경전보는
관점들이 바뀌고 있다. 서양의 물질문명이 발달했으니 삶 그 자체도
우리보다 발달했으리라는 판단하에 경전을 체계화 하겠다고 한다.
부처님이 설한 순서에 의하여 경전에 어떤 체계가 있다고 한다. 그럼
그 체계만 완벽히 이해하면 삶이 진실해 질 수 있을까? 그렇지가 않다.
부처님은 지금과 여기에 사셨지, 미래를 생각하시거나 체계적으로
한 단계씩 제자들의 수준을 높이거나 하시지를 않으셨다. 언제나
그 순간에 충실하셨다. 그렇게 경전을 체계적으로 서열을 정하고
각 경전마다 말하는 내용을 "사상"이라는 울타리에 집어넣고 하는 것은
아마도 일본이나 서양에서 유학한 분들과 그 아래에서 공부한 분들이
크게 기여를 하는 것 같다. 요새는 스님도 고등학교 이상을 졸업해야
된다. 부처님이 보시면 어떠실지 궁금하다. 중생제도를 위하여는
불가피하다고 하는데, 왜 솔직히 "불교라는 교단을 크게 만들기"위하여
필요한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들 하지를 않는지 모르겠다.

언제, 부처님이 고등학교를 나와야 부처님의 제자로 받아준다고
말한적이 있는지.... 얼마전에는 불교방송에 모스님이 버마에서
위빠사나를 공부하였다고 하면서 버마에는 깨달음으로 가는 위빠사나가
많다고 한다. 국내에 이미 들어온 위빠사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수승한 위빠사나가... 자기는 그것을 했단다. 어처구니 없는 내용이다.

학문적 사고방식은 불법이 말하는 진실한 삶을 사는데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한다. 교육수준이 높을 수록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인 머리를
굴리는데는 뛰어날 것이다. 아마도 우리 불교는 정치나 경제를 잘 하는
스님들이 많이 필요한 모양이다. 이왕이면 불교신자도 고등학교 졸업의
학력이 있어야 된다고 못을 박아 버리시지....

위와같은 관점들이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한 아무리 경전을 보아도
경전을 볼 수 없다. 특히 대승경전을 볼 수 있는 눈은 완전히 멀어
버린다. 경전은 삶을 묘사하고 삶을 말하고 있다. 경전속에는 우리의
삶이 그대로 다 나오고 있다. 그런데 삶에 질서가 있을 수가 있을까?
질서있는 삶이란 것은 프로그램된 로봇의 삶인데, 우리는 스스로를
로봇으로 살기를 원하는 것일까? 우리는 경전이 아니라 지침서를
원하는가? 차례차례 지시하는데로 가면 목적지로 골인하는 그런
삶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경전을 보아서는 안된다. 경전은 지침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삶은 무질서하다. 삶이 질서라면 얼마나 권태로울까를
생각하면 끔찍하다. 그 무질서의 삶이 경전으로 표현되어 있다.
부처님은 질서를 요구하시지를 않는다. 왜냐하면, 질서라는 것은
곧 불평등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질서는 이데올로기이다.
불교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얽매인 노예적 삶에서
튀어나와 자유를 얻게하는 것,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그것이
경전이다. 

그러므로 경전을 볼 적에는 질서를 보려고 하지 말고 무질서한
삶, 이 자체를 부처님께서 얼마나 냉정한 머리와 얼마나 따뜻한
가슴으로 말하고 있는지를 보려고 해야 한다. 왜 그렇게 말씀하실까
그것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여백을 읽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자유를 얻을 수 있지, 만일 경전에서 지식과 사다리를 습득하려 하면
부처님의 의도와 관계없이 우리는 부처님의 노예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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