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5년02월15일(수) 15시24분45초 KST 제 목(Title): 나의 신행기 7 [앉아 죽고 서서 죽고...] 불교에 입문할 때, 우리의 눈을 뒤집어 버리는 것이 "앉아 죽고, 서서 죽고..." 이다. 나는 불교에 대하여 이것 저것 잡식하고 나서 매진한 것이 참선이다. 나는 지금은 참선이란 것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옛날에는 참선을 열심히 하려고 했었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밤 늦게 집에 들어오면 그냥 잠들지 않고 졸음을 이기느라 송곳을 목에 들이 대기도 했다. 마치 어떤 스님을 흉내내듯이... 그렇게 매진하던 어느날 잠을 자다가 가위에 눌렸다. 발버둥을 치다가 억지로 잠이 깨었다. 몸과 마음이 몸시 허약해져 있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바르게 앉아서 숨을 고르게 하였다. 얼마간 지났을까? 내 몸이 앉아 있는채 공중으로 떴다. 천장에 머리가 다아서 몸이 떴음을 알았다. 그리고 몸이 뜬 것을 인지하자 마자 "쿵"하고 떨어졌다. 참선을 하다보면 별별일이 다 생긴다. 그러나 하나도 가치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몸이 허공에 뜨는 것은 의식적이건 또는 무의식적이건 그냥 정신병인 것이다. 참선하다 오는 모든 현상들 그것이 깨달음이라고 보이더라도 그런 모든 현상들은 다 정신병에 불과하다. 참선에 입문하기전 보다도 더 나쁜 것에 불과하다.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했다. 여전히 겁쟁이에 불과하고 오히려 공포감을 줄 뿐이다. 그러니 토굴에서 혼자 공부하면 어떤 일들이 생길까? "삼서근"이 눈 앞에서 춤을 추고... 참선이라고 하면 불교중에서도 아주 인기종목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는 불교신자가 아니지만 참선은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참선과 단학이 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참선이 명상법중 하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나도 역시 그랬다. 내가 한 말들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런 말을 하지를 않는다. 참선은 명상이 아니다. 참선과 단학은 완전히 다르다. 불교신자가 아닌 상태에서 하는 참선은 참선이 아니다. 불교의 참선은 생명 그 자체를 주제로 한다. 생명을 움직이는 방법은 불교의 참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참선을 건강법이나 정신수련법(요가,기공,선도,단학)과 앉은 모양이 비슷하다고 같을 것이라고 착각하면 안된다. 직장연수중 참선하는 시간이 있었다. 자세는 어떻게 하고 호흡은 어떻게 하고 등등... 그건 참선이 아니다. 생명 그 자체를 아무런 선입관 없이 그대로 보게하는 것이 참선이다. 그러므로 다음의 말이 진실이다. "참선은 시장바닦에서 해야 한다..." 생명이 펄펄 약동하는 그 자리가 생명의 실상을 아무 여과없이 그대로 볼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나의 본 면목을 확인하기 가장 좋은 곳은 생명력이 날뛰는 자리이다. 번뇌망상이 치성해서 무게를 이기기도 힘든 그런곳이야 말로 최고로 좋은 참선처인 것이다. 참선을 해서 견성하겠다는 생각이 있으면 먼저 "나무"하는 것 부터 배워야 한다. 아니 "나무"하면 참선은 거의 다 한 것이다. 그럼..참선이 왜 이렇게 건강법이나 정신수련법처럼 오해되게 되었는지 알아보아야 겠다. 그 근원은 육조 혜능과 신수의 게송에서 부터 싹이 트는 것이다. 그 게송을 다 왜우지 못하지만 하옇튼지 정 반대의 내용이다. 육조는 "닦을 것이 없다", 신수는 "열심히 닦는다"고 했다. 왜 육조가 불조의 혜명을 잊게 되는가? 닦을 것이 없다는 곧 "나무","완전포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뭘 한다고 하는 그 순간 보이는 것은 왜곡되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수천년을 하여도 진실을 보지를 못하게 되는 것이다. 호흡법을 익혀서 육신과 정신이 강해져도 진실을 보지를 못하면 궁극적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이다. 어쩌다가 참선이 "내가 닦아나가는 수행"으로 오해되었는 지를 모르겠다. 분명 "나"는 틀림없이 맞지만 그러나 우리의 나는 완전히 왜곡된 거짓의 나인데 그 거짓의 나가 참선한다는 것이 크나큰 정신병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나의 방법, 나의 가치"를 완전 포기하였기에 부처님이 되신 것이다. 지금도 신수스님 같은 분들이 엄청나게 많다. 배운 사람이 많아지면 질 수록 많아 질 것이다. 그러면 배운 사람에게는 왜 닦아 올라간다는 것이 매력적인가? 배웠다는 사실이 남보다 더 위에 있다는 상대적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배운 것이 많은 분도 배운 것, 아는 것에 대한 가치적인 미련을 다 버렸을 때야 비로서 견성성불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냥 지식으로 알고 실제는 따르지 않는 "나무"하지 않는 사람이 참선하면 시간낭비일 뿐이다. 그렇다고 배운 것, 아는 것이 다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배움이 멈추게 되는 것, 이젠 이만하면 되었겠지 그 상태를 인정받고 싶은 것, "나무"하지 않으면 그것이 배움의 병이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곧 관(觀)을 말하는 것이고 이것은 견(見)과는 다른 것이다. 견은 대상을 보는 것이고 관은 생명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관은 나무를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나무를 하지 않으면 생명을 보지 못하고 항상 생명이 입고 있는 옷만 보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림자에 현혹되는 것이다. 시장바닦에서 하루종일 시달리다 단 5분만 앉아 있어보자. 오분동안 수도 없이 많은 생명의 파노라마가 엄습한다. 시끄러워 못하겠다고 절간이나 찾아다니면 평생 1분도 할 수 없는 것이 이 참선이다. 그러니 "나무불법승"을 하여야 그나마 참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모든 병은 "나무불법승"을 하지 못하여 일어났었다는 것을 벗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