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5년02월15일(수) 15시22분27초 KST 제 목(Title): 나의 신행기 5 [관세음보살님을 뵙고...] 내가 읽은 불서중에는 신심을 고양시키려고 의도적으로 쓴 불서들이 있었다. 그러한 책에는 의례 나오는 것이 관세음보살님에 대한 친견기였다. 나는 내가 관세음보살님을 만난 이야기를 해야 겠다. 단언적으로 말해서 내가 관음보살님을 만났것은 병이다. 원래 관음보살님은 고난에 빠진 중생에게 나타나는 분이니까 내가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나타나셨다면 난 병자인 것이다. 그날도 나는 밤 늦게 까지 무엇을 했는지 눈이 시뻘건채 지쳐 쓰러져 있었다. 갑자기 담배가 피고 싶었다. 그래서 담배 한가치를 맛있게 피우고 이불위에 쓰러졌다. 그런데 앞에 누가 있었다. 흰색옷을 입으신 백의관음께서 서 있는 것이다. 차마 얼굴을 들지를 못하였다. "왜! 하필 담배를 피웠을 때 나타나실까?" 그 순간 사라지셨다. 가신 후에 괜히 기분이 좋았다. 나도 관음보살님을 뵈었다. 한 관문을 통과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조금 섭섭했다. "담배 피운 후에 나타나지 마시고 염불할 때 나타나시지!" 그래서 난 이 사실을 한번도 공개한 적이 없다. 염불할 때, 나타나셨으면 그 후로도 오랬동안 떠들썩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생각하면 담배핀 후 나타나신 것이 너무도 감사하다. 염불을 하더라도 관음보살님을 뵙지 않는 것이 뵙는 것 보다는 훨씬 진실에 가깝다는 말을 하고 싶다. 실제 관음이라는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실생명이 움직이는 즉 모든 중생을 부처님으로 모시는 그 움직임을 일러서 관음이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그 관음이 누구에게는 나타나고 누구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를 않는다. 병이 있고 고통에 있으면 원래 함께 작용하고 계신 분이다. 항상 계시기에 별도의 모습이 없으시다. 있다면 각자가 생각하는 모습은 있을 것이지만.. 나는 불서를 읽으면서 은연중에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다. 그 강박관념이 담배 한대 피고 긴장이 풀어지자 현실로 등장을 한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족자나 그림에서 흔히 보는 감로수병을 들고 있는 그림속의 백의관음인 것 같다. 이 정신병은 강박관념이다. 관음보살뿐만 아니라 염불삼매, 선정삼매를 고정화 시켜서 추구하면 자기가 원한 삼매의 모습은 꼭 나타난다. 그렇지만 그것은 부처님의 삼매가 아니라 자기만족이라는 병인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도 무서운 원칙이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인정하는 것은 다 현실로 나타난다는 무서운 진리성이기 때문이다. 즉 스스로 규정한 세계에 빠져서 스스로 얽매이는 것이다. 대부분의 삿된 종교들이 이러한 현상을 이용하여 혹세무민을 한다. 불교도 삿된 불교는 이런 현상들에게 기막힌 의미를 붙여서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다. 근래의 위빠사나가 관심거리가 되는 것 같다. 관법이 대승불교권에서 주 수행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것은 그것이 자기구속과 자기만족에 빠지게 될 수 있는 위험성이 많기 때문이다. 소승불교라서가 아니다. 대승경전인 관무량수경에 보면 위빠사나와 비슷한 관법들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대승불교권에서는 그런 수행을 권하지를 않았다. 참선이나 염불은 집중명상인 관법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관법 또는 참선이나 염불을 집중명상처럼 한다는 것은 큰 번뇌를 이용하여 작은 번뇌를 감추는 결과밖에는 없는 것이다. 어떤 유명한 타계한 외국의 신비주의자는 부처님이 수식관을 해서 깨쳤다고 말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부처님은 집중명상으로서의 수식관도 버렸다. 일체 모든 자기한계를 자기가치를 다 포기한 것이다. 그것이 "나무"이고 이 전통이 참선이나 염불등의 대승수행에 그대로 계승되는 것이다. 삶은 강박관념이 없이 살아야한다. 그것이 진실한 삶의 근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